감각, 지각의 민감화
한국인들은 흔히 피곤할 때 '허리'가 아프고, 경제적으로 궁핍할 때 '허리'가 휘고, 구부정한 자세를 한 사람에게는 '허리'를 펴라고 말한다. 허리에 상응하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waist'이지만 이걸 그대로 쓰면 어색하고 영어는 보통 'back' 즉 '등'이라는 말을 쓴다. '우리 할머니는 허리가 아프다'는 'My grandma has back pain'이고, 허리를 펴라는 말은 영어로 'Straighten your back'이다. 한편 한 의료인류학의 연구에 따르면 '어깨가 결린다'라는 신체 생리적 현상은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만 생긴다고 한다(고바야시 마사히로, '어깨 결림에 관한 고찰'). 영어는 blue와 green이란 색을 다른 단어를 이용해 표현하고 이는 한국어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경계는 상대적으로 모호하다. 한국인들은 파란색과 초록색을 묶어서 '푸르다', '푸른 숲'같은 표현을 쓰고 신호등의 초록색 신호도 파란불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 나라의 사람들에게 태양을 그려보라고 하면 노란색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인들은 대부분 태양을 붉게 그린다.
우리의 사고와 감정, 감각은 언어의 구조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같은 신체 부위가 아프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등을, 어떤 사람들은 허리가 아프다고 표현하고 실제로 그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신체 부위가 다를 것이다. 어떤 언어를 통과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다른 체험을 하고, 다른 형태의 의미, 감정, 감각을 느끼며 이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사람이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사람을 지배한다’라는 언명은 구조주의 사상이 정립된 이래 상식이 되어 왔다. 언어는 총체를 분절해 표현한다.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이 있고 심지어 무지개조차 그렇지만 우리는 그 스펙트럼을 7가지로 나누고 묶어 정리하는 식이다. 연속체를 나누고 묶는 기준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세계관, 윤리관, 미적 감각에 따라 다르다.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학습자는 모국어와 상이한 감각, 지각, 감정 등을 만나게 되며 이를 수용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민감하게 발달시킬 수 있다.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들어 본다. 9년 전 겨울, 나는 몬타나 출신인 미국인 개럿의 고향집을 방문했다. 나는 그곳에서 3명의 성인, 한 명의 어린아이를 만났는데 그중에서도 개럿의 아버지인 제프가 특히 나를 반겨줬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를 ‘미스터 혼’이라고 부르며, 나도 모르게 친구 아버지를 모시듯 깍듯하게 대하고 있었다. 제프는 '미스터 혼'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주길 원했지만 처음에는 선뜻 이름을 부르기 어려웠다. 나는 그때까지 아버지뻘인 장년의 남자, 그것도 친구의 아버지에게 이름을 부르며 격의 없이 대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눈 덮인 몬타나에 몇 주간 머물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모두 레드제플린(Led Zeppelin)의 팬이었고 무정부주의에 관한 호기심이 있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거꾸로 제프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나의 내면의 무언가가 굉장히 많이 달라져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그를 더 이상 친구의 아버지, 아버지뻘의 아저씨가 아니라 인간 ‘제프’로 인식할 수 있었고 그건 굉장히 멋진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 올케, 형님, 아주버님 같은 복잡한 호칭을 생략하고 누구든 이름을 부르는 경향이 생겼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주도적으로 운영할 때는 일주일에 하루는 ‘선생님’, ‘장학사님’ 같은 호칭을 빼고 이름만을 부르도록 그리고 모두 그날만큼은 반말만을 사용하도록 시도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내가 오직 즐거움만을 좇아 그런 결심을 했던 건 아니다. 한국어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존대법, 비민주적인 문법 체계 때문에 권위주의가 피어나기 쉽다. 또 이름을 부르지 않는 문화 때문에(이름을 부르면 하대라고 본다) 한 사람을 개성과 인격을 가진 ‘개인’으로 인식하지 않고 직함이나 관계에 따라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모국어의 내적 형식 속에서 느껴온 답답함과 갈증을 풀어가고 싶다는 소망이 무엇보다 컸고, 현상의 이면을 민감하게 바라보는 습관의 일부는 분명 외국어 학습만이 줄 수 있는 장점이었다.
인간은 앞으로도 영원히 언어의 노예 신세를 벗어날 수 없겠지만, 외국어 학습은 다양하고 풍부한 지각과 감각을 일깨우고, 좀 더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태도를 기르기 위한 최적의 장치를 마련한다.
*참고
1. 발도르프 학교 외국어 교육, 에르하르트 달, 푸른나무
(특히 25쪽 '지각 능력의 민감화' 부분을 참조했고, 추상적으로만 쓰인 부분을 내 나름대로 풀어서 설명)
2. 한국어의 발상, 영어의 발상., 문용,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