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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코선생 Aug 23. 2019

빅토리아가 낳은 최고의 풍자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

세계 최초 1인 소녀 활극     


성경,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미 문학사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     


패러디, 낱말 바꾸기, 아크로 스틱 등 은유와 말장난이 난무하는 동화     


빅뱅, 카오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문학서     


떡밥이 차고 넘쳐 수많은 영역에 서브컬처를 마구 뿌리고 다니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만나보겠습니다.               



앨리스를 책에서 만난 사람은 극히 적다.          

여러분을 처음 원더랜드로 이끌어준 매체는 무엇이었습니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 다구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앨리스를 처음 만났던 게 종이책이었습니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아마도 애니메이션이나 여타의 파생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난 경우가 대부분이겠죠. 요즘 어린 친구들에겐 2010년 팀 버튼 감독이 만든 3D 영화가 앨리스와의 첫 만남의 장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동화책인데 어째서 책으로 처음 접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걸까요? 이유는 아이들이 읽기에 너무 난해하기 때문입니다.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패러디와 난센스, 그리고 언어유희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춘 어른들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수준이 꽤 높은 편입니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석서나 해설서를 참고해야 할 정도죠. 반면 영화나 TV시리즈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이러저러한 복잡한 문제를 제거해버리고 오직 앨리스의 모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어린이들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른이 답게 앨리스와 원더랜드에 대해 한 삽 깊숙이 파헤쳐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족과 함께 정원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앨리스는 회중시계를 든 토끼를 쫒아가다 그만 땅속 나라로 떨어지게 됩니다. 알 수 없는 방에 갇혀버린 앨리스는 이상한 걸 주어 먹고 몸이 작아지거나 커지지기도 하고, 자신이 흘린 눈물에 떠내려가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합니다. 몸을 말리기 위해 여러 동물들과 함께 뛰기도 하고, 주방기기가 날아다니는 백작부인의 저택에 들르기도 합니다. 몸이 나타났다 사려 졌다 하는 체셔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고, 물 담배를 피우던 까칠한 쐐기 벌래와 언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모자장수를 비롯한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들과 티타임을 갖는가 하면, 홍학과 고슴도치를 기구 삼아 하트 여왕의 크로케 경기에 참가하기도 합니다. 가짜 거북에게 바닷속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해 불의한 재판을 비판하다가 그만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재판장에서 저항하는 앨리스를 향해 트럼프 병사들이 공격하는 순간, 트럼프가 아닌 얼굴 위에 떨어진 낙엽임을 깨닫고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최대한 심플하게 요약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꾀나 정신없는 스토리네요. 모험 이야기가 널리고 널린 요즘 아이들의 눈으로 본다면 한 편의 정신없는 코미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865년으로 돌아가 보면 앨리스의 모험 이야기는 당대 문학사에 혁신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혁신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문학사의 다양한 방면에 조상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소녀 혼자 떠나는 모험 이야기의 시초이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문을 통해 판타지 세상과 만나는 설정의 시초이기도 합니다. 교훈 없는 동화의 시초이기도 하고, 요즘에도 자주 볼 수 있는 엔딩인 아 씨바 꿈의 시초이기도 하죠. 또한 초판 출판본이 경매시장에서 30억을 훌쩍 넘긴 최초의 동화책이기도 합니다.     


40년 넘게 앨리스 주석본을 지필 해온 작가이자 저명한 수학자인 마틴 가드너는 이상한 나라 앨리스는 더 이상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모두에서 언급했듯, 앨리스를 책으로 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편집본이 서점가에 널려 있지만, 포떼고 차뗀 앨리스의 모험기만 남은 반의 반쪽짜리만이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원작은 분명 어린이들에게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면 왜 어른들이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작품 속에 어른들을 위한 흥미진진한 코드들이 어마 무시하게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들을 캐내고 해석해야 하는 노고가 뒤따르긴 하겠습니다만, 열매는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 달고 맛있을 것입니다.                    



토끼굴 넘어 풍자 속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무엇입니까? 누군가 묻는 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매드 티타임 장면이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모자장수, 3월 토끼, 겨울잠 쥐 등 뭔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앨리스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 되었죠. 팀 버튼 감독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가 연출한 3D 영화에선 모자장수를 아예 주인공으로 세우죠. 이 장면엔 어떤 풍자가 숨어있는 걸까요? 멤버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모자장수 - 당시 모자는 수은을 이용해 팰트 처리를 했었답니다. 덕분에 많은 모자장수들이 수은중독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특히나 정신이상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3월 토끼 - 왜 하필 3월 토끼일까요? 3월은 토끼들의 발정기입니다. 평소 순함에 상징인 토끼들은 이 시기가 되면 사나워지고 자신보다 큰 생물들에게도 겁 없이 미친 듯 달려든다고 합니다.      


겨울잠 쥐 - 팔 쿠션으로 쓰이다가 결국 주전자에까지 처박힘을 당하는 겨울잠 쥐는 특이하게 겨울잠을 자는 설치류로 깨어있을 때에도 야행성이라 낯에는 매우 무기력한 생명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조합해보면 미치고/사납고/게으른 존재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은 6시에 티타임을 시작하는데, 시계가 6시에 멈춰있기 때문에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한 칸씩 옮겨가며 하루 종일 티파티를 즐길 수 있죠. 특히나 앨리스가 그 자리에 끼려 하자 온갖 핑계를 내뱉으며 외부인을 배척합니다. 덕분에 앨리스는 그들과 함께 하는 내내 차 한잔 얻어마시지 못하죠. 

이 이야기는 빅토리아 시대 귀족들의 형식적이고 허세 넘치는 문화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귀족들의 삶에 대한 설명이 한 줄도 없지만, 캐럴 눈에 비친 귀족들의 끼리끼리 모임이 어떠했는지는 이 한 장면 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적난 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코커스 게임 씬인데요,

거인이 되어 흘린 눈물이 강이 되고, 다시 작아지면서 자신의 눈물바다에 떠다니게 된 앨리스는 다양한 동물들과 한 공간에서 교우하게 됩니다. 이들은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토론을 시작하는데, 도도새 제안으로 동물들은 코커스 게임을 시작합니다. 룰은 간단합니다.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서서 한 방향으로 계속 달리는 게 전부입니다. 속절없이 한 방향으로 달리다 지친 동물들은 도도새에게 누가 승자인지를 묻습니다. 도도새는 모두가 승자라고 하죠. 그러면서 상품은 앨리스가 줘야 한다며 앨리스가 가지고 있던 쿠키를 나눠먹습니다. 정작 앨리스의 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골무를 주었다 다시 받는 것으로 게임을 끝을 맺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이 이야기는 해결방안 없이 그저 꼬리물기만 거듭하는 영국의 정치가들을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코커스는 당시 영국의 정당정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요. 언제나 자신들만 승자이고 상품은 애꿎은 국민들에게만 받아내려고 하죠. 후원이든, 표든 말이죠.

     

코커스 게임을 마치고 앨리스에게 선물을 요구하는 도도새

이밖에도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여왕을 빗댄 하트의 여왕, 권력자의 눈치만 보는 관료들을 풍자한 장미에 빨간 물감 칠을 하고 있는 트럼프 병사들, 산업혁명으로 바빠진 현대인의 삶을 표현한 회중시계를 든 토끼, 재산만 믿고 날뛰는가 싶더니 여왕 앞에선 꼼짝 못 하는 백작부인 등등 짧은 동화 안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수없이 많은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희대의 말장난 책     


눈물의 웅덩이에서 만난 생쥐가 자신의 이야기(tale)는 길고 슬픈 것이라고 하자, 앨리스가 ‘긴 건  맞는데, 왜 꼬리(tail)가 슬프다고 말하는 거죠?’라고 받아친다거나, 물에 빠진 동물들에게 말려준다며(dry), 무미건조한(dry) 이야기를 들려준다던가 하는 동음 이어를 활용한 장난이 넘쳐납니다.

가짜 거북과 그리핀

이러한 말장난은 여왕의 권유로 만나게 되는 가짜 거북과의 대화에서 방점을 찍습니다. 바다거북이 바다학교에서 비틀기(reeling), 몸부림치기(writhing), 혼 빼놓기(distraction), 조롱(derision)을 배웠다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의 학교에서 배우는 읽기(reading), 쓰기(writing), 뺄셈(subtraction), 나눗셈(division)과 발음이 비슷한 단어로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이밖에도 단어들의 스펠링을 분해해 재배열한다던가 문장의 앞 글자를 세로로 읽으면 단어나 문장이 되는 아크로 스틱(Acrostic)을 이용한 시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상한 나라 앨리스는 많은 패러디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세세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작품 속에서 그가 새겨 넣은 시 대부분은 유명한 시, 그것도 진중하고 엄중하기 그지없는 시들을 매우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쐐기벌레와 대화 중에 ‘아버지는 너무 늙으셨어요...’라고 시작되는 꾀나 긴 시가 등장합니다. 이게 뭔데 이렇게 길어? 하며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 시는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 (1774-1843))의 시 <노인의 안락과 그것을 얻는 법>(The Old Man's Comfort sand How He Gained Them)으로 인생에 대한 지혜를 들려주는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루이스 캐럴은 이것을 비틀어⌜아버지 윌리엄⌟(You are old, Father William)이라는 제목의 패러디 시로 탈바꿈시켜버렸습니다. 몇 소절만 비교해보겠습니다.

     

먼저 원문입니다.     

"아버지 윌리엄, 당신은 늙으셨어요." 젊은이는 소리쳤네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도 회색으로 변했고요.

그런데도 정정하고 기운이 넘치시는군요. 아버지 윌리엄.

도대체 그 비결이 뭔가요. 말씀해 주세요.     

"내가 젊었을 때에는" 아버지 윌리엄이 대답했네.

젊은이 금방 사라진다는 걸 명심하고

처음부터 내 건강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았단다.

결국에는 부족한 일이 없도록 말이야.     


그리고 이상한 나라 앨리스에 실린 패러디입니다.     

"아버지 윌리엄, 당신은 늙으셨어요." 젊은이가 말했네.

"머리도 하얗게 세셨고요,

그런데도 계속 물구나무서기를 하시네요.

아버지 나이에, 그게 어울리나요?"     

"내가 젊었을 때에는" 아버지 윌리엄이 아들에게 대답했네.

"그러다가 머리를 다칠까 봐 두려웠단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텅 비었으니

하고 또 하는 거란다."          


진지한 교훈 담을 전복하여 꽤나 괴짜스러운 유머로 승화시켜버렸네요. 이밖에도 원더랜드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문학작품들의 이렇듯 다양한 모습으로 숨어있습니다.



지금까지 희대의 명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뭔가 허전하시다고요? 이번 편은 3편으로 나눕니다. 이어지는 2편에서는 앨리스가 뿌린 서브컬처에 대해 다뤄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3편에서는 작가인 빅토리아 시대의 엄친아 루이스 캐럴과 실존했던 모델인 앨리스 리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루이스 캐럴의 로리타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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