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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ux Nov 24. 2023

넌 왜 그리 밝으세요

밝음에 이유가 있나요

 엊그제 모처럼 사외 교육을 갔다가 참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본래 해당 교육은 관리자용이므로 아마 참가자 가운데 저와 같은 중간 관리자는 아주 드물었을 텐데, 저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행 역할을 맡았기에 관리자 G와 함께 둘이 교육을 받으러 갔습니다. 앞의 화면을 보며 강사의 강연을 들을 때에는 아무 일이 없었는데, 문제 상황은 분임토의 중에 벌어졌습니다. 자유롭게 주변에 앉은 이들과 자신의 경험을 나누거나 질의응답을 하라는 강사의 지시 아래 참가자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저와 관리자 G가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는 걸 제 앞에 앉은 사람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사람은 피식 하고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아니, 왜 그렇게 밝아요?”라고 밑도끝도 없이 묻는 겁니다. 분명 호의적인 접근은 아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저와 관리자 G는 대화를 멈추었고, 저는 당황해서 잠시 눈을 굴리다가 못 들은 척하고 다시 G를 향해 고개를 돌려 자연스럽게 다른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토의 시간이 끝나고 강연은 재개되었는데, 재차 강연을 들어야 하는 제 머릿속은 복잡하게 굴러갔습니다. 아까 그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한 의도가 뭐야. 난 뭐라고 답했어야 하는거지? 생판 초면인데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내가 어려보여서, 실제로도 다른 관리자보다 어려서 이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든가 제가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의도는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설령 의도를 알았다해도 일단 질문 자체가 무례했고, 제가 그에 답할 만한 내용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의도가 단순 호기심이었더라도, 저의 밝음은 선천적이므로 ‘타고났는데요,’ 뭐 이런 답밖에는 낼 수가 없고, 의도가 비웃음이나 비난이었더라도, 저는 이런 종류의 사람을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으므로 조금 전처럼 못 들은 척하든지 무시할 수밖에 없을 듯했습니다. 한창 딴 생각을 이어가는 와중에 강연은 끝이 났고, 찜찜한 맘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제 옆으로 예의 그 사람이 느닷없이 ‘관심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직장으로 방문하도록 추천해달라’는 말을 남기며 휙 지나갔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벙쪘습니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건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평소 사내외 갑을 관계 등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 사람의 직장은 현재 저의 직장에 잘 보여도 모자란 상황입니다. 헌데 그 사람은 초면인 저에게 무례하게 해놓고, 그게 무례란 걸 인지조차 못했는지 자기네 직장 홍보까지 제멋대로 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정황 상 그 사람은 아마도 해당 기관의 관리자급일 겁니다. 어찌보면 진정 다행입니다. 이 사람이 저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세상에. 같은 직장에 있었으면 제게 얼마나 더 무례하게 굴었을까요. 저는 지금 직장 동료들과도 충분히 힘든데요. 왜 그렇게 밝아요, 라는 물음인지 타박인지 모를 문장은 제가 태어나서 타인에게 처음 들어본 문장이었습니다. 성격이 지나치게 밝아서, 혹은 밝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여럿 봤어도, 남에게 왜 밝아야 하는지를 묻는 –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도 되는 내용을 기어코 입 밖으로 꺼내서 묻는 - 사람은 여지껏 주변에서 보지 못했거든요. 


 아니 내가 시끄럽게 떠든 것도 아니고 분임토의 시간에 웃으면서 이야기한 것 뿐인데 뭐가 문제야. 남 웃는 얼굴이 보기가 싫었던건가? 내가 저더러 밝아야 한다고 강요를 했어 뭘 어쨌어. 저가 뭔데 내 밝음의 까닭을 물어. 뭐 밝으면 안 돼? 반대로 내가 어두웠으면 어쩔건데. 왜 그렇게 어둡냐고 물을거야? 대체 주위에 꼬인 인간들이 왜 이리 많어. 귀가하여 밀린 집안일을 하고 아들을 재운 후 저도 잠들려는 참에 불쑥 오후의 일이 기억났습니다. 저는 혼자 씩씩거리면서 공연히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습니다. 넉넉했다가 한 순간에 곤두박질친 성장 환경, 시도때도 없이 제게서 시간과 노동력을 가져가시는 부모님, 자기 주장만 거듭하는 직장 사람들, 게다가 최근엔 제가 터뜨린 보이스피싱 사건에 이르기까지 제가 좌절하고도 남을 요소들은 저의 인생에 차고 넘쳤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견디고 극복할 수 있게 저를 도운 건 그나마 제가 타고난 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피싱 피해접수를 해주신 형사님들과, 저의 온갖 사정을 듣고 치료해주시는 의사 선생님 및 상담사님이 칭찬해주신 저의 그 밝음이 누군가에 의해 부정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왜 밝아야 하는지를 소명하라는 식의 도발까지도 받았습니다.  


 그러게요, 저는 저런 일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아직까지 밝음을 유지하고 있을까요. 저라고 뭐 ‘어두울 줄을 몰라서’ 밝은 건 아닌데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무렵 아버지가 아파트 사기를 당하고,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하여 이리저리 이사를 다녔습니다. 집에 제 방이 있다가, 없다가를 반복하였고 때마침 우리나라 사회도 흉흉하여, 이런 상황에 어린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2학년일 때 예수 재림으로 인류가 멸망하고 선택된 자들만 휴거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4학년일 때 성수대교 붕괴, 5학년일 때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도시전설이 퍼지고 공포 소설 및 호러물이 학교에 유행했습니다. 6학년 때는 그냥 지나가는 줄 알았더니 북한의 무장 공비가 동해안에 침투했다는 뉴스도 나왔습니다. 터무니없는 행동이지만, 저는 무장 공비 뉴스를 접하고 나서 언제 공비가 집에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무기를 마련한답시고 한동안 베개 아래 식칼을 두고 자기도 했습니다. 침입자가 없었어서 망정이지, 혹시라도 있었으면 침입자를 내쫓긴커녕 제가 식칼 탓에 저의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학업에만 집중하는 게 차라리 저의 정신 건강 면에서는 편했습니다. 공부는 본인이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거의 유일한 부문입니다. 저는 가정에서 무력했기에 저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학교가 좋았습니다. 학업 성적이 높은 편이어서, 또는 선생님들이 저만 칭찬해서, 저를 흉보고 싫어하는 티를 내고 근거없는 소문을 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상관 없었습니다. 그 친구들보다 제가 제 인생에서 해결해야 하는 더 큰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어서, 제 눈에는 그 친구들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당장 제가 제 방 침대에 누워 올려다보는 바로 그 위치에는 아버지가 철봉을 달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옷가지가 가득했습니다. 철봉을 달며 “이렇게 해놓으니 정말 편하고 좋겠지?”라고 답을 정해놓은 채 물으시는 아버지에게 아빠 내 방이 세탁소같아, 나 저거 내 얼굴로 떨어질까봐 너무 무서워, 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거절할 권리를 거세당한 채 자라났으니까요. 제가 몇 번이나 철봉이 제 얼굴을 강타하는 꿈을 꿨는지, 아버지는 결코 모르실겁니다. 악몽에 시달리다 못한 저는 그냥 조용히 제가 자는 위치를 반대로 바꿨습니다.


 물건을 버리질 못하고 들이고 쌓고, 들이고 쌓고를 반복하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탓에 행거는 집 안 복도를 잠식하고 결국 제 방 천장에 철봉이 들어오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철봉을 뒤로 한 채 책상에서 공부를 하든지, 철봉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 야광별을 붙이든지 하는 사소한 일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시절에도 저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에 화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지만, 그저 다음만 생각했습니다. 다음 학년이 되면 이런 욕을 들을 일이 없겠지, 졸업하면 이런 아이들을 만날 일이 없겠지, 직업을 얻으면 저 철봉을 치울 수 있겠지, 결혼을 하면 이 집을 나갈 수 있겠지.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저는 보다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일상을 누리기 위하여 주어진 상황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냥 뭐랄까, 저도 잠시 어두워보기도 했고 계속 어두울 수도 있었지만, 해봤더니 그런다고 해서 제게 별 도움되는 게 없었습니다. 어두워봤더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밝아봤더니, 기분이라도 나아지더군요. 단지 그거였습니다.


 결혼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결혼을 통해 제 어린 날의 많은 아픔들을 생성해낸 이들로부터 다소간은 멀어질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도 독립했고 성인인지라 차후로는 제가 제어하지 못하는 불행이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만인이 이야기한대로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지극히 순진한 저는 끊임없이 저를 무력하게 만드는 사건들을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처음 임신한 아이가 22주에 접어들어 태동을 시작했고, 꾸물꾸물 움직이는 걸 보면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러다 동생과 크게 말다툼을 한 뒤 엉엉 울고 잠든 다음날,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초반엔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러기엔 섬뜩하게도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거둬보려고 애썼건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해외에 있던 신랑에게 한밤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 나 너무 무서워. 어떡하지? 괜찮겠지? 괜찮아야 하는데, 나 왜 이렇게 무서워? 둘이 애써 서로를 다독이고 통화를 마쳤지만, 저는 밤새 한숨도 못 잤습니다. 신랑도 실은 못 잤다고 합니다. 아니나다를까, 병원에 가보니 아이의 심장은 멈춰 있었습니다.


 멀쩡하던 아이가 숨을 거둔 것도 기가 막힌데, 아이가 너무 커서 수술로는 빼내기가 힘들고 유도분만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아이는 태어날 무렵이 되면 자연히 자궁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제 몸에서도 호르몬이 나와 자궁이 분만에 맞추어 수축을 하겠지만, 숨을 거둔 아이는 움직임이 없으므로 자궁 입구에 기구를 넣고 약물을 투여하여 인공적으로 아이가 나올 공간을 벌리는 겁니다.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만 있어도 기함할 노릇이라, 병원에 함께 오셨던 양가 어머님들이 한꺼번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분만실로 옮겨졌습니다. 약물이 제 몸에 작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관계로, 사방에서 산모들의 비명 소리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그곳에서 저는 3일 간 체류했습니다. 마땅히 할 게 없어 뒹굴거리던 저는 인터넷으로 검색을 잠시 했다가 체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자세도 해보고, 저런 자세도 해보고, 헛둘헛둘 하는 제게 친정 어머니가 너 갑자기 뭐 하니, 라고 물으셨습니다. 일상적인 어조로 “아, 이렇게 하면 아기가 잘 나온대,”라고 대답하며 마저 체조를 하는 저를 뜨악하게 바라보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가끔 어머니가 이 때의 저를 회상하시며, 저의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실은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는 아닙니다. 당시 체조하고 있던 저는 표현하지 않았던 것뿐 임신 기간 내내 저를 이리저리 굴리던 직장 상사들과, 전전날 말다툼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던 동생과, 바보 천치같이 그렇다고 그 스트레스를 다 감내했던 저 자신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고 결과적으로 아기를 잃은 제 처지가 몹시도 슬펐습니다. 하지만 제가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면 뭐하나요. 아기는 돌아오지 않는데요. 저는 이전처럼, 다음만 생각했습니다. 우선 아기를 잘 낳고, 그 다음 소파술을 받고, 그 다음 몸조리를 하고, 그 다음 회복을 하고, 그 다음, 그 다음. 저는 지난한 그 과정 중에서 줄곧 다음 계획을 짰습니다. 회복하면 반대로 해야지. 매일 운동해야지. 또 임신하게 되면 임신 사실 알자마자 바로 큰 병원으로 가야지. 직장에서 다시 나를 굴릴 것 같으면 병가를 써야지. 누군가와 다툴 일을 줄이고 다투더라도 그 생각에서 얼른 벗어나야지. 화내거나 슬퍼하지 말아야지. 왜냐하면 나한테 도움될 게 없으니까.


 앞서 저는 피해를 당한 이를 건져올리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존감을 바탕으로 하는, 언제나와 같은 성실한 삶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됐든 또다시 피해를 볼 수도 있고, 무력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인생을 엄청 길게 살아온 건 아니지만 최소한 여태껏 봐온 바로 불행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불행 탓에 한동안 화도 내고, 슬퍼하고, 절망할 지도 모르지만 필시 저는 언제나 그랬듯 이래봤자 나한테 도움될 게 없다, 하면서 그저 다음만 생각하며 나아갈 듯합니다. 그리고 사소한 뭐라도 좌우간 실행하고 있겠지요. 그래야 저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그러다보면 이렇게 옛 이야기하듯 불행했던 경험을 추억으로서 반추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밝냐고 묻던 당신에게, 답을 드리지요. 저는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에 밝습니다. 당신이 저의 밝음을 궁금해하든 불편해하든 저는 앞으로도 계속 밝을 예정입니다. 과거 제가 못난 친구들의 말들을 못 들은 척한 것처럼, 당신보다 제가 제 인생에서 해결해야 하는 더 큰 문제들이 산적해 있어서, ‘제 눈에는 당신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당신네 직장 방문 추천은, 제게는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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