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포아빠 Sep 05. 2019

도서관에서 나는 울었네:보좌관의 직업 안정성

간신히 여의도 서식기_열한 번째

국회에서 일을 하면 많이 듣는 질문 중에 하나가 "함께 일하던 의원이 선거에서 떨어지면 실직하는 거예요?", "의원들이 그만두라고 하면 군말 없이 그만둬야 한다는데 너무 불안정한 직업 아니에요?"와 같은 직업의 안정성에 관한 것이다. 이 질문들은 다 일리가 있는 질문들이다. 국회의원 보좌진은 인턴을 제외하고는 '별정직 공무원'신분이지만, 신분이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국회 보좌진은 '늘공(언제나 공무원)'이 아니라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것이다. 심심치 않게 "파리 목숨 국회 보좌진", "국회 보좌관, 월급 의원에게 상납해"와 같이 신분의 불안정성과 처우의 열악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등장하는 것도 국회 보좌관이라는 직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인식은 틀린 게 아니다. 실제로 국회 보좌진은 재직 중에는 공무원으로서의 직위와 신분이지만 평생 보장되는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래서 국회 보좌진들도 스스로 "관노비", "비정규 일용직 공무원"이라고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여기에 '가방모찌'와 같이 변화된 보좌진의 역할을 반영하지 않은 과거의 부정적인 인식까지 겹쳐 실제 하는 일과 달리 저평가를 받는 일도 많다. 


그러나 국회 보좌진으로 일하는 것이 불안정한 일이라는 것은 절반은 맞지 않는 이야기다. 불안정성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특성과 함께 이 직업이 가진 특별한 성격과 점차 강화되고 있는 전문영역으로서의 자리매김이 불안정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면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보좌진은 늘 고용의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 4년마다 돌아오는 선거 때마다 직장이 재구성되는 기본적인 조건과 함께, 정치상황의 변화, 의원직 상실과 같은 돌출적인 사건도 벌어지고 가치와 철학의 불일치에서 오는 고민이라는 직업적 특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신분의 불안정성을 경험했다. 크게는 두 번의 사건이 있었는데 한 번은 국회 구성의 변화라는 '선거의 결과'였고, 한 번은 의원직 상실이라는 돌출적 사건이었다. 나름대로 의연하게, 또 인생의 밑거름으로 견디고 지나왔다고 자부하기도 하지만 불안정의 시간이 길었을 때 울기도 했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 이후, 2008년 총선에서도 당시 통합민주당은 의석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 만큼 큰 패배를 당한다. 의석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일자리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뜻했다. 당시 언론에는 "민주당 의원실 소속 보좌진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낮술에, 여의도 공원을 배회한다"는 기사까지 등장했다.


나도 이 한복판에 서있었다. 임기가 끝나면 의원직을 내려놓는 비례대표 의원실 소속에, 정식으로 직급을 단지도 얼마 되지 않아 별 기반도 없었던 '엎친데 덮친' 처지였던 나는 새로운 국회의 구성기에 FA(?, 자유계약선수)가 됐다. 함께 일했던 선배들이 여러 가지 정보와 도움을 주었으나 취업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는 직업에 대한 태도도 원인이 되었다. 국회 보좌진이라는 직업을 어떻게 규정하고, 의미를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과 태도가 있을 수 있다. 법을 만들고, 정치적 조언을 하는 직업인이자 생활을 꾸리는 사람으로서 더 많은 무게를 둘 수도 있고, 여기에 더해 정치적 가치와 철학에도 의미를 부여해 일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에 속했고, 지금도 그렇다. 두 가지 중 어떤 부류인가에 있어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평가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처지와 생각이 있을 것이고, 지향하는 삶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진 생각과 원칙대로 살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한 정당의 의석수가 줄었다고 국회의원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회 전체로 봐서는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다른 정당의 의석이 늘어난 만큼 일자리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일했던 의원실과 소속 정당이 다른 의원실로 옮겨 일을 하는 분들도 있었다. 계속해서 직업을 유지하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게도 나를 생각해주는 선배의 진지한 권유가 있었다. "신념도 좋고, 원칙도 좋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 잠시만 다른 당 의원실에 가서 일을 하다가 기회를 봐서 돌아와라. 내가 그 의원실 보좌관 친구와 이야기도 해놨다"라고 했다.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가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아직 저라는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이야기했지만 "지키고 싶은걸 지켜보겠다"는 백수생활은 열 달 넘게 이어졌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서, 중간중간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래도 나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 있어 견뎌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두 가지 사건이 겹치면서 나는 울고 말았다. 잘 다스려왔던 힘겨움과 서러움에 무너졌던 것이다.


첫 사건은 '뼈대 있는 야당 중진' 의원실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던 일이다. 그냥 떨어진 게 아니라 최종 두 명까지 올라가서 떨어졌다. 그러나 나를 울게 한 것은 그냥 떨어진데 있지 않았다. 최종 합격한 사람이 공백 없이 "다른 당 의원실에서 잠깐 비를 피했"다가 돌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 분의 선택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 내가 낙담했던 것은 "뽑는 쪽의 기준과 선택"이었다. 추상적이기도 하고, 그리 대단한 존재도 아니지만 '원칙, 신의'와 같은 단어들을 생각하며 어려운 시기를 견딘 사람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물론, 내 실력이나 능력이 모자라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에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최종까지 올라간 두 사람 중에 나 같은 사람이 선택받지 못한다면 도대체 내가 가진 삶의 태도와 정치적 신의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하는 서러움이 몰려왔다. 단순한 생활인이 아니라, 정치적 가치와 비전 그리고 신념까지 고려되어야 하는 직업의 세계에서 겪은 시련이었다. 


두 번째는 너무 오랜 실직 상태로, '의리, 신의, 원칙 찾다가 굶어 죽겠다'는 위기감에 다른 당 의원실에 면접을 봤을 때다. 내 머릿속의 기억은 온전치 않아 그때 의논을 했던 국회 선배와 주고받은 메일을 찾아보니 "사실, 고민 고민하다가 안 가겠다고 연락할만한 타이밍을 놓쳐서 갔다"라고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나는 그 면접에 가서 "000 의원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지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정치인"이라고 이야기했고, "개혁적인 목소리를 낸다고 하지만 말 뿐으로 000당 안에서 편하게 있는 것 같다. 더 나아가 그걸 넘어서지 못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거나 길을 만들지 못하면 정치인 자질이 없는 거라고 까지 얘기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를 뽑는 의원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누가 뽑겠는가. 결과를 볼 것도 없었다. '취직을 하려고 면접을 봤으면 힘 빼고 잘할 일이지,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길래 그렇게 면접을 보나' 하는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랄까 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뭐 그리 잘났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이러는지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다.


여하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공공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주위의 사람들이 알아챌 만큼 울었다. 그렇게 보좌진이란 직업의 불안정성을 온몸으로 겪은 셈이었다. 이제는 담담하게 또 웃으면서 이런 시간들을 회상하고 있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만큼 버티고 견디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잘한 일인지, 아니면 현명하지 못한 미련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를 지키는'일에 있어서 만은 그런대로 당당할 개인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정말 국회 보좌진은 불안정하고, 생활을 유지하고, 가정을 꾸려야 하는 입장에서는 좋은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 판단은 앞서 이야기했듯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과거에는 보좌진은 '가방모찌'라는 모멸적인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고, 국회의원에 종속된 수동적 직업인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가득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종종 그런 전근대적인 태도로 보좌진을 대하는 의원들의 이야기가 종종 언론에 소개되기도 하지만 국회 보좌진은 더 이상 그런 직업이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회의원은 4년마다 바뀌지만, 보좌진은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회 보좌진끼리도 "나는 몇 선 보좌관이야"같은 우스개로 자신들의 국회 경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4년마다 바뀌기도 하지만 그 의정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보좌진의 전문성은 아무나 대체할 수 없다. 법을 만들고, 예산을 평가하고, 언론을 상대하고, 각종 민원과 문제들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전문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롭게 당선된 국회의원과의 친소관계로 국회에 입성한 보좌진들은 국정감사와 같은 '대목'이 끝나면 전문성과 능력 부족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직업적 특성 때문에 현재 국회에는 특정 상임위원회에서만 일해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보좌진들이 '의원을 바꿔가며' 오래도록 일하는 경우가 흔하고, 국회 보좌관으로서 30년 가까이 일한 신화적인 인물도 존재한다. 즉, 자신의 가치와 철학을 가지고 실력을 키워 국회 보좌진으로서의 전문성과 자질을 갖추고 인정을 받으면 불안정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극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회 보좌진이란 직업은 불안정하다는 것은 한 면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힘들었던(또 앞으로도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니, 감회가 새롭다. 


작가의 이전글 정치인을 경멸하던 검사 누나를 떠올리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