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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Apr 21. 2020

오늘 점심은 맛있게 먹었는가

매일 먹는 밥이 좀 다르게 보인다면

회사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다 보면 반찬 흉을 보는 분이 꼭 있다. 지난 직장에서 있던 일이다. 당시 식당에서 여러 반찬과 함께 배달받아 뷔페처럼 펼쳐 놓고 점심을 먹었다. 불평의 아이콘은 꼭 식단의 내용과 품질을 평하며 식당에 대한 뉴스를 보도하듯 말하셨다. 어제 나왔던 반찬이 다시 나왔다는 둥, 너무 짜다는 둥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 그렇게 보였다. 식사비에 비해 먹는 것이 형편없는 것 같았다. 그 근처에서는 그나마 메뉴가 괜찮은 식당이었음에도 날 선 팩트 폭행에 먹는 나도 민망해졌다. 처음 먹었을 때는 무척 맛있었던 밥이었다.


식성 탓일 수 있겠지만 난 어지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그래서 급식을 집밥 못지않게 맛있게 먹었다. 심지어 군대에서 먹었던 소위 짬밥도 좋아해서 식사시간을 늘 기대했었다. 어딜 가나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으니 회사의 식사 분위기를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문득 내가 이상할 정도로 너무 무던한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판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는 공간에 오래 있다 보니 침묵하는 내가 저절로 동조하는 느낌이 생겼다. 의지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시나브로 깨작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내 귀에 들어온 불평을 방치하니 마음으로 슬쩍 거들게 된다. 그깟 한 끼 밥이 뭔가 싶다가도, 그 작은 것 하나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나를 보며 적잖게 놀랐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란 식의 변명을 해야 해서가 아니었다. 나 또한 가끔 먹어야 맛있다는 식의 자조 섞인 위로를 하는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원래 있었던 혹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힘이 잠시 밥을 먹는 시간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행복해지고 거기서 힘을 얻는 사람이라도 안 먹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먹는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소복한 밥 한 공기와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뜨며 기뻐했던 것이 언제던가. 여러 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전 직장에 처음 들어가 먹던 날이었다. 얼큰한 육개장과 들깨 친 무나물, 간간한 실 멸치 볶음과 주먹만 한 계란 프라이였다. 각자 도생하는 기자 생활에서 보기 힘든 점심 풍경에 내심 놀라워했다. 먹고 싶은 만큼 식판에 떠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는 시간이 정겨워 보였다. 편도로 2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다니게 된 직장의 첫 식사는 내게 새 직장에서 이룰 포부에 대해 남몰래 각오를 다지는 기회였다. 밥 먹는 시간이 마치 무장하는 시간 같았다.


내 관점이 살아있을 때는 점심이 단순히 밥 한 끼로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속에 할 일들을 떠올리며 즐겁게 몰입할 때는 그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진다. 혹은 그 시간이 더 나은 몰입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된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해도 배식에 실패하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자신을 위한 공급 시간으로 삼는다. 그게 아니라도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보면 내 돈 들이지 않고 매 끼니마다 메뉴 고민 없이 먹는 점심밥이 고마울 수밖에 없을 테다. 매일 먹는 밥을 대하는 자세가 재밌게도 내 현재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었다.


밥상 앞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불평보다 감사를 선택하길 희망한다. 이것이 내 삶에 생명을 연장할 관점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임을 알게 된 덕분이다. 나는 썩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는 삶을 꿈꾼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용도 폐기되는 시한부 인생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맞는 역할로 항상 의미 있게 살고 싶다. 이런 가치가 잠들지 않고 혀 끝에서부터 손발까지 이어져 깨어 있다고 느껴질 때, 단 한 번의 식사도 식상한 유행가가 아니라 압도적인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 자신에게 천천히 물어본다. 점심은 맛있게 먹었냐고.    


가장 작은 것을 대하는 제 모습에
모든 것을 대하는 제 진짜 모습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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