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선택했냐에 따라 나의 주인이 바뀐다면
놀이공원에 가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최소 신장이 정해져 있다. 움직임이 비교적 역동적인 기구는 대부분 110cm다. 이보다 낮으면 유아들이 탈 만하다. 지난해에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갔는데 마침 둘째 키가 110cm에 약간 못 미쳤다. 첫째 아이는 이보다 크니 마음대로 놀 수 있는데 둘째는 들어가기 직전에 막혔다. 둘 중 한 명만 타고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아쉬운 것은 물론 따로 타라고 하기도 어려워 고민하다 수를 썼다. 아이 신발 안에 내 양말을 집어넣어 키를 올려 함께 들어갔다. 덕분에 얼마나 신나게 놀았던지.
얼마 전 둘째 아이 키를 재보니 112cm가 넘었다. 아이가 그새 많이 컸다면 가족들과 이야기하다 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와 한바탕 웃었다. 아이는 그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아빠, 형과 함께 놀이기구를 재미있게 탔던 장면만 떠올렸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대다가 야외에 비가 오던 날이라 습한 실내에 있던 터라 신발 속 양말이 무척 꼬질꼬질했다고 얘기해줬다. 우는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달래면서 난 구석에서 신발 깔창 밑에 곱게 양말을 접어 넣었다. 이 순간이 웃음 향이 나는 추억으로 오래 남을 듯싶다.
이런 기억은 내게 자연스럽게 기쁜 감정을 갖게 해 준다. 자주 떠올리고 세세하게 기록하고 주변 사람과 얘기할수록 그 향이 짙어진다. 물론 아이의 키를 재보는 계기가 없었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한 순간의 기억이기도 하다. 그 직전까지는 별로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을 생각하기 전후로 내 안에 완전히 정반대의 감정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일을 떠올리기 전에 우울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슬픈 감정을 유발하는 어떤 일이 있었고 그것이 지나간 여파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한순간 바뀌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마음이 결정되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슬픈 일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사색에 빠지면 내게 좋은 감정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반면 내가 겪었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부정적인 감정이 씻겨내려간다. 부정적인 것을 망각하는 성향 때문에 그런 것일까. 때에 따라 이것이 잘 안될 때가 있으니 꼭 그렇진 않은 듯싶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자신 혹은 타인이 내린 평가 탓에 내 생각이 무엇인가에 묶일 때가 있다. 그러나 결국 감정은 내가 선택한 생각을 따라갔다. 그 감정이 행동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소리다. 슬픈 일이 나에게 찾아와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생각으로 그것을 붙잡으면 내 마음에 근심과 염려, 답답함, 무거움 등이 찾아온다. 그런 마음에서 어떤 일을 해낼 만한 힘과 포부를 얻을 수 없다. 그저 혼자 있고 싶고, 울고 싶고, 멍하게 있고 싶어 진다. 느리고 축축한 음악을 들으면 이런 감정이 증폭된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은 마음도 찾아온다. 불현듯 이것이 생각에서 출발한 것을 기억하면서 몸서리친다. 내가 선택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다 새로운 사실도 발견했다. 내가 별생각 없이 시간을 쓰고 있을 때 원치 않은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이유에서든 온라인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시간을 보낼 때 그렇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의미 없이 소비하며 내 시간을 쓰고 있을 때다. 그동안 나는 뭐했나 싶은 괜한 비교 의식에 초라한 감정이 든다. 이것을 자각할 때마다 내게 물어본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내가 선택한 생각의 결과일 텐데, 무엇을 선택했는가 하고. 파란색 하나도 보기에 따라 절망을 떠올리거나,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게 사람이 아니던가.
기왕이면 저는
스스로를 살리고 활기 주는 생각을
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