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답게 만드는 환경으로 바꾸려면
살다 보면 왠지 모르게 기죽을 때가 있다. 그저 성실하고 겸손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지나서야 그 당시에 실수하지 않으려고 얼어있던 상태였던 것을 자각한다. 이럴 때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자꾸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관찰하게 된다. 혹시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빠트린 것은 없는지, 모자란 것은 없는지 괜히 더 신경 쓴다. 다른 사람을 통해 너무 많이 보고 들으며 고민한 탓이다. 정작 나 자신은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만 쳐다본다. 이런 이유, 저런 까닭으로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초조해하고 불안해한다. 몇 년 전 내 모습이다.
여러 기억 중 손에 꼽을 만한 기자 시절을 소환해본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때는 어깨를 제대로 못 펴고 다녔다. 여러 언론사 시험에서 터무니없이 낙방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무렵에 우연히 들어간 곳이었다. 운도 실력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시험을 진행하는 매 순간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는 듯했다. 그 어느 때보다 침착했고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 끝에 기자가 되는데 처음 접한 조직 분위기는 명불허전이었다. 군대식 말투와 상명하복의 위계적 질서, 날 선 말투에 쓸데없이 풀이 죽었다. 책에서 보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그대로였다.
이런 태도는 알게 모르게 일에 영향을 줬다. 자꾸 실수가 생겼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 조심할수록 더 하게 됐다. 나답지 않게 자꾸 스탭이 꼬이고 나중에는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 것처럼 탄식하기도 했다. 겉만 멀쩡했을 뿐 속은 타들어갔다. 시야는 좁아지고 생각하는 방식은 단조로워졌다. 차안대를 씌운 경마장의 말처럼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다. 직업적인 기술은 갈수록 늘어갔으나 좀처럼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 그냥 누구 실망시킬 일 없도록 평균 정도만 하려 했다. 회사를 떠나며 마음을 누르고 힘들게 했던 뭔가가 치워지자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닌 본래의 내가 어느 순간 돌아왔다. 깊이 생각하길 좋아하고 본질을 추려 전후 맥락을 잘 설명하는, 또 잘 웃고 쾌활하게 지내길 좋아하는 나다. 그런데 어떤 장소와 시간에서는 그것이 마비됐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이래야만 한다'라고 보고 들은 것들이 책임과 부담으로 바뀌어 나를 묶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봐줄까, 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평가할까, 나는 그에 걸맞은 사람인지 따위를 알게 모르게 고민했다. 겉과 달리 속은 고아 같았다. 내 진짜 모습은 사실 내 마음이란 것을 이때 깨달았다.
실은 환경이 아니라 내가 품은 마음에 영향을 받고 살고 있었다. 어떤 조건이 나의 기를 죽였다고 생각한 것은 오해였다. 그 당시에 내가 마음에 품은 생각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었다. 누구도 내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치거나 일러주지 않았다. 물론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마음에 남고 오래 머물도록 결정한 것은 나였다. 그것이 당시 깨닫지 못했던 내 정체성이었다. 내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여기거나 혹은 좋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한껏 수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연코 이렇게 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어떤 순간에도 내가 지킬 정체성을 붙잡기로 마음먹었다. 말 그대로 마음이 바뀌었다. 때로 흔들렸으나 결코 꺾이거나 뽑히지 않았던 나 자신을 돌아봤다. 뿌듯하고, 즐거웠고, 행복했고, 미소 지었고, 든든했던 순간들의 나다. 팔을 걷어붙이고 누군가를 내 일 하듯 도왔던 기억, 내가 좀 덜 먹고 남에게 덜어주었던 추억, 다들 주저하는 일에 내가 하겠다고 손 들고 나섰던 일... 너무 다양했지만 한결같았던 내가 있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 남에게 후하게 베푸는 자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특별했다. 어쩌면 그전까지 나만 몰랐던 것 같다.
정체성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정하고 지키는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