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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Jan 02. 2020

휴직이 즐겁지 않아

나는 회사 체질이었던 건가?

2019년, 1월 1일. 나의 휴직 시작일은 꼭 거짓말처럼 1월 1일이었다. 새로운 계획 세우기에 좋은 날이지만 우리나라 새해는 구정이 지나야지~ 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무엇을 딱히 하지 않는 시기이기도 했다.

1월 1일은 모두가 쉬는 날이었기에 보통의 휴일처럼 가족이 함께 보내고 휴가인지 휴직인지 모를 1월 2일을 맞았다. 해가 바뀌어도 구정이 아니면, 또는 3월의 새 학기가 시작되지 않으면 특별히 달라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듯 나의 휴직도 그랬다.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의 겨울방학이 겹치는 시기인지라 그저 아이들을 보육하기 위해 며칠 휴가를 낸 것만 같았다.


출근할 때는 아침마다 일어나지도 않는 시간에 소리뿐인 알람을 맞춰놨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 새로운 아침을 열고 싶은 마음에 일어나야 하는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알람을 맞추곤 했는데 정작 그 시간 기쁨을 얻는 이유는 창의적인 아침을 준비했기 때문이 아니라 1시간 더 자도 된다는 걸 가수면 상태에서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나는 휴가 때도 딱히 알람을 변경하지 않았다. 설정을 바꾸는 게 귀찮기도 했고 한 시간 더 자도 된다는 작은 여유가 자면서도 배시시 웃게 되는 이유가 되었고 휴가 때는 대놓고 본격적으로 자도 된다는 더 큰 행복을 확인하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휴직 때도 한동안은 그 변태스러운 행복을 누렸다. 그러다 휴직이 익숙해지는 어느 날, 휴직이 주는 기쁨보다 자다 깨는 짜증스러움이 더 커진 날 알람을 조용히 해제했다. 물론 해제하는 날은 평소보다 좀 더 큰 자유로움을 느끼긴 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자,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하루 이틀의 휴가는 그렇게 아쉽고 세상 행복하더니 일상이 반복되자 소확행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휴직의 시간이 즐겁지 않아 졌다.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없다는 것, 인간관계의 고단함이 없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천국이었지만 굳이 그때를 비교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우선 문제였고 스트레스의 반대급부로 주어진 월급도 사라졌다는 게 어쩌면 가장 큰 이유였을까? 그리고 한 가지 사라진 게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동기부여였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누군가와의 경쟁 때문에, 또는 나의 사회적 위치를 위해서, 나의 성취감을 위해서, 작은 칭찬을 위해서라도 동기부여가 확실히 됐는데 집에 있을 때는 일할 때 받았던 스트레스가 없어지듯 보상도 사라졌다. 잰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며 이것저것 하는 일은 많은데 도무지 신바람 나지 가 않았다.


마음 맞는 사람과 나와 맞지 않는 누군가의 험담도 살살하고 업무 얘기 일지라도 우리만의 핫이슈를 정리하며 정보공유를 하고 점심시간이 짧기에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 이동시간을 고려해 맛집을 선정하는 그런 소소한 즐거움이 모두 사라져서 허전했다.

나는 가끔 느긋하게 엄마들이 가는 여유 넘치는 브런치를 먹을 수 있으며 아이들 등원 후 혼자 커피타임을 가질 수 있어 일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나는 나를 부러워하는 다수에 속하지 않음에 반대로 소외감을 느꼈다. 뭐든지 다수에 속할 때 안정감을 느끼고 나만의 행보에 불안감을 느끼는 나는 그냥 희미한 보통사람이었기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직장에서는 요즘 무슨 일이 있지? 내가 없는 그곳에서는 나의 빈자리를 느낄까? 나의 후임은 잘하고 있나? 이번 달에는 이런 업무가 있는데 잘 처리될까? 나는 집에서도 일하는 것처럼 마음이 직장에 있었다.


내가 이렇게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휴직을 괜히 했다는 생각을 한동안 떨치기 힘들었다. 이렇게 업무 만족도가 높았다면 더 버티면서 성과를 낼 걸, 아이도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내가 그냥 감정적으로 결정한 게 아닐까? 거짓말이 아니라 두 달 간은 계속 이런 생각의 반복이었다. 나를 찾는 전화가 오면 반갑고 업무 문의 전화가 오면 더 신났다. 내가 정리한 업무 매뉴얼을 보물단지처럼 간직하고 들춰보기도 했고 그 짧은 시간 잊어버릴까 봐 시간 날 때마다 떠올려 보기까지 했다.


나라는 사람은 내가 맡았던 업무에 기반했던 것이었다. 그곳에 있었던 내가 꽤 만족스러웠고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았기에 업무와 나를 분리시키고 싶지 않았다.

왜 분리해야 돼? 나는 다시 돌아갈 건데. 나는 그런 나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놓지 못한 시간이었다.


사실 휴직 초반, 직장동료들과 종종 만남을 가지며 느낀 공통된 감정이 있었는데 반갑고 즐거웠지만 무언가 확실하지 않은 부정적 감정이었다.

업무가 끝난 후 저녁 약속을 하면 나는 아이를 친정에 부탁하고 집에서 출발했기에 곱게 새로 화장을 하고 뽀송한 상태로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던 반면 직장동료들은 피곤에 절어 화장도 고치지 못한 채 약속시간이 지나 녹초가 되어 나타났다. 모두 나에게 얼굴 좋아 보인다며 부러움을 표했지만 나는 그들의 동지의식이랄까, 전투애랄까 그것이 부러웠다. 무척 피곤해 보여 안쓰러운 동시에 이제 내가 저 무리가 아니구나 라는 소외감이 어김없이 드는 것이었다. 그런 감정이 들 때마다 나 스스로도 어이없어하면서도 성급하게 휴직을 했나? 후회하거나 그저 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며 감정을 뭉개고 지나갔다.


휴직 10개월이 지난 지금 그 시간을 떠올려보니 열심히 일 한 나를 일과 분리시키면 핵심이 없는, 멋지지 않은, 희미하고 소심한 내가 남는다는 생각에 두려웠던 것 같다.

평가도 없고 보상도 없고 경쟁자도 없는 밋밋한 가정에서 나는 무엇에 열심을 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혼 초반 새댁 놀이에 심취했을 땐 집안 인테리어, 메뉴 개발 등 아주 소소한 것 하나하나 사진 찍고 기록하는 것에 나의 에너지를 많이 쏟았지만 결혼 10년 차 나름의 각자의 루틴과 노하우가 생긴 지금 새삼스레 집안일에 열심을 내고 싶진 않았다.


분명 휴직을 할 땐 아이의 성장과 나의 성장을 위해 몸과 마음의 밭을 가꾸는 시간을 보낼 거라고 발표까지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당황스러웠다.

일하는 내가 이렇게나 나의 중요한 정체성이었다니.

한동안 이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뭐든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일하느라 매여 있었던 시간이 자유롭게 주어지면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만했는데 나에게서 일을 분리시키는 데에만 꽤 많은 시간을 쏟았던 것이다.


피식, 한번 웃고 지나갈만한 깨달음인데 집중하지 않으니 알 수 없었다. 인정하지 않으면 몰랐을 나의 모습이구나. 소심하긴 해도 꽤 단단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어느 한 모습에 단단하게 나를 연결시켜 지냈었던 것뿐이구나. 더 깊게 연결되어 정말 어느 것이 나인지 모르기 전에 멈춰 바라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어느 순간 일에 멈춰지는 순간이 있을 텐데, 예전처럼 빠릿빠릿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 도 있고 절대적인 업무량이 줄어드는 순간 또한 있을 텐데 ‘나’라는 사람의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 업무와 ‘나’를 분리시키는 작업을 할 수 있어 정말 감사했다.


나는 나의 휴직 일상을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다. 특별하려야 특별할 수 없는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어느 날은 택배 정리에 대해서, 어느 날은 청소 루틴에 대해서 그런 작고 시시한 것들에 대해서 자세히 써봤다. 그것이 모여 대단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의 하루를 기억하고 싶었다. 나의 하루를 활자로 옮겼을 때 남겨지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흩어지는 날들이 아니라 기억된 하루가 나를 기억하게 하는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나는 소소한 날들이 모여 눈부신 날을 이뤄내는 것에 도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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