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아한밍블 Nov 19. 2021

느슨해지고 싶을때.

그저 웃기만 해도 편안해지는 시간

“왜 술을 먹어도 안 취하는 거야~”

“쟤만 먹여. 취할 때까지 주자.”     

술 한잔 마시면 빨갛게 달아올라 수줍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할 것 같았던 나는 술을 마실수록 하얀 얼굴이 되는 사람이었다. 알딸딸하게 적당히 기분 좋은 게 뭔지, 취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필름이 끊기는 것은 또 무엇인지 절대로 상상해볼 수가 없었던 말짱하기만 했던 그날은 생애 첫 술자리였다. 술을 마시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는가 싶었는데 쓰기만 했고 함께 한 사람들은 나를 취하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처음 만난 술은 내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술 한잔 해야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술이 좋은 게 아니라 그 자리가 좋은 거지, 라는 말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술의 기운을 빌려야지만 솔직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사이가 정말 친한 사이인가 의심이 됐고 술이 좋은 게 아니라면 그냥 커피 마시며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비겁한 말로 여겨졌었다. 과거형으로 얘기하고 있으니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냐고? 후후. 그때의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처연함을, 외로움을 알게 됐다고 할까? 술자리에서라면 어지간히 멀쩡한 정신으로는 꺼내놓기 힘든 일들도 으레 모두 잊어버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속절없이 풀어놓곤 했다. 이미 그럴 작정을 하고 나가는지도 모른다. 술을 핑계 삼아 위로의 마음을 서로의 술잔에 채우는 행위. 술을 마신다고 고민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외로움을 안다 여기는 것이 좋았고 취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벌써 헤롱헤롱 해지는 느슨함이 좋았다. 커피 한 잔에는 ‘잘 지내고 있는’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단정함이 답답해질 때, 술이 생각났다. 그제야 알았다. 이전의 나는 술이 셌던 게 아니라 경계하고 긴장하느라 들어오는 알코올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혀에 닿는 순간부터 ‘이것이 술이구나. 너는 나를 지배할 수 없어!’라며 침샘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기를 쓰고 분해시켰던 것을. 나는 늘 모든 것을 통제하길 원했던 사람이니까.

    

그런 내가 처음으로 무너졌던 술자리는 복직 후 첫 직장 회식이었다. 새로운 업무와 낯선 환경에 많이 긴장했고 나의 무능함을 처음 느꼈던 한 달이었지만, 회식자리에서도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하고 있었다. 계속 긴장 상태였고 바짝 정신을 차렸었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헤어지는 순간 난데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게 좋았던 것은 아닌데, 너무 창피했는데 그 이후로 나는 술자리에서 조금 취했고 빈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정하고 꼼꼼한 나보다 빈틈 있는 나를 더 좋아했다.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쉽게 보는 건가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냥 허술한 사람이었고 아무렇게나 하고 싶을 때가 자주 있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오래도록 한결같이 똑같은 나로 살았다. '한결같음'은 나의 장점이었지만 나 스스로는 내가 지겨웠다. 나는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예상되는 내일이 재미없었다. 배우는 될 수 없더라도 다양한 삶을 누리고 싶은데 당최 무엇을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느슨해져서 무엇이 좋은지는 모르지만, 그저 조금 달라진 내가 좋았다. 늘 앞뒤 이유가 있던 내가 이유 없이 실실거릴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내 인생에 몇 시간쯤은 마구 흐트러져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조차도 잘되지 않음이 안타깝다. 너무 오랜 시간 꽉 막힌 사람으로 산 덕에 가까운 술친구가 없었고 주변은 다 비슷한 사람이 모였는데 이제 와서 술친구를 찾는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30년 넘게 정돈되어 있는 각 잡힌 나를 풀어줄 수 없어서, 특별히 힘든 일이 없어도 인생 어쩌고 헛소리를 나불거리고 싶어서 결국 비겁하다 여겼던 바로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아. 이렇게 용기 없는 사람이 된 것인가, 술이 없으면 내 마음 한편 풀어주지 못하는 사람이라니 조금 센티해지지만 나처럼 몇십 년을 단정하게 살아온 이들이 분명 어디선가 술을 통해 실실거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웃음이 난다. 다른 사람 해치지 않아요. 그냥 실실거릴 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판타지 같은 이야기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