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연필을 아이와 함께 읽고
우리 집, 우리 학교, 가족 소개하기, 선생님께 편지 쓰기. 모두 어른들이 좋아하는 주제다. 어차피 솔직하게 다 쓸 수 없다는 걸 어른들도 알 텐데, 왜 그런 걸 쓰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어른들은 불안한가 보다. 자신들이 좋은 부모인지, 좋은 선생님인지 끊임없이 확인받으려는 것 같다. 《빨강연필》p80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이 깊은 소망이의 일기는 보는 재미가 있었다. 초등 저학년의 삶이란 별 게 없어서 때론 말 그대로 글짓기가 된 일기였지만 그래서 신선했다. 어른이 된 나의 생각은 상상력도 호기심도 없는 고루한 이야기들 뿐이었으니까. 물론 딸 입장에서는 자신만의 기록이 아니라 사실상 독자가 있는 글이었으니(부모와 선생님) 그저 형식적인 숙제였고 점차 일기 쓰기를 싫어했다.
아이의 일기를 통해 마음을 짐작하곤 했는데 우려했던대로 소망이는 더이상 일기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딱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쓰던 사랑이는 특별한 불만이 없었는데 소망이는 그렇지 않았나보다. 학교에서 숙제로 내주지 않는 한 내가 강요할 이유는 없었으니 스트레스가 된다면 쓰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다만 네가 어디든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일기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엄마도 선생님도 보지 않는 공간에 마음을 털어놓으면, 글을 쓰는 것만으로 후련해지는 참 묘한 힘이 있다고 말이다.
빨강연필은 무슨 글이든 술술 환상적으로 써내는 마법의 ‘빨강 연필’을 가지게 된 민호가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고민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민의 이유는 ‘빨강 연필’이 쓰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님에도 선생님과 친구들의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는 것만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글로써 자신의 결핍과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마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 재밌냐고 소망이에게 물었더니 재밌다며 엄마가 좋아하는 얘기라고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얘기? 그게 뭔데? 물으니 거짓말하면 안 된다, 뭐 그런 이야기 말이야. 한다.
누구나 거짓말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상상하던 것을 거침없이 말함으로써 묘한 쾌감을 느끼고 아무렴 어때? 하는 잠깐의 생각이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가벼운 거짓말은 모른 척 해야지 하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자주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안 되는 일이 없는데 거짓말을 하면 쉽게 용서하기 어렵다는 말을 했다. 자주 말했으니 엄마는 그런 메시지를 좋아한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게.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자주 말했을까?
아이들이 내게 벽을 쌓는 게 두려워 그랬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사실은 별로인 내 모습에 실망한 아이들이 멀어지면 어쩌나 늘 걱정이 되었던 거다. 불안하니까 비밀이 없기를 강요했다. 불안하니까 쓰라 했다. 너의 마음을 알고 싶어, 솔직하게 말해줘.라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일부러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주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하지 숨길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운 유아 시절의 거짓말은 슬쩍 넘어갈 수 있고, 가끔 숨기고 싶은 이야기는 모른 척하는 게 서로를 위한 배려이니 믿고 기다려주면 될 텐데 쉽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책상 위 빈 종이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마음껏 달리고, 마음껏 소리 지르고, 마음껏 울 수 있는 크고 넓은 나만의 공간, 그곳은 비밀 일기장과 다를 바 없는, 오직 자신만이 채울 수 있는, 온전히 자신을 위해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p178
빨강 연필에 의지해 거짓 이야기를 쓰던 민호가 어떤 도움 없이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쓰기로 한다. 네 이야기를 끝까지 천천히 듣겠다는 선생님이 나타나자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비밀이어야 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꾸밈없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줄 사람이면 됐다. 나는 어땠나? 거짓말 하면 안된다는 말 말고 아이를 향해 가슴과 귀를 열고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너 참 용기있구나. 천천히 말해도 돼. 너의 이야기를 막지 않을게. 끝까지 다 들을게. 라는 말을 해준 적이 있나? 그런 마음을 먹어본 적이 있나?
늘 자기가 예쁘다고 말하던 소망이가 어느 날 밤, 외모에 대해 자신감 없는 이야기를 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얼마나 예쁜데. 라고 말하는 날이 많았지만, 그날만큼은 아이의 말을 가만 듣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때가 왜 없겠는가. 정말 못생겨서가 아니라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니까. 그렇구나. 그럴 때가 있어. 라고 말했는데....음...무슨 소리야! 네가 얼마나 예쁜데! 라는 말로 아이의 기분을 바꿔줬어야 했나? 싶은 마음이 든다. 잘못한 것 같다.
비밀이지만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아무도 몰랐으면 하지만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도 있다. 죽고 싶을 때도 떡볶이가 먹고 싶고,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는 싫은 마음은 어쩌면 다 나 좀 알아봐 달라는 말 아닐까?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이상한 마음에는 글쓰기만 한 도구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아이가 스스로 쓰지 못한다면, 충조평판 없이 가끔 아이만의 대나무숲이 되어주기.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욕심내 해내고 싶은 역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