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열리는 Arizona State Fair, 세상 신난 아이들과 자세히 보면 아이들보다 더 깡충거리는 어른들이 있는 곳에 올해는 콘서트를 보러 왔다. 한국이었다면 한눈팔다 지나가는 사람이 들고 있는 닭꼬치와 토네이도 감자꼬치에 옆구리라도 찔릴라 겁났을 테지만, 여기는그것들 대신굵은소금 뿌려진 프레첼과 조각 피자, 그리고 바비큐 샌드위치 같은 덜 예리한 길거리 음식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저릿해지는 탈것들이 비명소리를 가득 싣고 허공을 가르고 있다.
지갑을 거침없이 꺼내는 인파를 헤치고, 길 위에 흩뿌려진 비눗방울들을 헤치고, 달짝지근한 온갖 당류들의 유혹을 헤치고, 축제 현장 깊숙이 자리 잡은 콘서트장에 도착한다. 1990년대까지 NBA 농구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곳이라니 역사와 전통이 가득하여 매우 유물스러운 곳이다.
오늘 공연하는 밴드의 이름은 'The All-American Rejects', 아니... 모든 미국인들이 거부하는 밴드라니.
며칠 전 스치며 지나간 인스타그램 포스팅에서 자기가 지금 입고 있는 옷 색깔과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을 이어 붙이면 신박한 인디밴드 이름을 만들 수 있다고 했었다. 내가 지금 밴드를 만든다면 '핑크라테'. 제법 맘에 든다. 그렇다면 이 밴드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리드싱어 'Tyson Ritter'가 밴드를 형성할 당시 나이가 17세라니, 바로 이해가 된다.
'주변인'의 시기, 모든 미국인이 거절하는 것 같은 나의 정체성, 혹은 모든 미국인에게 거절당하고 싶은 정체성, 그런 삐딱한 정체성... 지금 나에겐 매우 그리운 그 정체성. 매우 이상하지만 그때만큼은 이해받았던 정체성. 지금은 몰래 가지고 있는 그 정체성.
나도 고등학교 때에 밴드를 만들었었다. 말이 밴드이지, 기타 한번, 드럼 한번 쳐본 적도 아니 실제로 본 적도 없는 4명이 스스로를 밴드라고 불렀다. 그땐 걸그룹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그땐 앞서 언급한 신박한 작명법을 몰랐기에 '핑크 라테'는 아니었고 'Without Name Band_aka. WNB'라고 이름을 붙였다. 무척 튀고 싶지만, 또 무척 묻혀있고 싶기도 했던 양가의 마음을 반영한 이름이었다. 바라보는 부모님도 선생님도 복장 터지게 만들었던 우리들 나이 17세, 점심시간이면 후다닥 점심을 먹고, 교실 뒤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불렀던 곡들 중 하나의 제목은 개사곡 '눈썹 뽑지 말아요 (원곡:이지연의 '나를 잊지 말아요')였다. 쉬는 시간이면 족집게를 들고 눈썹을 뽑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송충이 같은 눈썹, 그 자체로 예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또 한곡의 제목은. '수학천재, OOO'. 수학이 너무 어려운 문과 여학생 4명이, 만년 수학 100점, 옆 반 남학생을 향한 경외심을 담은 노래였다. 교실 뒤편 사물 앞 작은 공간이 무대였던 우리에게 무대가 조금씩 늘어나니 시작했다. 쉬는 시간이면 이 반 저 반에 초청받아 공연을 다니기에 이른다. 무려 선생님들이 학교방송을 통해 우리를 찾기 시작했다.
WNB, 5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3학년 4반으로 와 주세요.
건전한 일탈이었다. 달보고 등교하고 달보고 하교하는 일상의 작은 일탈.
귀밑 3센티 단정한 단발머리를 하고 종아리까지 뒤덮는 교복치마를 한복인 양 타령까지 하고 다녔던 그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보는 사람은 전혀 영문을 모를 귀밑까지 미소가 걸린다. 그래 살면 큰일 난다 했었던 어른들, 그래 살아도 큰일 나지 않았고 잘 살고 있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당시 장거리 연애 중이었던 Tyson Ritter 본인과 또한 장거리 연애 중이었던 그의 친구의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쓴 곡이라고 하는데,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장거리 연인 사이, '서로 안보는 동안 좀 어기고 비밀로 하면 되지 않아?' 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담은 곡이다. 독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남이 보는 듯 행동하라는 말, '신독'을 도덕시간에 들은 이후, 그렇게 살자고 무척 노력해 왔기에.. Dirty Little Secret을 품고, 두 다리 뻗고 자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마흔이 된 리드싱어는 여전히 십 대인 듯 공연 내내 발바닥에 스프링을 단 듯이 펄쩍펄쩍 뛰며 머리와 어깨 무거운 어른이 된 팬들에게일탈을 선물한다. 내 앞에 일어서서 열광하는 중년의 아줌마에겐 더욱 그럴 것이다. 쿨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나에게 그러하듯.
여기서 만나는 역사 깊은 인디밴드들의 노래는 나의 정서와 사뭇 다르고, 맞닿기 어려운 면들이 있어 아쉽지만, 이런 에너지를 가까이서 느끼고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