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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e Sep 20. 2022

5.교황도 두려워한 카를 5세를 떨게 한건? (1)

-인생 참 엉망진창 막창이구나!-

카를 51500-1558(합스부르크가 출신의 스페인왕, 신성로마제국황제)

의자에 앉은 카를 5세 1548년, 티치아노

카를 5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인생은 실패하기가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지역을 뺀 대부분의 서유럽 영토가 그의 통치권 아래 있었습니다. 부동산 부자들이 겪을 수 있는 현금 부족은 따위는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1540년대가 되자 광산이 발견되면서 은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망나니 황제 리스크도 없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었으며, 에라스무스에게 지도를 받은 만큼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지적인 남자였죠. 부인에게는 성실한 남편이었고요. 부인이 죽고 난 다음에는 위의 그림처럼 상복을 입고 수절하며 살았습니다. (16세기 전 유럽에 블랙패션이 유행할 정도였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답게 긴 턱의 소유자였으니 인물은 출중하다가 할 수는 없었지만, 뭐 그렇다고 추남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이 정도면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아야 스토리가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땅 많아, 돈 많아 거기다 성실해 예쁜 부인이랑 알콩달콩 사이도 좋아. 하지만 카를 5세의 인생도 우리네 인생처럼 사는 것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실패가 눈에 보이는 길로만 걸어가는 외로운 방랑객이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카를 5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였습니다. 대항해 시대가 열렸고, 중개무역이 꽃은 피우면서 곳곳에서 도시가 번성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돈의 맛을 알아가고 있었죠. 화가인 티치아노까지 돈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세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카를 5세를 아직도 중세의 왕들처럼 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거죠. 중세 왕들의 땅처럼 영양가 없는 것도 없습니다.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은 넓은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 봉건제를 시행합니다. 이 봉건제라는 것이 무엇이냐? 왕이 영주에게 땅을 나누어줍니다. ‘그 땅 안에서는 네가 왕 먹고 거기서 나오는 세금도 다 네 거 해. 대신에 내가 다른 나라랑 전쟁하면 꼭 나와서 싸워야 해.’이란 계약을 한 것입니다. (쌍무적계약관계) 지금 우리에 시선으로 봤을 때는 건물주가 건물관리인에게 등기도 넘겨주고 월세도 주고, 동네에 들어오는 깡패만 함께 막자 이런 개념입니다. 물론 왕이 직영으로 운영하는 영지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 나오는 세금은 왕이 차지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제도도 처음 생겼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땅 대부분을 정복했던 프랑크의 샤를마뉴 대제가 죽자 사방에서 이민족들이 이때다 하고 곳곳에서 침입하기 시작했죠. 지방 곳곳에 관료를 보내서 다스릴 제도적인 장치가 되어있지 않았으니 당장 그 동네의 힘짱을 말하자면 기사들을 영주로 삼아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살면서, 이민족이 쳐들어올 땐 동네마다 각개전투를 해서 살아남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되는 것이었죠. (침입자들은 잔인하기가 짝이 없어서 자영농들도 무서워서 스스로 농노가 되어 성안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나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프랑크 제국은 샤를마뉴 대제가 죽으면서 세 아들에게 나누어서 상속되고 그 이후로는 다시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16세기 최고의 자산가 푸거에게 빌린 돈으로 선거를 치르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카를 5세의 꿈은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다시 통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세습제가 아니라 선출제로 허울뿐인 이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어머니는 스페인의 후아나 공주였던 덕분에 넓은 영토를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단점은 영토가 뚝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중간에는 젊고 영민한 군주들이 다스리는 영국과 프랑스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죠. 당시 영국의 왕은 헨리 8세였고, 프랑스의 왕은 프랑수아 1세이었습니다. 통일이 뭡니까? 물려받은 영토를 지키기만 해도 다행인 상황이었죠. 게다가 이 두 명의 젊은 왕들은 카를 5세가 가지지 못한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자들과의 막장 스캔들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는 이미 어느 정도 중앙집권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중앙집권 국가란 무엇이냐? 왕이 지방에 관료를 보내 다스리고 상비군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토에서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허울뿐인 황제였던 카를 5세보다 오히려 더 알짜였던 거죠. 영국의 헨리 8세는 종교개혁으로 국교회를 설립해 교회의 재산을 몰수한 덕분에 부유해졌습니다. 섬나라여서 다른 나라의 침입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것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죠.

이름도 유명한 마틴 루터께서 한때 카를 5세의 스승인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큰 감동을 받으시고 95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성자교회 앞에다 떡 붙이면서 수백 년간 갈등의 서막을 알립니다. 빠빰빠빰!!!! 시작은 가톨릭의 부패함을 비난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어느 순간 신·구교가 분리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할 만큼 판이 커집니다. 결국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하나님만 있으면 되지 뭔 교황이야~!!, 난 이제 교황 따윈 안 따르려오.’ 이렇게 루터가 주장하면서 결국 루터는 파문을 당하게 됩니다. 카를 5세가 보름스 청문회로 신변 보호까지 해주면서 그를 부릅니다. 이 청문회를 통해서 루터를 달래볼 심산이었지만, 루터가 말을 듣지 않자 보름스에 있는 3주 동안만 신변을 보호해 주고 그 이후에는 법에서 추방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후로는 누가 그를 죽여도 법적 처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거였죠.

이 사건을 계기로 평생을 황금의자에서 호의호식만 할 것 같았던 카를 5세의 인생을 거의 한편의 로드 뮤비에 가까웠습니다. 영토분쟁으로 전쟁을 하다가 뒤돌아서 종교분쟁으로 또 전쟁하는 호러에 가까운 로드 뮤비였죠. 중간중간 본인의 영토를 가서 충성심 따위는 별로 없는 영주들과 국민을 살포시 겁주며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야 했으니 말 그대로 길 위의 인생이었습니다.


카를 5세의 기마상 1548년, 티치아노


카를 5세가 1547년 4월 24일 뮐베르크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티치아노가 그린 그림입니다.

 1548년 잠깐 카를 5세는 젊은 시절의 꿈이 이루어지는 듯도 했습니다. 뭘베르크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신·구교 문제를 정리할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가톨릭을 수호하겠다는 그의 명분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습니다. 카를 5세의 서유럽 제패의 꿈은 누구나 알고 있었죠. 신교세력을 박살내겠다고 시작한 뮐베르트 전쟁은 루터의 가장 큰 후원자인 작센의 프리드리히 1세를 결딴냈지만, 그 자리에는 신교도인 모리츠에게 돌아갔습니다. 카를 5세가 종교 따위는 상관 안 하고 자신에게 득이 되는 신교도 모리츠를 전쟁 중에 가담시켰고, 전쟁 중에는 일단 종교고 뭐고 같이 싸웠지만, 전쟁이 끝나자 승리한 구교도 편에 엉뚱하게도 신교세력이 있었던 거죠. 게다가 교황은 카를 5세의 이탈리아 내에서의 영향권이 커질 것을 걱정해서 종교통합에서 한 발을 빼버렸습니다. 전쟁만 승리하면 모든 것이 해결 날 줄 알았던 카를 5세는 이건 뭐 뫼비우스의 띠도 아니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요? 너무 힘 빠지는 일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이쯤 되면 아무리 바보라도 카를 5세도 돌아가는 판을 이해했겠죠. 제후들과 교황을 언제나 종교보다는 이해득실이 먼저였다는 것을요. 자신들의 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카를 5세에 호락호락 넘어갈 인간들이 아니었죠.

1552년에는 카를 5세를 뒷목 잡고 쓰러트릴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신교도인 모리츠를 울며 겨자 먹기로 작센의 제후로 앉혀 주었더니 이제는 프랑스의 앙리 2세와 편을 먹고 반합스부크 동맹을 결성해서 카를 5세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녀석들은 겉으로는 가톨릭을 표방하면서 필요하면 이슬람인 오스만제국과 손을 잡고, 이익이 된다 싶으면 신교도와도 연합하는 카를 5세로서는 박쥐같은 놈들이었습니다. 모리츠의 공세에 밀려서 카를 5세는 인스부르크에 필라흐에 몸을 숨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552년 결국 카를 5세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황제 자리를 넘깁니다. 페르디난트 1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신교들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줍니다. 교황도 이 사태를 살포시 눈감아 버립니다. 카를 5세로서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지만, 이미 패는 넘어간 후였습니다. 카를 5세 혼자만 이 상황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죠. 결국, 카를 5세는 제국통일의 꿈도 던져버리기로 합니다.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과 해외식민지를 양위하고 스페인의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불쌍한 카를 5세의 인생은 곳곳에 적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그는 침략자이니까요. 종교통합의 과업을 달성하게 해달라고 신께 매달렸지만, 결국 그 길에 끝에는 서유럽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야욕이 숨겨져 있었으니까요. 필요에 따라서 신교와의 협력도 주저하지 않았으니 그가 믿는 하나님도 애매하셨겠죠.

죽기 몇 주 전에 카를 5세는 본인의 장례미사를 엽니다. 예비 장례식이라고나 할까요? 카를 5세와 시종들도 모두 상복을 입고 참석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본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카를 5세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카를 5세가 진정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죽기 전 몇 년 동안은 수도원에서 편안히 벽시계 추나 맞추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셨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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