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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e Sep 22. 2022

5. 교황도 무서워한 카를 5세를 떨게 한건? (2)

-그 많던 '은'은 다 어디로 갔을까?-

독잉 용병이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조롱하기 위해 가짜 교황을 태운채 행군하는 모습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오는 그 많은 금, 은으로도 1527년 전쟁자금이 부족했던 카를 5세는 의도하지 않게 교황을 벌벌 떨게 만듭니다. 종교개혁 와중에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체 했지만, 카를 5세는 교황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교황은 사제이면서 동시에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호시탐탐 이탈리아의 땅을 노리는 카를 5세가 교황에게는 내 땅을 노리는 침략자일 뿐이었죠. 결국, 이 둘 사이에 일이 터지고 맙니다. 교황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손을 잡고 코냑 동맹을 결성하자, 카를 5세가 교황을 혼내주려고 로마를 침공합니다. 카를 5세의 병사들은 대부분 루터교 용병으로 이루어진 신교도였습니다. 임금 지급이 미뤄지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죠. (카를 5세 본인은 구교이면서 루터파 신교를 용병으로 쓴 것도 황당합니다) 이 판에 지휘관인 부르봉 공작이 벤베누토 첼리니에 (피렌체 출신 조각가로 나중에 프랑수아 1세의 초대로 프랑스에서도 활동함) 쏜 총에 전사하자 부대는 통제 불능 상태로 빠져버렸습니다.

결국, 용병들이 로마를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보물을 훔치고 성직자를 죽이고 수녀들을 겁탈하는 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겁에 질린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베드로 성당에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 산타젤로 성으로 피신을 했죠. 그를 끝까지 지켜준 건 스위스 용병들이었습니다. 결국, 교황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40만 두커트라는 배상금을 내겠다고 약속을 한 다음에 풀려났습니다. 카를 5세는 로마의 약탈(사코 디 로마)이 유감이라고는 했지만, 교황에게 사과하는 일 따위는 없었죠. 이 덕분에 교황과의 권력의 균형은 완벽하게 카를 5세에게 기울었습니다. 이제 교황은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카를 5세도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본가의 탄생의 주인공 푸거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방의 영주에서 유럽을 쥐고 흔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까지 차지한 것은 혼테크 덕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름 로맨틱합니다. 동화 라푼젤의 모티브가 됐던 이야기이기도 하죠. 프랑스 왕가의 방계로 공국이었던 부르고뉴는 왕국으로 승격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리의 아버지 샤를이 죽자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마리와 자신의 아들 샤를을 결혼시켜 부르고뉴를 홀딱 먹어버리려고 합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녀를 헨트 지역에 감금했죠. 그녀는 자신을 구해 달라고 막시밀리안 1세 왕자님께 SOS를 칩니다. “자기야 날 좀 구하러 와줘요!” 근데 중요한 것은 왕자님은 공주를 구하러 갈 돈이 없었습니다. 이때 나타난 것은 마법사가 아니라 푸거였습니다. “왕자님 제가 급전을 당겨 드리겠습니다.” 왕자님은 푸거론을 받아 그녀를 구하고 결혼도 해서, 둘을 알콩달콩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님은 막시밀리안 1세가 되시고 난 다음에도 급전이 필요하실 때마다 푸거론을 이용하셨습니다. 이 로맨틱 부부의 아들 필리프는 기특하게도 스페인의 상속녀인 후아나와 결혼합니다. 이 결혼은 통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대륙까지 덤으로 얻게 됩니다. 이 두 분이 바로 카를 5세의 부모님 되십니다. 다른 자식들도 혼테크에 성공해서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도 얻게 됩니다. 결혼 자금은 이때도 푸거론을 이용했죠. 카를 5세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 나가게 되고 위에서 말씀드린 데로 대를 이어 푸거에게 돈을 빌립니다. 푸거는 카를 5세가 이 돈을 갚지 않자 독촉장을 날립니다. 최고의 권력자면 뭐합니까! 돈 없으면 빚쟁이지요.      

푸거가 돈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부자는 망해도 삼년 간다는 속담을 실천하시는 집안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다 아는 메디치가입니다. 하지만, 위대한자 로렌초는 사업은 망해 먹었지만, 뇌물로 정치, 종교계에 자리를 얻는 것에는 탁월했습니다. 손자 로렌초 2세는 피렌체의 군주와 우르비노의 공작이 됩니다. 아들은 교황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가 바로 레오 10세죠.

푸거와 메디치의 환상적인 만남은 전 유럽을 환장하게 만든 바로 그 일을 만들어냅니다. 레오 10가 뒤를 봐준 알브레히트는 마인츠 대주교가 되기 위해 뇌물을 뿌릴 자금을 마련하고자 푸거에게 돈을 빌립니다. 메디치가의 자손답게 교황이 돼서도 예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또 푸거에게 돈을 빌렸죠. 둘 다 푸거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면죄부를 팝니다. (죄를 많이 지어도 이 면죄부를 사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기적의 논리였죠!) 이런 짓거리를 하는 교회를 이제는 참아줄 수 없다며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고 전 유럽이 난리 통이 됐던 거죠.     

푸거의 돈 때문에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 카를 5세가 푸거의 돈을 빌려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웃기는 역사인거죠.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도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은으로도 부족할 때면 푸거에게 종종 돈을 빌렸고 전쟁 자금을 못 갚자 파산 선고를 4번 했죠. 당근 푸거의 후손들도 돈을 떼이게 됩니다. 왕과 교황들에게 빌려준 돈을 담보로 이권을 얻어 광산사업, 중개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지만 결국 왕들에게 빌려 준 돈을 계속 받지 못하게 되면서 푸거 가문은 파산하게 됩니다. 당시 왕들은 돈이 없으면 파산을 하고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푸거가 아니라 푸어(poor)가 된거죠. (실은 아직도 푸거가문은 유럽에서 행세 꽤 하는 집안입니다. 역시 부자는 망해도 3대 간다더니~~!!!)     

푸거 가문은 단순히 왕들에게 돈만 빌려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본가의 돈이 만드는 역사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정말 welcome to 돈(money)세상! 돈(crazy)세상? 입니다. 환영합니다. 여러분!!!   


-그 많던 은 다 어디로 갔을까?-     

카를 5세의 영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원조는 영국이 아니고 바로 카를 5세 입니다. 서유럽의 수많은 영토와 신대륙을 차지했던 왕이니까요!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스페인의 덕이 참 크다고 할 수 있죠. 처음 이사벨라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돈을 대준 이유도 인도, 중국으로 가는 직항로를 찾아 향료, 비단, 도자기 등의 중개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인도가 아니고 엉뚱하게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버렸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아메리카 대륙에는 기대했던 향료는 없었지만, 중독성 강한 담배와 카카오가 있었죠. 하지만, 진짜 중독성 있는 건 따로 있었습니다. 지금의 볼리비아와 멕시코에서 발견된 은이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돈의 맛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 돈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상거래를 통해서 얻었던 돈과는 다른 돈이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머리나 몸을 쓸 필요가 없었죠. 말하자면, 불로소득입니다. 잘살고 있는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려먹고 그들이 조상 대대로 사는 땅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한마디로 깡패가 남에 동네에 들어가서 땅 뺏고, 돈 뺏고, 동네 사람 부려먹고 땅 파서 보물까지 알뜰히 챙겨가는 판이었죠. 이렇게 생긴 돈이 건설적인데 쓰일 리가 만무하죠. 보통 이런 돈은 사치와 향락 그리고 쌈질하는 데 쓰이지 않나요? 역사라는 포장지에 잘 싸여 있지만, 스페인의 은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1540년대 그 많은 은을 손에 넣고도 카를 5세는 자금 부족에 시달렸는데요. 은광에서 은을 캐는 속도보다 전쟁자금으로 써버리는 은의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이지요. 최강 해군을 자랑했던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도 전쟁자금 때문에 수차례 파산선고를 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티치아노에게 그림값을 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티치아노가 죽는소리로 애걸복걸해서 받아냈지만요) 돈은 쓰기 나름이란 말이 딱 맞습니다. 넘치게 유입되는 은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다니요!     

이전에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의 은은 스페인인들의 일상생활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스페인에서 통용되던 은화에 몇 배나 되는 은화가 쏟아져 들어왔죠. 요즘 말로 양적 완화랑 같은 원리입니다. 시장에 돈이 갑자기 늘어나니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실물을 가치는 올라갔습니다. 무슨 말이냐? 땅과 상품 가격이 상승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페인에서는 은화 빼고 다 비싸다.’라고 할 정도였다네요. 땅이 많았던 사람들은 땅값이 올라 더욱더 부자가 됐지만, 가난한 사람들 노동을 해서는 내 집 마련은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세상이 된 거죠. 한마디로 부자만 살판난 세상이 된 것입니다. 노동의 가치, 사람의 가치는 점점 떨어집니다. 이러니, 마치 우리네 조선 시대처럼 노동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겨납니다.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다니 딱 봐도 망조 아닙니까? 게다가 스페인의 주요 생산품인 양모의 가격이 폭등해서 가공무역이 발달한 플랑드르 지방은 이제 아일랜드에서 양모를 수입하기 시작합니다. 산업 전반이 전멸하기 시작한 것이죠. 가난한 사람은 그나마 일할 수 있는 일터마저 잃어버렸죠. 16세기 스페인은 계속되는 흉작과 식료품 가격의 급등으로 빵조차도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함과는 달리 부자들은 쉽게 벌어들인 돈으로 이제 고가의 사치품을 수입했죠. 그 많던 스페인의 은은 대부분 전쟁자금이 되어서 용병들의 임금으로 외국으로 나가고, 사치품과 생필품의 수입으로 또 한 번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덕분에 스페인의 은은 전 유럽 넘어 비단과 도자기의 주요 수출국이었던 중국으로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전에는 베네치아의 두카트가 은의 함량이 높고 질이 좋아서 지금의 달러처럼 기축통화에 역할을 했습니다. 스페인의 은화 레알은 질은 떨어졌지만, 엄청난 양 덕분에 기축통화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죠. 뜻하지 않게 남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은은 전 유럽의 경제에 윤활유 역할을 하게 되고 자본주의를 꽃피우는 자양분이 됩니다. 중국은 유럽물건 중에 탐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은이었죠. 유럽은 은이 생긴 덕분에 본인들이 원하는 도자기, 비단, 차 등을 마음껏 수입할 수 있었고 덕분에 무역이 활성화됐죠. 이 은은 중국의 조세제도를 바꿀 정도였다고 합니다. (21세기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양적완화로 넘치는 유동성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400년전 그들이 너무 닮지 않았나요? 역시! 역사는 반복되는 모양입니다.)     

경제 관념이라고는 없었던 황제 카를 5세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은이 무역을 활성화해 유럽에 자본주의 시스템을 탄생시킨 동력을 만든 덕분에 유럽의 지금이 있는 것이지요. 카를 5세를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러 드려야 하는 걸까요?     

안타까운 것은 영국, 네덜란드 등이 무역에서 주도권을 잡고 산업화를 연구하고 있을 때 스페인은 가지고 있는 은만 탕진하면서 선진국으로 가는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노동과 상업을 천하게 여기니 기술개발은 뭔 기술, 산업화는 뭔 산업화입니까? 그냥 소소히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는 농업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00년도 지나지 않아 스페인의 은을 다 고갈됐고 유럽의 삼류 국가로 전락해 버렸죠. 이미 산업과 농업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후였으니까요. 그 후 나폴레옹의 침략과 쿠데타, 독재 정부 등 사연 많은 역사를 걷게 됩니다. 경쟁자였던 영국, 프랑스 역사와는 너무 다른 길이었죠.

정말 로또의 저주가 따로 없네요. 거저 얻은 건 항상 대가가 따르는 모양입니다.

카를 5세를 답답하게 할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지금 스페인의 왕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에서 잇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손자 돈 카를로스와 마주했을 때 이미 카를 5세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카를로스는 수두증에 곱사등 그리고 다리를 절어 항상 시종에게 업혀 다녀야 했으니까요. (결국 돈 카를로스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23세에 숨을 거둡니다.) 왕국의 미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눈치챘겠죠! 어쨌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1558년 9월 21일이 가짜 장례식이 있은 지 몇 주 후 그는 숨을 거둡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일으켰던 혼테크는 나중에 근친결혼이라는 막장으로 치달아 가면서 그 부작용으로 유명한 합스부르크 턱뿐만 아니라 성불능 장애까지 가져와 결국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가 끊기고 말았던거죠.     

근친혼 으로 생긴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걱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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