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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e Sep 19. 2022

4. 너희 집엔 티치아노도 없어?(2)

- 팔려야 그림! 안 팔리면 쓰레기!! -(가고시안)

베첼리오 티치아노 (1488-1576) 베네치아

피렌체 북부에는 8세기부터 장사로 뼈가 굵은 베네치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뭐니! 뭐니! 해도 머니(돈)이였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상인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였습니다. 법과 세금 이 두 가지 것만 지키면 누구나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당시 박해를 당하던 신교도들이 베네치아를 도피처로 삼았죠)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운영하는 동방으로 가는 정기상선은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이용해서 무역할 수 있었습니다. 공화국 전체가 마치 하나의 커다란 기업 같은 곳이었죠.


베네치아는 섬으로 이루어져 무역하기에는 유리했지만, 문제는 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죠. 자급이 가능한 것은 생선과 소금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쪽에서 물건을 사다가 다른 곳에다 파는 중개무역이 활성화됐죠. 동방에서 비단, 향료, 도자기를 가져다가 유럽에다 파는 방식이었죠. 덕분에 최첨단의 물건을 베네치아에서 가장 먼저 써 보고 다른 도시로 퍼져나갔습니다.

베네치아는 수분기가 많아 프레스코화로 그린 그림은 금방 떨어지고는 했죠. 그 때문에 유화가 발달했습니다. 유화는 플랑드르 지방의 화가 얀 반에이크가 발명한 것입니다. 당시 플랑드르 지방은 스페인에서 생산된 양모를 가공하면서 나름 세계의 공장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죠. 염색에 필요한 염료제조 기술도 발달하였습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중개무역의 달인답게 이 염료를 수입해 와서 벤데콜로리(물감상인)들이 전 유럽에 수출했습니다. 덕분에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당시의 최첨단 물감을 가장 먼저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전에 목판에다가 그리던 유화를 티치아노가 돛에 사용하는 가벼운 캔버스에다 그림을 그리면서 운반이 편해 거래가 쉬워졌습니다.          

화려한 색감과 캔버스에 그려진 매끄러운 질감 덕분에 베네치아의 그림은 교역품의 하나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작품(masterpiece)에서 제품(goods)으로 거듭난 거죠.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중국 무역 적자를 돌파해 보고자 성화를 갖다가 팔아보려고 시도도 했다네요. 참! 대답하죠? 하지만 기독교를 믿지도 않는 나라에 먹힐 리가 없었겠죠. 다음으로 시도한 것은 춘화(야한그림)였답니다. 이건 먹힐 만하지 않나 싶은데 취향의 차이 때문인지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시도만은 정말 가상합니다. 이런 시도를 한 배경에는 당시 베네치아는 남다른 분위기가 작용했습니다.


16세기 베네치아는 12만의 인구 중에 1만 명이 창녀로 종사했을 정도로 매춘업도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리규율만큼은 엄격했습니다. 매춘부들은 퇴근 후에나 성스러운 성탄절, 부활절에 남의 남자를 유혹하면 벌금 10두카트를 내고 채찍 15대를 맞아야 했죠. 세금도 잘 내야 했습니다. 법과 세금의 나라 베네치아 답게 이것만 잘 지키면 성직자들의 동성애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오히려 그녀들의 활동을 장려했다고 합니다. 최초로 출판사를 설립한 도시답게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일 년에 한 번씩 도시 중심에서 거리를 따라 매춘부 이름, 주소, 가격을 적은 카달로그를 출판했다고 합니다. 21세기를 사는 제게도 신박한 이야기입니다. 창녀 중에서도 고위층을 주로 상대했던 여성들을 코르티잔(courtesan)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기생처럼 예술 분야에 탁월한 여성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녀들을 귀족들의 자녀들과 교육기관에서 함께 교육했다고 하네요. 덕분에 그녀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여성들과는 다르게 사회적, 경제적, 성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겠죠! 프랑스의 유명한 왕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 코코 샤넬 등이 역사에서 이름을 날린 코르티잔 입니다. 그녀들은 후원자들에게 화대 정도 받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부를 누렸죠! 후원자(patron)들은 저택, 하인, 값비싼 보석 등 서로 경쟁적으로 후원해서 후원자보다 부유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어여쁜 여성을 소유한 남자가 어찌 증표를 남기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파르네세 추기경도 애첩 안젤라의 그림을 추기경 직무실에 두고 보려고 주문을 합니다.     

다나에 티치아노, 1554년

 

추기경의 직무실에 맹탕 없이 야하기만 할 수는 없지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이야기’에 등장하는 다나에로 애첩 안젤라를 살짝 변신시켜 줍니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손자가 태어나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딸 다나에를 탑에다 가둡니다. 천하의 바람둥이 제우스가 다나에를 보고 반하게 되고 황금 빗방울로 변해 그녀를 찾아와 결국 아를 페르세우스가 태어나죠! 이 그림에서는 하녀로 보이는 여자가 나서서 황금 빗방울을 받고 있습니다. 현실에선 파르네세 추기경이 뿌린 돈다발이겠죠?


같은 누드지만 티치아노의 다나에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순진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티치아노의 누드 속의 여성들은 ‘끼’를 부린다고 할까요? 대놓고 성적 매력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녀들의 표정이나 몸짓은 뭔가 아는 듯합니다. 호크니는 이 눈빛을 음탕한 눈(fuck-eyes)이라고 했습니다. 티치아노는 ‘다나에는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수녀처럼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네요! 천하의 미켈란젤로가 데생이 좀 부족한 것 같다고 한 작품이 바로 이 다나에입니다. 인체 비율이 좀 안 맞으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흐뭇한 만족감을 주는데요. 부유한 예술 애호가들이 여러 버전으로 앞다퉈 주문했습니다.


티치아노의 공방에서 최소 6가지의 버전이 그렸습니다. 현존하는 그림은 나폴리, 런던, 마드리드, 비엔나, 시카고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런던에 있는 나폴레옹을 격파한 웰링턴 공작의 저택 Apsley house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펠리페 2세가 주문한 것으로 나폴레옹의 형 조셉 보나파르트가 패전 후에 스페인을 도망쳐 나올 때 마차에 싣고 나온 200점의 그림 중에 이 작품도 있었습니다. 이 그림들을 웰링턴 공작이 몰 수 할 때는 급하게 들고나오려고 액자를 제거해서 후줄근한 몰골이였답니다. 웰링턴은 그림의 상태를 보고 별 볼 일 없는 그림인 줄 알았죠. 그 마차에는 얀반아이크의 아르놀피니의 초상화도 있었는데 말이죠. 웰링턴이 스페인의 왕 페르난도 7세에게 돌려주려고 하자 스페인을 구해준 것이 고맙다며 그냥 200점 다 가지라고 했다네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런 똥눈에게 이런 행운을 주시다니요. 웰링턴 가문에서는 이 그림이 모사품일 줄 알고 수백 년 동안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2015년에서야 진품일 것을 알고는 공개했다고 합니다. 가수는 노래 제목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엉뚱하게 영국에 그림 벼락을 안겨 주었죠!


그래도 이 그림으로 가장 수지맞은 사람은 바로 티치아노입니다. 후대 사람들은 티치아노의 누드를 보고 엘리트용 소프트 포르노라고 했지만, 돈벼락만 내려주신다면 티치아노는 그런 것 정도는 감내할 수 있는 비즈니스 감각이 투철한 사람이었죠. 게다가 본인도 그림의 모델들과 좋은 시간을 많이 보냈네요. 너무 정력을 거기에다가 낭비할까 후원자들이 걱정할 정도였다나요! 예나 지금이나 성에 관련된 산업은 돈 버는데는 탁월한 것 같습니다. 티치아노는 이런 종류의 그림을 정말 많이 그렸습니다. 이유는 그냥 돈이었죠, 돈! 돈만 많이 준다면 혼자 숨겨두고 보시라고 신화적 알레고리 없이 애첩들의 실제 누드도 그려드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티치아노에게 의미를 두는 점은 작품의 탁월성도 있지만, 미술에 비즈니스의 개념을 도입하신 최초의 화가라는 점입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던 미켈란젤로도 그림을 크기만큼 정가로 정해진 재료값과 임금만을 받았습니다. 공방끼리 합의된 가격이 있어서 미켈란젤로라고 해도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미켈란젤로에게는 그만 바라보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수두룩했죠. 그들에게 돈을 부쳐주고 나면 겨우 생계를 해결할 정도라 교황청에 들어갈 때 입어야 하는 예복도 장만하지 못했다네요. 하지만, 베네치아에서 비즈니스를 알았던 티치아노는 최초로 이름값이라는 것을 받기 시작한 화가입니다.


이제 본격으로 티치아노 선생님의 돈 버는 비법을 배워볼 차례입니다. 그림 잘 파는 비법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첫 번째 인내하라!     

만토바 공작부인 이사벨라 데스테는 당시 유명한 여성 컬렉터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예술계의 인플루언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까탈스러웠던 이사벨라 데스테는 60대인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린 티치아노를 들들 볶았습니다. 나름대로 품위 있게 그려줬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려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티치아노 그녀가 보낸 그림 하나를 받고 알겠다는 듯이 그녀를 이렇게 그려줍니다.

이사벨라 데스테 티치아노, 1534-36


그녀가 만족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겠죠? (티치아노가 전달받았던 그림은 이사벨라 데스테가 20대 때 모습이 담긴 초상화였습니다) 그림도 이 정도면 사기에 가깝습니다. 40살이나 젊게 그려주었으니 말이죠. 정말 고객 맞춤형 서비스입니다. 앙다문 입을 보니 그녀의 한 성깔 하는 성격도 빼지 않고 표현해 놓았네요.(당시 티치아노가 받은 스트레스가 느껴집니다) 뺨에 환상의 뽀샵질은 서비스 였나 봅니다.     

 다빈치도 이사벨라 데스테 공작부인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었죠. 다빈치가 밀라노에서 그린 단비를 안은 여인을 보고 반한 공작부인은 다빈치에게 물심양면으로 공을 들입니다. 덕분에 만토바로 다빈치를 부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밀라노에서 본 다빈치의 단비를 안은 여인의 짝퉁으로 강아지를 안은 여인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다빈치는 뭐에 빈정이 상했는지 드로잉 한 점만 덜렁 던져주고 떠나 버립니다. 역시 매력의 최고봉은 튕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성격에 길길이 날뛰기는커녕 똑같은 거 한 점이라도 더 그려달라고 애가 달아서 매달렸으니 말이죠. 다빈치는 자존심을 지켰는지 몰라도 거래는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창의적인 도전정신과 어디에도 굽히지 않는 욱하는 성질을 가진 다빈치가 천상 피렌체인이었다면, 티치아노는 타고난 베네치아인이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더라고 그림을 팔고야 말았죠.     


둘째 유명인의 마음을 사라!     


 티치아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궁정화가가 됩니다. 문제는 카를 5세는 왕권신수설의 구닥다리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카를 5세의 몸을 만지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을 정도로 그의 위상은 대단했습니다. 보티첼리가 조수 시절에 받은 연봉이 76두카트 정도였는데 글쎄 초상화를 그려준 티치아노에게 1두카트를 줬다는 겁니다. ‘내 얼굴 그려 본 것만 해도 영광이지?, 천박하게 돈은 필요 없잖아?’ 이런 사고방식 인거죠. 돈이 왜 필요 없습니까? 다 돈을 벌라고 하는 것인데 말이죠! 영광을 더 느끼라고 황금 박차의 기사에 임명해줍니다. 영광스러운 건 영광스러운 거고 돈은 돈이죠. 페데리코 곤차가가 나서서 150두카트를 주기로 하고 마무리됩니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베네치아와 아직 중세관습을 벗어나지 못한 스페인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돈 문제야 어쨌든 티치아노는 카를 5세의 용안을 독점하여 그릴 정도로 신임을 얻었습니다. 카를 5세가 허리를 굽혀 붓을 주워주었다는 유명할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말이죠. 이렇게 대단한 분의 전담 궁정 화가라는 프리미엄 덕분에 다른 왕들과 귀족들이 덩달아 티치아노의 그림을 갖고 싶어 다들 안달이었죠. 웬만한 귀족들은 주문도 받아주지 않았다네요. 그러니 더 갖고 싶어 안달이었죠. 요즘으로 따지면 대기 리스트에 이름 올리고 몇 년 기다려서 받을 수 있는 한정판 명품이었던 거죠. 몰려드는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그는 여러 명의 조수를 둔 공방을 운영했습니다. 평생 그의 손을 거쳐간 그림만 600점이 넘을 정도 였죠. 공방에 불이 나서 많이 타버렸는데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작품이 300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요즘도 스페인의 알바 공작부인의 컬렉션, 영국의 왕실 컬렉션, 웰레스 컬렉션, 웰링턴 공작 컬렉션 등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컬렉션에서 그의 그림을 자주 만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티치아노 그림 정도 있어 줘야. 귀족 사회에서 좀 먹어줬겠죠! ‘넌 티치아노 초상화도 없냐? 난 2점 주문했잖아!’ 이런 분위기 아니었을까요?      


셋째 고객의 마음을 읽어라!     


장사꾼이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것을 좋아할까를 고민하다 보면 한 번에 사람을 간파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거죠, 그래서 장사꾼을 오래 하면 관상쟁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타고난 장사꾼 티치아노는 관상쟁이처럼 인물들을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그림을 그렸죠. 그림의 주인공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만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인물의 내면까지 그려내는 것이 티치아노의 능력이었습니다.                         


개를 데리고 있는 카를 5세의 초상, 티치아노 1532년-1533년


개를 데리고 있는 카를 5세의 초상은 티치아노 작품 중에서도 탁월합니다.      

군주들의 초상화는 군주가 전쟁터에 나가고 없을 때 군주를 대신해 살포시 겁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덤비고 싶을 때 보고 정신 차리라는 거죠. ‘짜사 봐라! 내가 얼마나 센지 그러니까 까불지 마라, 비단옷으로 휘휘 감고 있는 거 보이재? 돈도 억수로 많다잉 달겨들면 작살을 내줄 것이여!’ 요런 겁주기 용이었죠.

대규모의 예술작품에 투자했던 이유는 돈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돈 자랑이 아니라 당시 전쟁은 말 그대로 돈 먹는 하마였습니다. 왕들은 상비군이 없이 전쟁이 나면 돈으로 용병을 사야 했으니 돈이 있어야 전쟁에도 참여할 수 있었죠. 그러니 돈이 많다는 걸 과시하는건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적에게 알려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방어전략 중 하나였죠.     

티치아노는 이런 군주의 초상화를 그릴 때도 힘의 과시를 위해 보기 부담스럽게 과장해서 그리기보다 사실에 근거해서 매력적으로 권위가 드러나도록 그렸습니다. 카를 5세의 얼굴은 백지장까지 하얀 피부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실크의 넘치는 광택은 만지고 싶을 만큼 탐스러운 질감으로 그의 부유함을 충분히 드러냈습니다. 넓은 어깨 패드와 모피는 그가 큰 체격이 아님에도 강한 군주처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만져보지 않아도 질감이 느껴지는 털이 있는 큰 개는 충성스러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나 할까요? 티치아노는 우스꽝스러운 과장 없이 카를 5세가 바라는 권위와 위엄을 이 그림에 드러내 줬습니다. 주문자의 가려운 데를 알아서 긁어준 것이죠.    


장갑을 낀 남자, 티치아노 1520-23년


장갑을 낀 남자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당시 초상화는 여러 가지로 쓰였는데 그중 하나가 혼담을 위한 요즘 말하면 증명사진의 용도로 쓰였습니다. 귀족들의 결혼이야 대부분 정략결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얼굴은 대충 알고 판단해야 했겠죠. 헨리 8세는 한스 홀바인이 그린 네 번째 부인의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심했지만, 그녀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 얼굴을 보고 실망해 바로 퇴짜를 놔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6개월 만에 강제 이혼을 당해야 했죠. 한스 홀바인이 너무 미화해서 그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만큼 정확하게 얼굴을 그리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이 그림이 어떤 목적으로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청혼을 위한 그림이었다면 이 그림을 받고 어떤 여자인들 반하지 않았겠습니까? 티치아노는 인물을 과장해서 미화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매력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림 속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저도 빠져버릴 지경입니다. 가죽장갑의 질감 표현, 섬세한 손의 생생함, 눈부시게 하얀 셔츠의 색감 이 모든 것은 이 남자가 얼마나 부유하고 높은 지위의 사람인지를 은연중에 잘 나타내 줍니다. 게다가 고급 슈트 모델이라도 된 듯 살짝 옆을 응시하는 저 눈빛 좀 보십시오. 주문자가 만족한 것은 당연했겠죠! 게다가 티치아노는 빨리 그려주는 재주까지 있었습니다. 그 비법이 공방에서 수많은 조수와 함께 작업한 덕분이었다는 것을 아마 이 부자 주문자는 몰랐을 겁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빠르게 이렇게 잘 그려줬으면 장땡이죠. 이런 그림이라면 카드를 100개월 할부로 긁더라도 저도 하나 갖고 싶네요.

    

넷째 스스로 최고가 되라!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린 래리 가고시안

작품의 더 잘 팔기 위해 로마 교황의 부름도 외면하고 그는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며 스스로 유명해집니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죠. 덕분에 이전에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어내죠. 티치아노는 말하자면 16세기의 앤디워홀이었습니다. 그 자체로 후대 화가들의 롤모델이었죠. 판화를 팔아서 돈깨나 만진 독일의 거만쟁이 뒤러도 티치아노의 인정을 받고는 감격해서 어쩔 줄 모를 정도였죠. 그림 스타일뿐만 아니라 삶의 처세술까지도 바로크의 천재들은 그를 벤치마킹했습니다. 루벤스의 대규모 공방운영, 귀족작위, 국제적인 활동 이 모든 길에 원조는 티치아노였죠. 한 걸음 나아가 루벤스는 외교관을 역할까지 하며 정계에까지 영향력을 과시합니다.

티치아노는 화가의 신분상승에 길을 열어놓았고 그림 산업 육성에도 기여했죠. 이제 더 이상 공방에서 소소하게 애들 몇 명 모여 놓고 그림을 그리는 수준을 넘어선 그림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천정부지로 그림값도 올려놓으시고요. 이 정도면 정말 현대미술 산업의 아버지라고 불러들여야 할 것 같네요.

이제 현대의 화가들은 돈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죠. 그림도 비즈니스라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됐습니다.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영국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수여하는 기사 작위를 거부했습니다. 이름 앞에 ‘Sir’가 붙는 게 싫다는 것이 이유였죠. 작위를 퇴짜를 맞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초상화를 주문까지 거절을 당했죠. 현재 화가의 지위가 이런 수준입니다. 물론 호크니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만요. 결국, 호칭에 변화가 없는 훈장만 22년이 지난 2012년에 받았죠. (‘하도 받으라니까 그냥 받아준다, 이거 뭐 쓸데도 없는데’-호크니)

데이비드 호크니의 최고가 그림은 얼마 전에 1000억을 넘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1000억 화가 말고 다른 작위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것이겠죠.     

데이비드 호크니도 소속된 적이 있는 세계적인 가고시안 갤러리의 주인인 래리 가고시안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팔리면 작품, 안 팔리면 쓰레기’

21세기에 태어났다면 티치아노는 가고시안 갤러리의 픽업 1순위가 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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