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가 그려드리지 못한 초상화를 프랑수아 1세는 죽어서야 얻게 됩니다. 프랑수아 1세가 죽은 후에 첼리니가 만든 메달을 보고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 얼굴 어딘지 낯익지 않으신가요? 맞습니다. 앵그르가 19세기에 그린 '다빈치의 임종'에서 죽어가는 다빈치를 애통하게 안고 있는 프랑수아 1세의 모습은 바로 이 그림을 보고 그린 것입니다. (프랑수와 1세의 호방한 성격이 마치 본 사람처럼 그림에서 잘 드러냈습니다)
지금 루브르에는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티치아노의 프랑수아 1세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모나리자의 유명세에 가려져서 티치아노의 프랑수아 1세 초상화가 거기에 있는 것도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실을 티치아노 선생님이 알게 되신다면 충격으로 쓰러지실까 봐 걱정입니다.
'뭐? 내가 다빈치한테도 밀린다고? 요즘 것들 그림 보는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노발대발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치아노의 생존 명성을 생각하면 지금의 인지도는 제가 다 민망할 정도입니다.
여기에는 디세뇨(데생) 논쟁이 숨어 있답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피렌체의 선(이성)과 베네치아의 색(감성)의 대립입니다.
피렌체 출신의 다빈치는 티치아노보다 나이가 30살 정도 많았으니 티치아노한테는 대선배였습니다. 티치아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는 미켈란젤로(1475-1564)입니다. 둘은 1545년 로마에서 만났었는데요. 이날 미켈란젤로가 티치아노의 다나에와 금빛 소나기를 보고 말로는 생기 넘치는 화풍을 칭찬했지만, 내심으로는 별 감동을 하지 못한 듯 ‘베네치아에서 제대로 된 드로잉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한 일을 바사리가 책에 적어놨죠. 한마디로 베네치아 화파와 티치아노를 깔본 거죠. 이쯤 되면 싸우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사리는 피렌체 출신의 화가이자 최초의 미술사책을 저술한 사람입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는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입니다. 지난 다빈치 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프레스코화는 윤기도 없지만 계속 덧바르며 수정해서 그릴 수 있는 유화와 달리 한번 그리면 수정이 어렵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완벽에 가까운 데생을 먼저 그리고 난 후에 천장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역동성이 강조된 콘트라포스토(미술에서 인체를 표현할 때 무게를 한쪽 발에 집중하고 다른 쪽 발은 편안하게 놓는 구도), 황금분할의 절정을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데생은 완전함 그 자체입니다. 윤곽선에다가 빗금으로 명암을 칠해서 완벽한 입체감을 보여주는 그의 데생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작품입니다. 계산된 그림의 정수라고나 할까요?
그럼 티치아노로 대표되는 베네치아의 그림은 어땠을까요?
티치아노는 그림을 그릴 때 별도로 데생을 하지 않고 캔버스에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수정하기에 편한 유화를 주로 그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예로부터 동방무역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벤데콜로리 라고 불리는 물감판매 업자들이 성행하고 있었죠. 이들은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안료와 유약을 홍보하기 위해서 다양한 색감의 그림을 주문했습니다. 덕분에 베네치아 화가들은 고가인 청금석으로 만드는 파란색까지도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베네치아 회화가 화려한 색감을 띄게 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색감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베네치아 화가들은 뛰어난 색감을 넘어 빛(광택)을 보여줍니다.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레오나르도 로레탄 총독
티치아노의 스승 베네치아 화파의 아버지인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입니다. 레오나르도 로레탄 총독이 입은 공단 옷에 광택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이 그림을 좋은 도판으로 보면 광택을 넘어 만져보고 싶어지는 생생한 질감이 느껴지실 겁니다.
저에게는 베네치아 화파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살아있는 듯한 질감입니다. 미술관에 가서 이렇게 생생한 질감의 그림을 보게 될 때면 뒷일 생각하지 않고 마구 쓰다듬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죠. 정말! 기회가 되신다면 베네치아 화파 작가들의 그림을 직관하시라고 권해드립니다. 이 질감은 그림을 직접 보셔야만 그 황홀한 느낌을 느끼실 수 있을 테니까요!
선을 중심으로 수학적이고 이성적인 그림을 그렸던 피렌체화파와 색을 중심으로 감성적인 그림을 그렸던 베네치아화파 둘 사이의 논쟁에서 처음에는 르네상스의 발원지인 피렌체가 우세한 것 같았으나, 피렌체가 카를 5세의 침략으로 쇠퇴한 후에 르네상스의 중심이 로마와 베네치아로 이동하면서 베네치아가 예술의 중심지가 됩니다. 베네치아 최고의 화가였던 티치아노 전 유럽에서 이름을 날린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화풍은 바로크의 대가인 루벤스, 벨라스케이스, 렘브란트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티치아노가 바로크 미술의 아버지인 셈이죠.
하지만, 데생을 중시하는 고전주의를 추종하는 푸생이 프랑스의 국립아카데미인 에콜 드 보자르의 원장이 되면서 선을 중시하는 피렌체 화파가 다시 미술의 중심이 됩니다. 푸생은 장려양식이라고 해서 요래 요래 그리라고 하는 가이드라인들 정해줍니다. (신화등 위대한 주제, 데생중시, 명암법 등을 꼭 지켜가며 그려라! 하는 기준을 만듭니다. 배운 방법대로 잘 그리면 장땡이었던 거죠. ‘창의성 따위는 접근금지~~~!!’)
바로크 양식과 고전주의 양식의 대립한 후에 로코코양식이 유행했습니다.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 주제로 밝고 경쾌하게 그린 색채를 우선하는 베네치아 양식에 영향을 받은 양식이었습니다. 당연히 감성적인 그림이었습니다. 로코코의 대가들은 존경하는 화가로 티치아노나 루벤스를 꼽았죠.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그림에서도 대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치와 향략, 부도덕적인 면을 대놓고 그림에 주제로 삼았던 로코코는 퇴폐미술이 되어 퇴물취급을 받게 되고 이제 신고전주의 양식(푸생의 고전주의 양식이 복고로 돌아온 겁니다.)이 유행하게 됩니다. 주제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한 내용, 성경에 관한 내용 등 교훈적인 내용들이 많았죠. 푸생의 장려양식이 귀환홥니다.
선을 중심으로 하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면서 피렌체의 미술은 주목을 다시 주목받게 되고 우리가 잘 아는 콰트로첸토의 천재(보티첼리,라파엘로,미켈란젤로,다빈치등)들은 지금의 명성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양식은 인상주의 미술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미술사에서 100년이 넘게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신고전주는 미국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죠. 우리나라에도 개화기에 들어왔습니다. 그 전통이 아직까지도 이어져서 우리나라 미술학원은 아직도 데생교육에 열심히 입니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미대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주구장창 아그리파(로마 장군)의 조각상을 데생하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연들 때문에 한국에서는 티치아노의 인지도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비교해서 좀 밀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예술 분야에 남긴 유산은 피렌체의 미술보다 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