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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e Sep 07. 2022

3. 이탈리아제 덕후 프랑수와 1세(2)

세계는 지금 내꺼하자 열풍

-벤치마킹의 달인 프랑수와 1-


로마행 비행기를 파리로 돌린 놀라운 변화를 만드신 시작이 프랑수와 1세라는 것을 아셨나요?      

중세의 대표하는 고딕양식 중에 가장 유명한건 얼마 전에 화마에 휩싸였던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입니다. 바로크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샤유 궁전이죠. 루이 14세가 바로크양식으로 지었답니다. 후에 루이 15세가 로코코 양식으로 실내를 리모델링했죠. 파리에 가면 고딕양식, 바로크, 로코코 심지어 로마군이 남겨놓고 간 판테온도 볼 수 있는데요.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은 딱히 떠오르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루와르 지방에 가시면 보실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성들이 바로 르네상스 양식입니다. 이제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양식이 어떻게 루와르 계곡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루와르 강변 고성

 프랑수와 1세에게 나라를 물려주는 게 못마땅 했던 장인 루이 12세는 프랑스 역사에서는 보기 드물게 성군이었습니다. 1504년 재정개혁과 1508년 세금동결 과 세금 징수과정 개선으로 프랑스인들에게 큰 지지를 받아 삼부회에서 ‘국민의 아버지’ (Pere Du Peuple)이라는 칭호까지 받았죠. 하지만, 이분에게도 유럽왕들에게 나타나는 고질병이 어김없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토확장병이죠. 루이 12세는 1499년 밀라노를 정복하고 밀라노를 다스리던 스포르차 공작을 축출합니다. 이 난리 통에 스파르차 공작 밑에서 일하던 다빈치는 졸지에 실업자가 됩니다. 루이 12세는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보고 반하여 다빈치를 궁정화가로 임명하고 성안나와 성모자를 주문합니다. (역시 우리 다빈치 선생님은 이 그림도 미완성작으로 남겨두십니다.)

  이 원정은 1513년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화병으로 루이 12세는 죽고 맙니다. 뒤를 이은 프랑수와 1세는 1515년 장인의 복수라도 하려는 것인지 왕이 되자마자 밀라노 공국을 쳐들어갔고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의 군사를 무찌르고 대승를 거둡니다. 이 전투가 프랑수와 1세의 인생에서 대승한 유일한 전투에서 최고의 행운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얻게 됩니다.

 1516년 볼로냐협약을 맺을 때 프랑수와 1세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에게 전리품으로 라오콘 군상을 요구하자 교황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장인의 궁정화가이기도 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소개해 준 것입니다. 협상의 달인 메디치 가문에 후손답죠.

(이제와 생각해 보면 다빈치를 소개해 준 걸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겠지만요.)

 왜 교황이 잘나가는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를 소개해 주지 않았던 걸까요? 그냥 단순히 그들을 보내기가 싫어서였을까요? 지금 생각에는 로마라는 작은 물에서 노는 것보다 강대국 프랑스에 가서 의리의리한 궁정생활 구경도 하고 명작이라도 한 점 남기고 오면 더욱 크게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인 거 같은데 말이죠. 화가들이 서로 갈려고 줄을 서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일단 그 당시 프랑스에는 의리의리한 궁정이 없었습니다. 루브르 궁전도 처음에 지어졌을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강가에 요새로 지은 것이었습니다. 실내 인테리어 따윈 고려하지 않고 지은 거죠. 군사기지나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백년전쟁 배경의 영화 더킹을 보면 식사장면에서 포크도 없이 나이프를 가지고 식사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그 장면만 보면 정말 왕이 아니라 산적이 따로 없죠.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우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하느라 문화에 신경쓸 시간이 없어 문화 후진국이 되어 버렸던 거죠.) 영국보다는 그래도 좀 나았던 프랑스에도 이 당시에 포크가 없었습니다. (프랑수와 1세가 메디가 가문에 딸인 카트린느를 며느리로 삼으면서 그녀가 이탈리아의 포크를 사용하는 문화를 프랑스에 전파했다고 하네요!)

 한마디로 프랑스가 군사적으로는 강대국이었지만, 문화를 비교해 본다면 이탈리아 보다 깡촌이었죠. 프랑수와 1세도 최후에 만찬을 보고 반했다고 하니 다빈치도 프랑스로 모셔가는 것도 영광이었겠지만, 전성기의 명장인 젊은 미켈라젤로나 라파엘로가 와서 작품하나 남겨주는 것을 왜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낙후한 프랑스 따위에 갈 리가 없었죠. 어쩔 수 없이 프랑수와 1세는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면서 대가들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죠.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공작들보다 못한 곳에서 산단 말인가? 하면서 자괴감을 느꼈겠죠.

 중세의 요새 수준이었던 앙브아즈의 성의 변모는 루이12세가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일단 좋은 것을 보면 따라하고 싶은 게 기본적인 욕망 아니겠습니까? 루이12세가 이탈리아 물을 먹고 와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검소한 루이 12세의 변화와는 다르게 사치스러운 프랑수와 1세는 대놓고 크고 화려하게 이탈리아 양식의 궁전으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왕이 루와르 계곡에 이렇게 멋진 궁전을 떡하니 지어놓으니 주변의 귀족들도 따라하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덩달아 주변에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을 신축, 개축하기 시작했던 거죠. 그 결과 지금은 루와르계곡 주변에 고성이 80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죠. 프랑수와 1세가 적극적으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받아들여서 토양을 마련한 덕분에 루이 14세가 베르샤유 궁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베르샤유 궁전을 지을 때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의 대가인 베르니니에게도 설계도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결국 프랑스의 건축가 루이 르보에게 베르샤유 궁의 설계가 맡겨집니다. 이제는 이탈리아 건축이 무조건적인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던 거죠. ‘야! 이탈리아 건축가도 별거 없네!’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겁니다.

 이것이 벤치마킹을 통한 발전의 모범적인 사례를 겠지요. 선진기술을 견학하고 (밀라노 원정) 인재를 수입하고 (이탈리아 예술가들 초청) 선진기술을 모방해보고 (앙부아즈성 개축) 나아가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술로 변화 발전 (베르사유 궁전)하는 과정이 지금의 기술이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프랑수와 1세는 이탈리아의 문화의 씨앗을 가져다가 프랑스에 제대로 이식하신 덕분에 그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의 방향을 돌리신 위대한 왕으로 인정받게 되신 겁니다.     


-세계는 지금 내거하자 열풍!!!! -         


다빈치가 프랑스와 1세에게 선물한 오토마통을 재현한 모습

다시 프랑수와 1세와 다빈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빈치는 이미 나이도 많았고 로마에서 제대로 된 작품제작의 기회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프랑스로의 초대가 나쁘지 않았나 봅니다. 프랑수와 1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사자모형(오토마통)을 선물하죠. 둘은 이런 코드가 잘 맞았는지 프랑수와 1세는 넉넉한 연금과 클루 뤼세 성을 마련해 주는 조건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앙부아즈 왕궁 옆으로 그를 모셔갑니다. 이미 64살이나 된 다빈치는 그 당시 작품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팔이 망가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다빈치를 군사전문가로 초대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글쎄 밀라노에서 활약했던 것처럼 궁전파티 플래너로 불렀다면 모를까? 다빈치가 정말 그 당시에 인정받는 군사 전략가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체사레 보르자의 군사전략가로 잠깐 일한 경험이 있지만, 실력을 보이기도 전에 보르자가 죽어버려서 실제로 활동한 경력은 없으니까요.

 (하긴, 우리가 이름을 들어본 피렌체의 화가나 조각가들인 브루넬레스키, 미켈란젤로, 나중에 프랑수와 1세가 프랑스로 모셔간 첼리니도 전쟁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화가가 왜 전쟁에 나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시대에는 건축가가 군사 전략가로도 활동했다고 합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구 4만 명밖에 안 되는 피렌체에서 전쟁이 터지면 아무리 용병을 부른다고 하지만 누가 나가고 안 나가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누구라도 나가 할 수 있는 건 해야죠!)

초대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 젊은 왕은 다빈치를 모셔와 각자의 성을 연결된 지하터널에서 몰래 만나 밀애 아닌 밀애를 즐길 정도로 브로맨스를 나눕니다.           

프랑수와 1세는 다빈치에게 루이 12세가 주문했던 성모자와 성안나의 채색이라도 마무리하라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프랑수와 1세를 위해서 초상화 하나 남겨주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하긴 17년씩이나 머물렀던 밀라노에서도 스포르차 공작의 얼굴 한 점을 남기자 안으신 분이니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 아니겠습니까? 3년간 프랑스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다가 다빈치는 프랑수와 1세의 품에서 숨을 거둡니다. 프랑수와 1세는 다빈치를 나의 아버지 (Mom pere!)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5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했을지 모르는 장인은 처음부터 그를 탐탁지 않아 했으니 처음으로 다빈치에게 부성애를 느꼈을 수도 있었겠죠. 지금 다빈치가 프랑스에 세운 공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습니다.     

다빈치의 임종 , 앵그르

프랑스의 화가 앵그르가 그린 다빈치의 임종입니다.

마치 제 눈에는 ‘너 내거하자!’ 이렇게 보이네요.     

다빈치가 프랑스에 갈 때 나귀에 싣고 간 ‘세례자 요한’, ‘모나리자’,‘ 성안나와 성모자’는 프랑수와 1세가 사들여서 프랑스 소유가 되었습니다. 다빈치 작품은 진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들은 기록에도 정확히 그의 작품인 것으로 진품을 인정받은 작품들일 뿐 아니라 작품성 또한 뛰어난 것들이니 프랑스에겐 정말 복덩이가 따로 없는 것이죠.         

2019년은 다빈치 사후 5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유럽 곳곳에서 1000개가 넘는 다빈치 관련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다빈치의 그림으로 인정받는 진품이 18~24점 정도 밖에 없으니 대부분의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 24점 중에 모나리자를 포함하여 핵심 작품 5점을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루브르는 다빈치 사후 500주년 기념 전시회인 ‘레오다르도 다빈치전’은 시간대 별로 예약을 받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합니다. 사실 황금분활의 정수를 보여주는 ‘비트루비안 맨’이 빠진 반쪽짜리 전시회가 될 뻔했지만, 이탈리아 법정 소송까지 치른 끝에 극적으로 ‘비트루비안 맨’을 대여 받게 되었습니다. 루브르는 그 보답으로 이탈리아에 2020년 라파엘로 사후 500주년 전시회에 라파엘로의 작품을 대여해 주기로 합의를 하면서 이런 역사적인 전시회를 기획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죠.     

 제가 놀랐던 점은 앙부아즈성에서 열린 사후 500주년 행사에 이탈리아 마타렐라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는 사실입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참석한 건 당연하지만요. 사후 500주년 행사를 프랑스에서 한다는 건 모나리자 하나를 주는 게 아니고 다빈치 전체를 프랑스에 내어 주는 것 같은 뼈아픈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이탈리아라면 2052년 다빈치 탄생 600주년을 보란 듯이 성대하게 피렌체에서 할 수 있도록 준비할 텐데 말이죠. 넉넉히 30년이 남았으니 준비 철저히 하실 시간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이미 이탈리아는 모나리자의 소유권을 완벽하게 인정해 준적이 있습니다. 1911년 이탈리아인이 페루자가 모나리자를 훔쳐서 이탈리아로 들고 간 사건이 말입니다. 그는 모나리자를 작물로 팔아 거금을 손에 넣으려다가 미술품 화상이 신고로 잡혀서 결국 이탈리아 법정에 서게 되었고 이탈리아 국민은 모나리자가 고국으로 돌아왔다며 난리였죠!

당시 이탈리아 여론도 들 끊은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사람이라면 안면몰수 하고 모나리자를 꿀떡하고 싶은 심정이 왜 들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쿨하게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돌려줍니다. 사실 모나리자는 프랑수와 1세가 다빈치에게 돈을 주고 산 것으로 프랑스 왕실재산이었다가 프랑스혁명 이후로 루브르 박물관의 소유로 이관된 것으로 약탈품도 아니니 반환을 안 해줄 구실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즘 들어 모나라자가 이탈리아를 또 속상하게 한 적이 한 번 더 있었습니다. 2012년 프랑스가 월드컵을 우승하자 루브르는 측에서 모나라자에 프랑스 축구복을 입혀서 승리를 자축합니다. 예선에서 떨어졌던 이탈리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죠! ‘니네 축구복은 들라쿠르아한테나 입혀라!!!’(들라쿠르와는 프랑스 유명화가입니다) 비난 여론이 들끊었죠. 이 와중에 영국의 BBC는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사람이니까 이탈리아 축구팬일 가능성이 높다라며 훈수를 둡니다. 이탈리아는 이래저래 열받는 상황이었죠.     

저는 처음에 이 기사를 보고 ‘차라리 고흐한테 입히지 왜 시끄럽게 일을 만들어?’ 그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고흐가 네델란드 사람이라는 게 생각났습니다. 근데 프랑스 사람으로 순간 착각했던 거죠! 피카소는? 스페인사람이죠! 솔직히 마네나 마티스 얼굴 아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겁니다. 물론 유명하기는 하지만요!

18세기 이후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미술계의 진짜 슈퍼스타들은 프랑스에서 활동한 다른 국적의 사람인 경우가 많았죠. 인상주의의 시작은 프랑스인이 모네지만 가장 유명한 화가는 고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네덜란드인입니다! 야수주의는 프랑스인이 마티즈가 맞고, 입체파하면 다 아시다시피 스페인 출신 피카소 아닙니까! 샤갈은 러시아인입니다. 우리는 마치 이 모든 화가들이 프랑스인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 것이 프랑스의 진짜 능력니다.

다빈치도 내거! 고흐도 내거! 피카소도 내거! 샤갈도 내거! 로 만드는 프랑스인은 피렌체인 만큼이나 열린 사고를 가진 국민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나라 출신이 뭐가 중요합니까? 이 작가들 스스로 프랑스에 와서 활동했고 많은 작품이 프랑스에 있죠. 이런 배경으로 프랑스에서 영향을 받아 작품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고 스토리를 만들어내 우리가 다빈치, 고흐, 피카소, 샤갈 하면 떠오르는 나라를 프랑스로 만든 것이 프랑스를 문화강국으로 만든 또 하나의 비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이 화가들은 만나기 위해 프랑스행 비행기표를 사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하죠. ‘조상 잘 만나서 관광으로 먹고살아서 부럽네!’ 근데 찬찬히 들여다보니까 이런 프랑스는 그냥 얻어졌던 게 아니라 그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던 것을 인정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런 프랑스를 보면서 다른 국가들도 벤치마킹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2012년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당시 최고가인 2900억에 팔렸습니다. 요즘은 하도 그림값이 천문학적으로 올라서 몇천억이 놀랄 일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구입자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에도 수없이 나올 만큼 이슈였습니다. 속사정은 이랬습니다. 셰이카 알 마야사 카타르 공주가 카타르국립박물관 개관을 계획하면서 이 작품을 구매했습니다. 저같이 카타르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까지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었으니, 2900억의 그림의 홍보효과는 정말 말해 무엇 합니까?     

카타르박물관은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의 설계로 2008년부터 시작된 이 국책사업은 2011년 말 공사를 시작해서 2019년 개관을 했습니다. 박물관 외관부터가 정말 범상치 않습니다.  

 이곳에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800억 하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과 300억의 몸값을 자랑하는 고갱의 대표작 언제 결혼하니?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이 박물관 하나를 보자고 카타르에 갈 것 같지는 않지만, 이렇게 멋진 해안가 옆에 있는 카타르박물관을 사진을 보니 유럽을 갈 기회가 있다면 도하를 경유하는 항공권을 끊어서 들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주님의 프로젝트가 이 정도면 성공 아니겠습니까?     

요즘 미술시장에 가장 큰 손이 오일머니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내거하자에 열중인 또 다른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아랍 에미리트입니다. 2007년 아부다비와 프랑스 정부간 협정으로 30년간 루브르라는 이름을 빌려서 사용하게 될 뿐만 아니라 1조4000억을 지불한 덕분에 주요 작품까지 대여 받았다고 하네요. 2017년 개관식 특별전은 반 고흐의 <자화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등 세계적인 작품도 볼 수 있었다고 하네요! 돈이 좋긴 좋네요.

게다가 남자 모나리자로 유명세를 떨친 5000억의 살바도르 문디(예수를 그린 다빈치의 작품)를 구입한 곳이 아부다비 정부라고 밝혀지면서 루브르 아부다비에서 문디를 곧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1000만 관객 모나리자의 아성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지도 참 궁금합니다.     

 마지막 나라는 중국입니다. 2019년 상하이에 퐁피두센터 웨스트 번드 미술관을 열고 5년간의 운영을 한다고 합니다. 파리의 3대 미술관은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입니다. 보통 루브르는 인상주의 이전까지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고, 오르세는 인상주의 작품을 주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퐁피두는 현대미술을 주로 소장하는 대표미술관입니다. 퐁피두센터는 2015년 첫 분관을 스페인 말라가, 2018년에는 벨기에 브뤼셀의 ‘퐁피두센터-킹카날’이라는 이름으로 열었습니다. 상하이는 퐁비두의 세 번째 분관입니다. 퐁피두센터를 유치한 상하이의 예술특구 웨스트 번들 측이 건축비·임대료는 물론 매년 약 35억 원 정도의 전시기획비를 분담한다고 합니다.

이들 국가는 마치 프랑수와 1세가 처음 이탈리아의 예술가들과 작품을 사들였던 그때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언젠가는 파리, 뉴욕처럼 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그날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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