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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e Sep 26. 2022

6.바로크의 천재들은 왜 다 잊혀졌을까?(1)

-병든 바쿠스가 된 로마-

카라바조 (1571-1610)

로마의 쇠퇴는 신의 시대에서 돈의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5장을 읽으시면서 카를 5세는 전쟁광으로 생각하셨을 수도 있지만, 카를 5세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넋 놓고 있으면 누군가에게 침략을 당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약소국들은 항상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았고, 전쟁에 지고 나면 엄청난 전쟁배상금에 시달려야 했죠. 살아남으려면 강해야 했고, 먼저 공격하는 게 최선의 방어였죠. 1527년 카를 5세의 로마침공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코 디 로마(로마약탈)입니다. (카를 5세가 용병들에게 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자 격분해서 교황이 계신 로마에서 무차별적인 약탈을 별인 사건입니다) 로마 교황이 프랑스와 편먹고 코냑동맹을 맺어 신성로마제국을 위협하려고 하자 카를 5세가 먼저 선빵을 날린 것입니다. 패전국이 되면 교황이 계신 로마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교황(교황은 로마의 군주이기도 했습니다)은 40만 두카트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배상금으로 냈습니다. 당연히 로마 내에 스페인의 입김이 커졌고, 틈틈이 이탈리아에 침을 흘리는 프랑스의 간섭까지 받아야 했죠. 

대항해시대에 유럽은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해양무역로를 개척하게 됩니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투르쿠를 거치지 않아도 무역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새로운 무역로가 생기면서 이탈리아 중개무역 도시들은 순식간에 설 자리를 잃고 말았죠. 로마는 패전과 함께 종교개혁, 중개무역의 쇠퇴 등 겹겹이 쌓인 악재로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병든 바쿠스 카라바조, 1593-94

운이 다해가는 도시 로마에 1590년 젊은 카라바조가 찾아옵니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는 가톨릭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당건축과 제단화를 그리는 일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었죠. 지금 로마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신교와의 한판에서 승리(?)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웅장하게 증축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들입니다. 마치 부도 직전의 기업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과 같은 거죠. 어쨌든 카라바조 같은 젊은 예술가에게는 로마는 기회의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그림을 배웠는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카라바조 같은 초짜 화가에게 처음부터 누가 그림을 쉽게 맡길 리는 없었겠죠! 꽃, 과일에 묘사가 탁월한 점을 인정받아 매너리즘 화가 주세페 체사리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그나마도 체사리 형제들과 어울려 패싸움을 하다가 잘립니다. 덕분에 생겨가 막막해지죠.

이쯤에 카라바조는 자신의 모습을 병든 바쿠스(술의 신)로 표현합니다. 손톱에 낀 때 하며 핏기없는 입술이 굶주리고 병든 카라바조의 상황을 잘 나타내어 주죠. 로마 뒷골목 빈민들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굶주림, 질병, 절도, 사기와 폭력이 난무한 병든 도시였습니다. 카라바조의 로마 뒷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방탕하게 생활하는 일상을 고스란히 그림에다 담았습니다. 카라바조는 하면 ‘안 봄 놈은 안 그릴라요!’로 유명한 자연주의화가 아니겠습니까? 당시에 그의 미화되지 않는 날것의 그림은 라파엘로의 그림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성화를 그릴 때도 주변의 하층민을 모델로 해서 너무 사실성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흉측하다며 퇴짜를 맞는 일이 많았습니다.

카드 사기꾼은 카라바조의 출세작입니다.

카라바조 카드사기꾼, 1596

카드 사기꾼에서 사기꾼의 표정을 정말 맛깔나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사기꾼 표정 좀 보세요! 벨벳으로 칠갑한 젊은이를 머리에 깃털 단 남자 둘이서 손짓을 하며 속여먹고 있죠. 정말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삶의 현장 그대로입니다. 환상의 뽀샵질로 현실성 없는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라파엘로와 다른 점이죠. 눈에 보이는 대로 인간의 추악한 모습, 욕망, 간교한 모습을 그대로 그린 덕분에 욕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델 몬테 추기경은 이 그림에 반해 구매합니다. 게다가 카라바조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부유한 주문자들도 소개해 주었죠. 덕분에 뒷골목 부랑자에서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화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지만, 소싯적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밤마다 로마 뒷골목을 똘마니들과 헤매고 다니며 사고를 치고는 했죠. 그때마다 그를 아낀 후원자들이 나서서 해결해 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경찰 조사 기록에도 유명 화가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카라바조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막장으로 인생을 질주하던 카라바조는 결국 일을 내고 맙니다. 1606년 내기 테니스를 하다가 살인을 하고 말죠. 황급히 로마를 도망쳐 나온 카라바조에게는 현상금이 걸립니다.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도 카라바조는 그의 재능을 아꼈던 후원자들의 비호를 받으며 가는 곳마다 그림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덕분에 도망자 생활도 나름 윤택하게 보냈습니다. 인덕이 많았던 카라바조는 아버지가 집사로 일했던 콜로나 가문이 그의 어린 시절 교육부터 후원자 연결, 도주 과정의 지원 그리고 마지막 사면까지 끊임없이 그를 보살펴 줍니다. 친가족이라도 이렇게 못할 것 같은데 말이죠. 사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카라바조는 몰타로 가서 몰타기사단에 들어가는 데까지 성공합니다. 문제는 거기서도 사람을 두들겨 패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게 되고 도망자 신분도 발각이 나게 됩니다. 또다시 영원한 후견인의 아들 파브리지오 콜로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도망쳐 나오죠. 시칠리아로 간 후에 메시나, 팔레르모, 나폴리를 떠돌아다닙니다. 도망을 다니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리죠.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카라바조 1606

이 시기의 그림들은 카라바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스타일입니다. 사진을 현상할 때 콘트라스트를 높게 하면 명암대비가 극명한 사진이 나옵니다. 테네브리즘은 그림에 콘트라스트를 높여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기법입니다.

테네브리즘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입니다. 배경은 검정색으로 어둡게 칠하고 다윗의 손과 골리앗의 얼굴에 강한 조명을 비추어 대조적으로 밝게 보이게 함으로써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시선을 집중하게 하고 극적인 효과를 부각하게 시켜주죠. 마치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강렬해서 그림에서 눈을 못 떼게 만들죠.

카라바조는 사면을 위해 교황에게 이 그림을 보냅니다. 교황이 내린 형벌은 ‘누구든지 카라바조를 만나면 머리를 베도 좋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카라바조는 목이 잘리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겠죠. 이 그림은 그의 그런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를 자른 다윗도 승리의 기쁨보다 연민과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머리가 잘린 골리앗이 카라바조의 자화상입니다. ‘교황님 제 머리를 자르신다면 전 이 꼴이 되겠죠? 전 죽기 싫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뭐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그림을 보고 있으면 사면을 바라는 카라바조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참! 죄는 밉지만, 이런 천재를 죽이는 건 교황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우르비노 공작, 로렌 공작, 제노바 영주, 만투아 공작, 보르게세 추기경 등이 교황 바오로 5세 앞에서 그를 변호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중에도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의 공작, 추기경들이 발 벗고 나서서 그의 사면을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 대목이 카라바조가 당대에 어떤 위치의 화가였는지 보여주는 것이겠죠. 결국, 교황 바오로 5세는 그의 사면을 승인합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인생은 마치 할리우드 작가가 쓴 영화처럼 어이 없이 흘러갑니다. 정작 카라바조는 자신의 사면 소식을 모르고 스스로 변호할 각오로 로마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 나폴리여관에서 묵은 카라바조는 갑자기 괴한의 습격을 받고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이 망가졌습니다. 몰타기사단의 대장이 보낸 자객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행실로 적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배를 타고 로마로 가는 길에 들른 기착지에서 일그러진 얼굴 때문에 동네 폭력배로 오인을 받아서 붙잡히게 됩니다. 결국, 풀려나기는 했지만,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드릴 선물을 싣고 있는 배는 벌써 떠나버린 후였죠.  

카라바조는 사면을 위해서는 그 선물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해 육로를 따라 포르토 에르콜레 까지 배를 따라 걸어갔지만, 결국 그곳에서 어이없게 1610년 37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명성도 얼마 가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18세기에 경쾌한 색감의 로코코가 유행하면서 그의 명암법(테네브리즘)은 퇴물이 돼버렸고, 그의 행실 때문에 그림까지도 수모를 겪어야했죠.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은 카라바조가 ‘추함과 공포, 죄의 오물로 가득하다.’라고 마구 비난했죠. 단순히 잊힌 것이 아니라 300년이나 수많은 조롱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19세기 자연주의자들이 카라바조를 추앙하기 전까지는요!


 카라바조는 마지막까지 순간까지 살기 위해 신(교황?)께 매달렸지만, 이제 지구상에는 전혀 다른 요물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자본주의 요물 ‘돈’입니다. 초대교황 베드로가 신의 대리자가 되면서 교황은 막강한 권력을 얻었지만 이제 사람들은 ‘신’보다 ‘돈’을 믿고 신봉하는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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