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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e Sep 27. 2022

6.바로크의 천재들은 왜 다 잊혀졌을까?(2)

-평생 벌어서 남 줬다!-(얀 반 호이엔)

얀 반 호이엔(1596-1656)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의 피해자였던 화가를 만나볼 차례입니다.     

그의 이름은 얀 반 호이엔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경제가 부흥하면서 그림 시장도 커집니다. 이전에는 미술에 관심이 없었던 중간계층까지도 그림의 수요층이 됩니다. 수요층이 많아졌으니 화가는 부자가 됐겠구나! 생각하시기 쉽지만, 화가의 수가 훨씬 많이 늘어나는 바람에 오히려 힘들어졌습니다. 중산계층은 인문학적인 지식이 필요한 역사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성화를 금지했던 신교는 교회 벽을 하얗게 칠했던 덕분에 고가의 그림 주문도 거의 없었죠. 중간계층이 구매하는 그림은 정물화, 풍경화, 풍속화 등 장르화라고 불리는 보기 쉽고 저렴한 그림이었습니다. 박리다매가 그림에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빨리 능숙하게 그리기 위해서 화가들은 그림을 전문화해서 그리기 시작했죠. 풍경 전문화가는 풍경화 중에서도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등 하나를 특화해서 그렸습니다. 빠르게 잘 그려야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다양한 색깔의 고가의 안료를 사용했던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다르게 싸게 그리기 위해 그림의 색도 제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물론 절재를 강조했던 신교의 영향으로 단색조의 그림을 그린 것도 있었습니다.)

얀 반 호이엔의 풍경 또한 자연의 고유색을 버리고 갈색톤의 단색 화법으로 그린 것이 특징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단색조의 톤 덕분에 풍경이 더욱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가성비를 넘어 가심비까지 만족시키는 그림입니다.

                                       

강의 풍경, 얀 반 호이엔

호이엔 경우 작은 그림 가격은 10길도 정도였습니다. 1640년대 암스테르담 유산 경매에 나온 미술 작품의 평균 가격이 원화의 경우 9.3길더 정도였죠. 1650년에서 1800년까지 도시가구의 평균소득이 654길더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림만 그려서 먹고사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림 한 점에 1,000길더씩 받던 렘브란트 같은 소수의 엘리트 화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화가는 먹고살기 위해 그림 판매 이외에 다른 부업을 함께 했습니다. 가장 많이 했던 부업은 문하생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얀 반 호이엔에게도 가장 큰 수입원이었죠. 근데 어느 순간 문하생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가 황당했습니다. 바로 튤립 때문이었죠. 젊은 남자들이 꽃에 열광하며 배우던 공부까지 팽개친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1630년 독일의 30년 전쟁으로 경쟁자인 동유럽의 직물산업이 붕괴하고 스페인과의 휴전으로 네덜란드는 경제는 호황을 맞이하면서 돈이 넘쳐나기 시작했죠. 사람들은 터키에서 온 비싼 튤립으로 자신의 집 화단을 가꾸었습니다. 그러다 돌연변이로 줄무늬가 있는 특이한 튤립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 구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되자 1634년 무렵에는 튤립을 꽃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튤립이 현물거래만 이루어져 수확기에만 거래했는데 투자를 일년내내 하길 원하게 되죠.

그래서 사람들은 선물거래라는 걸 만들어 냅니다. 선물거래의 역사의 튤립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선물거래(future trading)의 원리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미래의 가격을 예측해서 현재 시점에 가격을 미리 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수확하는 4월에 그 가격에 물건을 매매하기로 약정을 하고 튤립 한 송이를 10만 원에 거래하기로 했다면, 약속된 거래 당일 튤립 가격이 10만 원보다 올라 있으면 이익을 보는 것이고 10만 원보다 떨어져 있으면 손해를 보는 것이죠. 

선물거래소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되지만, 처음에는 술집에서 거래가 마구잡이로 이루어졌습니다.

거래에는 현금이나 튤립의 구근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튤립이 구근을 수확하는 “내년 4월에 돈을 낸다”, “그때 구근을 배달한다.”라는 간단한 문구가 적힌 계약서로 끝나거나 약간의 중도금을 내기도 했죠. 중도금은 꼭 현금이 아니어도 됐습니다. 가축, 가구와 같이 돈으로 바꿀 수만 있으면 뭐든지 통용이 됐죠. 이런 거래를 계속하다 보면 채권자와 채무자가 어디의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이없는 상황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당장 돈이 없어도 누구나 거래에 참여할 수 있었죠. 이런 상황이니 얀 반 호이엔의 돈이 없는 젊은 제자들도 모두 떼돈을 벌겠다면 튤립을 거래하러 달려갔던 거죠. 지위에 상관없이 너도나도 튤립으로 한몫을 잡으려고 몰려들었고 그래봤자 꽃인 튤립의 가격은 말도 안 되게 상승했습니다.

집 한 채 값이 900길더였는데, 황제 튤립의 구근이 6,000길더에도 거래된 경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끝도 없이 오를 것 같던 튤립가격은 1637년 2월 3일 갑자기 튤립가격이 폭락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너무 가격이 오르자 호가만 있고 매수자는 없는 눈치를 보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거래가 멈췄습니다. 이런 싸한 분위기를 알지 못했던 얀 반 호이엔은 1637년 2월 2일 900길더와 그림 한 폭을 주고 튤립 구근을 삽니다. 구근의 수확시기는 4월쯤이니 선물거래를 했겠죠. 보지도 못한 튤립 한뿌리에 전 재산을 걸었던 것이지요. 황당하게도 튤립의 가격은 다음 날 바로 폭락했습니다. 주식이 폭락하면 무리한 투자로 투신하는 사람들의 뉴스가 들리고는 합니다. 하지만 호이엔은 투자 감각은 없어도 정신력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호이엔은 죽기 전까지 1,0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 그 빚을 갚았습니다.

이것이 인류역사상 최초의 버블로 유명한 튤립파동입니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얀반 호이엔의 풍경화에는 자본주의의 그늘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름을 툴립으로 바꾼 튈프교수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의 명작 중 하나이다.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튤립에 빠져있었냐면 이름을 아예 튤립으로 바꾼 사람도 있었습니다.  클라크 피테르존은 니콜라스 튈프(튤립)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tulp의 영어식 발음이 튤립이고 네덜란드어 발음이 튈프입니다. 이분은 대상포진이 ‘헤르페스’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된다는 것을 발견한 저명한 의사입니다. 암스테르담에 늦은 시간에 약을 살 수 있도록 늦게까지 약국을 운영하면서 빈민들에게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 인간적인 의사였습니다. 이런 훌륭한 사람도 이름까지 바꿀 정도니, 당시 튤립에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빠져들게 했던 인류 최초의 버블은 어느 날 갑자기 꺼졌습니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손해를 본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아픔은 개인의 몫으로 수많은 세월 동안 남았겠지만요. 세상을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은 또 흘러갔습니다. 

마치 1997년 한국이 겪었던 IMF(외환위기)가 생각납니다. 당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도 많았지만 얼마 안 가서 세상을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렸죠. 2020년 코로나가 퍼지면 세계는 이전에 없이 통화량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고 있습니다. 양적완화로 인한 유동성 장세 덕분에 주식, 주택, 비트코인까지 오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언제 다시 폭락할지도 모르지만 오르고 있는 순간에는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유명한 투자전문가 워런 버핏 한 말이 있죠.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사람들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작되면서 투자의 실패는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오롯이 개인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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