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물업자였던 베르메르의 아버지 레이니어 얀스존은 여인숙 ‘날아다니는 여우’를 경영했습니다. 베르메르가 8살 무렵에 살던 ‘메헬렌’도 여인숙이었죠. 그의 아버지 여인숙에서는 그림을 전시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베르메르는 도제 교육을 받고 성 루가 길드에 가입하여 정식화가가 되었습니다. 한 점 한 점 먼지까지 그려낸 그의 그림은 꽤 오랜 시간을 공들인 작품이죠. 빠른 제작 속도를 자랑했던 얀 반 호이엔의 풍경화와는 다른 부류의 그림이었습니다. 1657년경에 거래된 베르메르의 작품 가격은 20길더였고, 1661년에 여관 주인 코르네리스 데 헬트의 재산목록에 있던 그의 그림의 매각 가격 역시 20길더 정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663년 프랑스 그림 애호가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찾아 빵가게 주인을 찾아갔더니 600길더를 주고 샀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빵가게 주인이 집 한 채 갚을 주고 그림을 샀다는 건 아무래도 과장이겠죠. 베르메르는 성 루가 길드의 이사를 역임했다는 것을 보면 당시 델프트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지만, 그렇다고 암스테르담의 최고위급 인사들에게 그림을 팔았던 렘브란트와 같은 급의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베르메르가 그림을 배우던 초기작에는 역사화나 성화같은 종류의 그림이 있지만,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 그리던 그림 대부분 풍속화임을 가만 해보면 그의 그림의 주요 고객들은 중산계층이었을 것입니다. 따지자면 베르메르의 포지션닝은 얀 반 호이엔과 렘브란트의 중간 정도였을 겁니다.
현재 남아있는 그림이 30점 정도인 걸 보면 다작을 하는 화가도 아니었으니, 베르메르 또한 그림을 판매로만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기는 얀 반 호이엔과 마찬가지였겠죠. 게다가 아이들이 11명이나 됐으니 사는 게 빡빡했을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 베르메르는 물려받은 여인숙을 운영합니다.
17세기에는 그림 판매를 겸할 수 있는 여인숙을 운영하는 화가가 많았습니다. 튤립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1000점이 넘는 풍경화를 그렸다는 화가 얀 반 호이엔의 사위 얀 스테인 (jan steen, 1626-1679)도 여인숙을 운영했죠. 이를 배경으로 한 풍속화를 유쾌하게 그려낸 화가로 유명합니다.
얀 스텐, 세례잔치 1665년
이 당시 여인숙은 다양한 역할을 했습니다. 숙소를 제공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술을 파는 선술집도 겸하는 경우가 많았죠. 당시 풍속화를 보면 여인숙에서 했던 일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사의 진료 장소, 재판장소, 은행, 모임, 결혼식, 도박, 매춘, 음주 그리고 그림, 주식과 선물거래도 이곳에서 했죠. 이 정도면 이곳에서 하지 않은 게 뭔가 싶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던 만큼 많은 이야기와 소문에서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퍼져나갔습니다. 정치적인 이슈가 이곳에서 싹트고 피어나고는 했죠. 오피니언 리더들도 이곳을 배경으로 활동했습니다. 세상의 변화시킨 역사적인 사건 16세기 독일농민전쟁과 18세기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장소도 선술집이었습니다.
베르메르 집안이 대대로 운영했던 여인숙은 델프트는 동인도회사의 지부가 있던 곳으로 주요 고객이 동인도회사와 관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르메르의 할아버지는 동인도회사 주식에 투자했다가 기둥뿌리가 흔들릴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평생을 델프트를 떠나지 않았던 베르메르가 그린 방구석에 세계지도, 중국산 도자기, 터키산 카페트, 은화 등 17세기 동아시아로 몰려갔던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던 이유도 그들과의 만남 때문이었죠.
한국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화의 구호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화가 되면서 평범한 제가 느낀 변화는 88년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부모님이 나란히 손 붙잡고 동남아 패키지여행을 다녀오신 정도였습니다. 당시에는 세계화는 그냥 외국 자주 가고, 외국 물건도 쉽게 살 수 있게 된 걸로 생각했죠. 이것이 저의 인생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 중 나름 성공적으로 보호무역주의와 고정환율제를 바탕으로 국가 주도의 빠른 경제성장을 해온 나라였습니다. 90년대 초반 금융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지면서 금융 자유화라는 것을 실시하게 됩니다. 지금의 변동환율제의 중간쯤 되는 시장평균환율의 도입으로 제한적으로 환율이 시장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상한 건 84년도에도 환율은 1달러에 800원이었고 97년에도 여전히 800원이었죠. 저는 그동안 97년도에 IMF가 터지고 나서야 변동환율제도 바뀐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시장평균환율제라는 게 있었던 건 전혀 몰랐죠. 항상 환율이 1달러에 800원이었으니까요. 요부분이 IMF를 불러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88년도에 올림픽을 치르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1만불에 집착적으로 매달렸죠. 국민소득 1만불에 의미는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니까요. 국가적인 과업이었던 거죠. 만약 환율이 1달러에 1600원이 되면 갑자기 국민소득이 5000달러로 줄어들게 되니 국가에서 나서서 무리하게 외화를 쏟아부어서 환율을 방어했고, G7회의에서 엔저유도 합의인 역플라자 합의가 이루어 지면서, 당시까지 일본에게 경쟁우위에서 밀렸던 우리나라는 엔화가 싸지자 해외무역이 어려워졌습니다. 94년부터는 시작된 무역적자가 지속적인 적자로 돌아서면서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줄어들었죠. 원화강세를 유지하기 위해 금리도 국제금리보다 고금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들은 빠르게 부실화됐습니다.
거기다 국외 변수까지 한몫합니다. 95년 미국의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우리나라에 투자됐던 자금들이 빠르게 미국 시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던 거죠
결국 IMF가 터지면서 환율을 갑자기 2000원을 넘어섰고 금리는 20프로 까지 치솟았죠. 영업실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고금리 고환율로 인해 부채 때문에 흑자 부도를 낸 기업들도 역적 취급을 받았죠.
어린 백성들은 ‘아구구, 내가 외제 많이 쓰고, 해외여행을 많이 가서 나라가 망했구나!, 다 내 잘못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착한 국민은 구조조정도 순순히 감내하고 집에 있던 금까지 가져와 외채를 갚자고 나섰습니다.
그 이후로 고용시장 유연화라는 명목으로 비정규직이 양산됐고, 은행들은 IMF의 요구대로 BIS 자기자본 비율을 억지로 맞췄습니다. 이것이 다시 나라를 살리고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미국 같은 선진국의 자유경제가 드디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이라며, 더 잘살게 되는 길이라고 서로를 다독이며 IMF를 조기 졸업했습니다. 고용시장의 유연화라는 것이 당시에는 좋은 걸로만 알았죠. 이것이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뼈때리는 아픔을 줄지는 정말 몰랐죠. 20대 젊은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갖게 될 거라 믿었던 안정된 일자리는 경영효율화라는 명목으로 비정규직으로 채워졌고, 50대가 되기도 전에 명예퇴직 당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고용의 안정성이 보장되는 공무원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국제경쟁력을 갖춘 대기업들은 거대 공룡이 되어갔고 중소기업들의 설자리는 더 좁아졌죠. 대기업은 슈퍼, 빵집까지 차려가면서 구멍가게들의 설 자리조차 남겨주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도전하는자, 망한다!’이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됐습니다.
96년 적자이던 경상수지가 97년 이후 지금까지 한해도 빠짐없이 흑자를 기록하고 있고 우리는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경쟁력 있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에서 사는 착한 국민은 IMF 이전보다 살기 힘들다고 느낀다는 겁니다.
17세기 베르메르에게도 저와 같은 일이 이어났습니다. 처음 동인도회사 사람들이 동아시아 무역을 시작했을 때 베르메르의 삶은 변화는 소소한 것들이었죠.
베르메르, 열린 창가에서 편지 읽는 소녀 1657년
1657년 그린 열린 창가에서 편지 읽는 소녀의 그림을 보면 터키에서 온 귀한 카펫은 바닥에 아니라 탁자에 깔아두고 그 위에 중국에서 온 접시에 과일을 담아 두었습니다. 이 실내와 모델이 베르메르에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베르메르가 자기 집에서 부인 카타리나 볼네스를 그린 것일 겁니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보면 그가 몇 점의 중국 도자기를 더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처음 동인도회사에서 들여오는 중국의 도자기는 너무 비싸서 일반인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었지만, 10년도 지나지 않아 중산계층의 사람들도 몇 개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흔해졌습니다. 이 당시 동인도회사의 무역을 보며 베르메르가 느낀 변화도 딱 이 정도이었겠죠. 외국물건이 싸졌네! 하지만, 바깥세상의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훨씬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저울을 든 여인
저울을 든 여인에서는 베르메르의 부인이 동전의 무게를 재고 있습니다. 당시 사용되던 은화는 사용하다 보면 닳아서 번거롭지만, 거래할 때마다 은의 무게를 재서 사용했죠. 이 시절 동전의 무게를 재는 것은 알뜰한 주부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거래는 은화로 했는데, 이 은은 바로 카를 5세의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 지금의 볼리비아의 포토시에서 온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근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베르메르는 선술집을 운영하며 세상사에 밝았으니 이 소식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 많던 포토시의 은이 17세기가 되면서 급격히 채굴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요.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니 스페인에 국운이 기우는 것에 고소하다 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은 스페인의 은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나라들이었습니다. 이 나라들은 시략선을 운행했는데 국가에서 승인한 해적선으로 해군이 타고 있었죠. 이 시략선의 주요 약탈 대상은 바로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서 싣고 오는 은이었습니다. 베르메르의 부인이 재고 있던 은은 남아메리카에서 왔을 확률이 높죠.
네덜란드와 영국은 스페인에서 은화를 훔치고 중국에서 도자기와 비단을 사다가 스페인에 중개무역을 해서 또 스페인의 은화를 벌어들였죠. 이 은이 떨어져 가고 있을 때쯤 영국과 네덜란드는 동아시아에서 무역전쟁을 한판 합니다. 1623년 암보니아 사건으로 네덜란드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밀어내고 동아시아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죠.
영국은 크롬웰이 찰스 1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자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하고 해상에서 한판 붙습니다. 이것이 1차 영란전쟁입니다. 바로 요 전쟁 때문에 네덜란드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렘브란트가 파산하게 됐다는 전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 2차 영란전쟁은 해상에서만 일어났기 때문에 해상무역에는 타격이 있었지만, 일반인들의 삶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복병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 있습니다. 영란전쟁 중에 영국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한 프랑스는 은근히 네덜란드를 지원해 줬죠. 그 덕분에 2차 영란전쟁은 나름 네덜란드가 유리하게 끝납니다. 그런데 네덜란드가 잘나가니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네덜란드가 더 꼴 보기 싫어집니다. 그래서 영국-스페인과 밀약을 맺고 네덜란드를 침공합니다. 이번에는 해상이 아니고 육로를 따라서 침공해오죠. 인구수로 보나 뭐로 보나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네덜란드의 독립을 이끌었던 오라녜 가문의 빌럼 3세가 총독으로 즉위해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수문을 열고 끝까지 싸운 덕분에 네덜란드를 지켜냈습니다.
나라는 구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어김없이 평범한 베르메르의 인생도 바뀌어 놓았습니다.
얀 스텐의 그림의 주제가 여인숙의 시민들이 벌이는 소소한 일들을 왁자지껄 흥겹게 그렸다면, 베르메르의 그림은 가정집의 실내의 평범한 일상을 음소거로 설정해 놓은 듯 조용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얀 스텐의 그림보다 왠지 부유해 보입니다. 이런 배경에는 그의 결혼이 한몫했죠. 베르메르는 렘브란트만은 아니지만, 나름 있는 여자한테 장가가 장모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장모의 말발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결혼을 하고 8년이 지나서야 결혼 허락을 받았죠. 장모는 나름 명문가의 딸로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을 하긴 했지만, 그녀는 요즘 말로 건물주였죠. 부업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 생각에는 고리대금업이라고 하면 일수 아줌마를 떠올리지만, 당시 상류층이었던 레헌트계급의 60% 이상이 고리대금업을 했습니다. 고리대금업은 부잣집 사모님의 품위 있는 금융 생활이었던 거죠.
신교의 청빈 정신으로 무장한 나라 네덜란드에서 처음부터 고리대금업과 임대업이 부유층에게 널리 퍼졌던 건 아니었습니다. 1650년대 영란전쟁이 터지면서 도버해협의 긴장에 중개무역은 위험이 커졌고, 네덜란드 국내 경기도 침체를 겪게 되죠. 사람들은 무역에 투자해 손해를 보는 것보다 안정적인 자산에 투자했죠. 그것이 바로 부동산업과 고리대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정적인 공직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갑니다. 누구나 돈을 벌고 지위가 올라가면 공직에 오를 수 있었던 열린사회는 막을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돈을 벌어 공직에 오른 신흥 부자를 레헌트라고 불렀지만, 이젠 레헌트는 신흥귀족이 되어 공직을 독점합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렘브란트를 비난했던 튈프교수 같이 청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교외에 대저택을 짓고 비싼 이탈리아 고전주의 그림을 수입해서 집을 장식 했죠. 마음껏 돈 자랑을 하고,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세상으로 네덜란드를 바꾼 건 영란전쟁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IMF와 같은 모양새입니다. 결국 노동이나 사업을 통한 부의 창출은 어려워지고 있는 사람만 돈을 벌 수 있는 세상, 부의 양극화가 시작됩니다.
그림도 이런 흐름을 따갑니다. 1650년대부터 레헌트들은 비싸고 귀족적인 이탈리아의 고전주의 그림을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네덜란드의 풍속화들도 고전주의 양식을 받아들이게 되죠. 귀도 레니가 그린 고전주의 그림을 보시면 왜 제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누더기처럼 보였다고 표현했는지 이해가 될 겁니다.
귀도 레니.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1619-20년
그림의 윤곽은 매끄러우며 색감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순색에 인물들은 세상에 없는 선남선녀입니다. 한마디로 눈이 호강하는 그림들이었죠. 레헌트들은 이런 그림을 이탈리아에서 사 왔지만,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돈이 있다고 이런 그림들을 다 살 수는 없었습니다. 볼 줄 알아야 사는 그림이죠. 이 그림은 그냥 잘생긴 남자가 예쁜 여자한테 구애하는 그림이 아닙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아리아드네는 남자 때문에 조국와 민족은 배신한 여인이죠.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남자 테세우스는 낙소스섬에 그녀를 버리고 갑니다. 버림받아 울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술의 신 바쿠스가 그녀를 위로하고 둘은 결혼을 해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이 그림 안에 숨겨진 알레고리죠. 이탈리아의 그림은 그리스·로마 신화, 성경, 역사 등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나 교훈이 있습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문화였죠.
교양은 없어도 유행은 따르고 보는 게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고전주의의 색감과 그림 스타일 그리고, 나름의 알레고리가 네덜란드의 방식으로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5년
베르메르도 이런 흐름에 맞추어서 풍속화를 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립니다. 주제는 풍속화지만 그림 고전주의 스타일로 매끈한 윤곽 처리, 화려한 생감, 거기다 베르메르만의 빛을 다루는 능력까지 더해져 눈을 떨 수 없는 명작이 완성됩니다.
베르메르는 고전주의 회화에서 성인이나 높은 사람에게만 쓰였던 귀한 청금석으로 만든 파란색을 우유 따르는 여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처럼 평범한 인물들에게 사용하죠. 시민들의 나라였던 네덜란드의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죠.
전쟁 후에 바뀐 건 그림만이 아니었습니다. 1672년 시작된 3차 영란전쟁은 베르메르의 일상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전쟁으로 네덜란드 곳곳이 황폐해졌으니, 베르메르 장모님이 하시던 고리대금업에도 빨간불이 켜집니다. 당연히 이자가 제때 들어오지 않았죠. 처음 결혼 당시 장모는 그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오히려 나중에는 자식들보다 베르메르를 더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장모와 함께 살며 그녀의 재산관리를 도왔죠. 전쟁 때문에 집안이 망하게 생겼으니 베르메르는 장모님의 돈을 받기 위해 델프트를 떠나 암스테르담을 여러 차례 여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 후에 이자 받기가 쉬웠겠습니까? 갑자기 가세가 기울게 되고 11명의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스트레스 이기지 못하고 43살에 아까운 나이에 숨을 거둡니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빚 때문에 여기저기로 팔려갔고, 그의 이름은 200년간 잊혀졌죠. 19세기초 미술사학자 토레 뷔르거에 의해 재발견 되어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의 하나가 됐죠. 살아 생전에는 세계화가 베르메르에 발목을 잡았다면 사후에는 오히려 세계화의 덕을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