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휴전한 1609년부터 영란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652년까지의 기간을 네덜란드의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부릅니다.
네덜란드는 해상무역을 장악했고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최고의 항구가 됐죠. 네덜란드에는 돈이 넘쳐났지만, 돈 자랑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교도(칼뱅교)에겐 검소함이 미덕이었으니까요.게다가 행세 꽤나 한다는 사람들은 검정색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검은 옷의 유래는 15세기에 이 지역을 다스리던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3세가 몽트로 다리에서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기 위해서 검은 상복을 입은 것에서 시작됐죠. 그 후 이 지역을 다스린 스페인의 카를 5세가 왕비가 죽자 평생 검은 상복만 있더니 아들인 펠리페 2세가 즉위하면서 검정 옷은 아예 권세 있는 사람들의 공식적인 옷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펠리페 2세와 종교적인 노선은 달랐지만, 검은 옷 사랑만은 통했죠. 금욕을 강조했던 칼뱅이 평생 입은 옷이 바로 검정이었으니 말입니다.
말만 황금시대이지 이 시대의 네덜란드 초상화를 보면 주로 검정색을 입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멋쟁이는 검정이라지만 줄줄이 검정 옷만 입은 사람들 가운데 나만 돋보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채울 수 있었을까요? 이런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사람들의 욕구를 잘 만족시켜 명성을 얻은 화가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천재 렘브란트였습니다.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1631
1631년 렘브란트의 출세작인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입니다. 맞습니다. 튈프(튤립)로 개명하신 그 의사 선생님이십니다.
17세기 당시 칼뱅교 신도 모두 검은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색은 보기와는 달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검은 옷은 물이 쉽게 빠져 관리가 어려웠고 당시에는 검은 염료의 가격도 비싸 고위층이나 공식적인 행사에나 입을 수 있었죠. 이 공식적인 행사에는 초상화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튈프교수의 해부학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도 모두 검정색 옷을 입고 왔던 거죠. 빳빳한 풀을 먹인 하야디 하얀 칼라로 목에다 한껏 힘을 줬습니다. 포인트를 줄 수 있는 부분이 칼라와 커프스 정도 밖에는 없었으니까요. 자세히 보면 다 같은 칼라가 아닙니다. 가위를 들고 시체를 해부하고 있는 튈프 교수는 당시 최신유행이던 플랫칼라를 입고 지성미를 풍기고 계십니다. 그림값을 가장 많이 낸 사람이 바로 튈프교수였으니까요. 그 옆에 종이를 들고 화면 밖을 응시하시는 분은 유행이 조금 지난 러프칼라 의상을 입고 계시네요. 나머지 분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스탠딩 칼라를 입고 있습니다. 정확한 가격은 모르지만, 화면의 배치에 따라서 지불한 그림 값도 달랐습니다.
사회 분위기상 옷의 소재로 검소한 모직이나 린넨이 선호되었지만 특별한 자리니만큼 실크로 만든 새틴과 벨벳 소재의 옷이 보이네요. 화려한 색상의 사용이 어려운 만큼 실크, 모피, 금속장식의 고가의 검정 옷감의 질감을 잘 살려 줌으로써 인물을 부티 나게 해 주는 것이 초창기 렘브란트를 성공으로 이끈 재능이었습니다. 카라바조가 사용한 테네브리즘 기법의 격렬한 명암대조를 사용해서 마치 어두운 무대에서 조명이라도 비춘 듯 돈을 많이 낸 사람 위주로 인물과 사건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도록 만들었죠. 이 시기 그림은 윤곽이 후기에 비해 뚜렷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그림의 성공으로 렘브란트에게는 주문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1640년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와의 결혼으로 혼테크까지 성공하죠. 그녀는 시장까지 지낸 명문가의 딸이었습니다. 제분소 아들인 렘브란트와는 신분이 달랐죠. 렘브란트의 아버지는 1566년 캘빈파로 개종했지만 외가는 여전히 가톨릭을 믿고 있었습니다. 신분과 종교가 다른 사람과의 결혼도 가능했던 게 바로 황금시대였습니다. (중계무역 국가의 특성상 구교, 신교뿐 아니라 유대교 등 다른 종교에도 관용적인 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쿵짝도 잘 맞아서 이것저것 사들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주변사람들이 낭비벽이 심하다고 걱정을 할 정도였죠. 아까 말씀드린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소품을 주로 샀는데 갑옷, 투구 등 금속장식과 모피 등과 골동품 같은 것이었죠. 원하는 것이라면 값을 따지지 않고 사들였습니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이 소품들을 입은 특이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런 초상화를 트로니라고 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코스튬 플레이를 즐겼던 거죠. 검소함이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상 일상적인 모습으로는 본인을 뽐낼 수 없던 사람들도 이런 색다른 분위기의 초상화를 주문하곤 했죠. 당시 이런 골동품과 그림의 거래가 활발해서 재테크까지 겸해서 수집한 것입니다. 꽤 많은 그림과 판화도 수집했죠. 즐기기도 하고 그림 의뢰도 받고 재테크도 할 수 있었으니 나름 계산된 투자였던 겁니다.
렘브란트 깃달린 모자를 쓴 남자 1635년-40년
(트로니: 특이한 의상을 입은 상반신의 초상화)
문제는 투자의 포트폴리오가 너무 사치품에 치우쳐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고가품들은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마련이죠. 1652년 영국이 네덜란드와 해상전인 영란전쟁으로 네덜란드의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렘브란트의 인생도 무너지기 시작하죠.
50살인 1656년 1차 영란전쟁이 끝난 지 2년 뒤에 결국 파산신청을 하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비극의 시작은 33살에 과도한 대출을 받아 구매한 집 때문이었습니다.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 집을 시세보다 훨씬 비싼 13,000길더를 주고 구매했죠. 당시 네덜란드 화가 중에 이렇게 비싼 집에 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간척지에 지어져 지반이 가라앉는 문제까지 있어 나중에 경매에 넘어갈 때도 제값을 받지 못했죠. 7년 할부로 집을 구매했는데 7년 동안 겨우 6,000길더를 갚았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빚 독촉을 하는 매도인의 성화에 초상화 모델로 나오는 얀식스, 코르넬리스 비첸 (전 암스테르담 시장) 등에게 총 9,380길더를 빌렸습니다. 결혼 8년 만인 1642년 아들 티투스를 낳고 사망한 사스키아는 유산을 40,000길더나 남겼습니다. 만약 렘브란트가 재혼을 하게 되면 유산의 절반을 아들 티투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죠.
말년이 불행했던 렘브란트가 외면받았던 이유는 널리 알려진 이유인 야경의 실패보다는 부도덕한 그의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빚을 지고 집을 샀다고는 하지만 그는 야경의 그림 값으로 1600길더나 받는 돈 잘 버는 화가였습니다. 당시 고급 초상화 가격이 60길더 정도였다니 렘브란트는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것만은 분명했죠. 문제는 그 돈을 빚 갚는 데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수집품을 사는데 써버렸다는 것이죠. (이런 사치성 수집품은 네덜란드 경기가 하락하면서 제값은 받지 못해 파산할 때 그를 더욱 어렵게 했죠) 거기다 마지막에는 집을 잃지 않기 위해 아들에게 집을 넘기는 꼼수까지 부립니다. 집과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에게 고아 선언을 하게 해서 부모의 재산을 포기하도록 하는 요즘으로 따지만 유산포기 각서를 쓰도록 했죠. 그의 부도덕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린 티투스를 돌보기 위해 유모로 들어온 헤르크헤와 정부 관계를 맺은 것도 모자라 그 관계를 끝내지도 않고 입주하녀인 헨드리키와 새로운 관계를 맺었죠. 화가 난 헤르크헤가 결혼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그를 고발했고 법원은 렘브란트에게 매년 200길더를 연금으로 주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이마져도 지키지 않고 헤르크헤의 오빠를 매수해서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막장 오브 더 막장의 면모를 보입니다. 결국 그는 헨드리키와 딸 코르넬리아를 낳습니다. 사람들이 혼외자를 낳은 그들을 관계를 비난하며 그녀를 법원으로 불러낼 때도 그는 사스키아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그녀와의 재혼을 선택하는 대신 한발 물러서 있는 비겁한 남자였습니다.
그의 주요 후원자 중의 한 명이었던 얀 식스의 장인이 바로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의 주인공 튈프 교수였습니다. 튈프 교수는 렘브란트의 부도덕함 탓하며 얀 식스의 후원을 반대합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엄격한 신앙과 도덕성이 중시되는 사회였기에 렘브란트의 이런 일탈은 용인될 수 없었습니다.
렘브란트, 1654년 얀식스의 초상
두 번째 이유는 미술 트렌드의 변화였습니다. 후기로 갈수록 그의 그림은 거칠어졌고 그 안에는 외형보다는 인물의 내면을 담았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얀식스의 초상화입니다. 빨간망토 앞자락에 노란색으로 두텁게 쓱쓱 칠한 부분이 보이실 겁니다. 유화물감을 두텁게 칠해 질감을 강조한 이런 회화기법을 임파스토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렘브란트의 이런 거친 회화기법은 1650년대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죠. 하지만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영란전쟁으로 네덜란드의 경제가 조금씩 기울어가면서 중산층이 무너지고 부는 양극화되었습니다. 건전한 중산계층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푸줏간에도 그림을 걸었다는 네덜란드의 저변이 넓었던 미술시장은 무너지고 말았죠.
예로부터 저지대 지역이었던 네덜란드는 귀족들이 세력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시민들도 상업으로 부를 쌓으면 관직에도 오를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이들은 차츰 기득권이 되어갑니다. 이들을 레헌트라고 부릅니다.
성화 시장이 4프로 밖에 되지 않아 렘브란트는 성화를 배경으로 한 역사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을 주문하려면 성경과 인문학적 지식이 있고 고가의 그림값을 감당할 수 있어야 했죠. 이런 그림의 주문자는 레헌트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1650년 이후 레헌트들은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고전주의 그림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친 렘브란트의 그림은 주문이 끊기게 됩니다.
(장르화를 위주로 그린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과 다르게 렘브란트의 그림에 역사화가 많은 이유는 그가 최고위층의 고객을 가진 최고의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은 그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아들 티투스와 헨드리케가 운영하는 화상에 렘브란트를 점원으로 채용하여 그가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줬죠. 1663년 헨드리케가 사망하고 1668년 아들 티투스의 마저 27살에 사망하면서 렘브란트의 말년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끝없는 나락에 빠졌죠. 결국 그는 아들이 죽은 다음 해에 숨을 거둡니다.
이 시기 렘브란트는 역사화를 주력해서 그립니다. 주문자가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 많았죠. 이런 현실이 경제적으로는 렘브란트를 힘들게 했지만. 그의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후기의 그의 작품의 더 깊이 내면속으로 파고들어 갑니다. 말년에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한편 자서전 같다는 평을 듣습니다. 우린 초상화를 통해 직접 인물을 만난 것 같은 감흥을 주었던 티치아노 그림을 보았습니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마치 한 인물의 아카이브(특정 장르에 속하는 정보를 모아 둔 정보창고) 전시회를 보듯이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느껴질 만큼 깊이가 느껴집니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1661년-69년
그의 말년이 작품 돌아온 탕자입니다. 누가복음의 나온 유명한 비유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고 비루한 꼴이 되어 아버지의 종이 되겠노라며 돌아와서 용서를 빌죠.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살아있으니 됐다며 따듯한 손길로 받아들입니다. 대학 시절 이 그림을 봤을 때 알 수 없는 먹먹함을 느꼈습니다. 첫눈에는 그림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거칠어 투박하게만 보였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덕지덕지 누더기 같아 호감이 가지 않았죠. 근데 렘브란트의 인생을 알게 되면서 그가 이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을 회개와 참외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말년의 그의 이런 그림들은 퇴물 취급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비루한 겉모습이 보는 이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덕분에 그의 후기 그림들은 그를 역사상 최고 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바니타스 (인생무상) 그 자체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히 빛나게 되었습니다. 렘브란트의 불우한 일생이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는 아이러니가 인생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