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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e Oct 14. 2022

8.파티에 초대 받지 못한 사람들

로코코와 진짜를 향한 가짜들의 열망,  법복귀족들

앙투안 와토 (1684-1721

앙투안 와토(1684-1721)


-가짜가 더 빛난다-     

루이 14세 하면 베르샤유 궁전 아니겠습니까? 화려한 궁전에서 귀족들이 드레스를 입고 정원 여기저기서 큰일을 봤다는 게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하수도 시설이 없어 변변한 화장실이 없었으니 개인용변기를 가지고 오거나없으면 그냥 해결했던거죠루이 15세 때가 돼서야 수세식 화장실이 도입되었습니다.) 당시 귀족들도 사연이 있습니다. 

루이 14세는 5살에 왕위에 올라 프롱드의 난을 겪으며 안위를 위협받은 경험이 있는 데다 영국에서는 조카사위인 찰스 1세가 처형당하는 일까지 있었으니, 귀족들이 뒤에서 딴 짓을 못 하도록 파리 외곽에 베르샤유 궁전을 지어서 귀족들을 몽땅 볼모로 잡고 함께 산 것입니다. 귀족들은 매년 일정 기간을 베르사유에 있어야 했죠. 귀족들도 집에 가서 편히 용변을 해결하고 싶었는데 안 보내줘서 못 갔던 겁니다.      

베르샤유의 궁에 있는 2000개의 방은 공짜도 아니고 방세까지 내야 했습니다. 귀족들이 모여서 딴생각을 못 하도록 궁전에서는 매일 매일 음악과 연극 공연에 파티의 연속이었죠. 귀족들이 파티에 나가는데 매일 같은 옷을 입을 수는 없겠죠. 귀족들은 화장과 가발, 의상에 돈을 쏟아 붓느라고 가난해져서 더 힘이 없어졌죠.     

이건 처음부터 왕의 계략이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전국에서 장인들을 불러 모아 사치품을 귀족에게 공급하게 했죠. 당시 재상이었던 콜베르는 상업을 장려하기 위해 리옹의 견직물 산업을 육성하며 패션산업에 매진했습니다. 귀족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멋진 옷들을 국가 주도의 철저한 관리 시스템으로 만들어냈죠. 귀족들의 소비생활을 전략적으로 조장해서 부를 창출해낸, 프랑스식 중상주의 정책을 콜베르티즘이라고 한답니다. 

 한마디로 왕이 귀족들에게 과소비를 부추겨서 귀족들은 가난해지고 상업은 번성해서 세금은 늘어나는 일타쌍피의 정책이었죠. 


그렇게 만들어진 파리의 화려한 궁정문화는 전 유럽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패션 하면 파리라는 공식이 이때 생겨났습니다.      

콜베르의 중상주의와 더불어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상인들이 사회의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합니다. 

신흥귀족인 ‘부르주아’를 위해서 귀족들이 쓰는 맞춤 제작 사치품보다는 약간 값이 싸고 대중적인 물건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명품브랜드의 시작입니다. 귀족은 아니지만, 평민과 다르다는 걸 뽐내고 싶었던 부르주아에겐 명품이 딱 맞춤이었죠. 

“프랑스 패션은 스페인의 페루 금광에 버금가는 프랑스의 자산이다.”라는 콜베르의 말은 너무도 옳았습니다. 금광이야 다 파 쓰고 없어졌지만, 프랑스의 명품산업은 현재까지 번성해서 샤넬 백 가격이 오른다고 하면 한국에서도 새벽부터 줄을 서는 풍경을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현재 프랑스 명품조합의 이름이 코미테 콜베르(콜베르 위원회)입니다. 한 국가가 수백 년 먹고살 수 있는 산업을 창조해 내신 공로는 당연히 길이길이 칭찬해 드리는 것이 맞지요.     

‘짐이 곧 국가다’라며 세상을 호령했던 절대왕정의 태양왕 루이 14세도 사람인지라 결국 죽습니다. 

장 앙투안 와토 , 제르생의 상점 간판 1720년
제르생의 상점 간판 세부

와토가 그린 제르생의 상점 간판 그림의 한 부분입니다.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상자에 담기고 있죠. 사실 70년 넘게 태양왕으로 군림했던 늙은 왕에게 사람들은 질려있었습니다. 말년에는 전쟁에 줄줄이 져서 남긴 건 빚밖에 없었죠. 죽자마자 루이 14세의 흔적은 빠르게 지워져 갔습니다. 귀족들은 파리로 돌아왔고 베르샤유 궁전처럼 자신들의 성을 화려하게 꾸몄죠. 바야흐로 바로크의 시대가 가고 로코코의 시대가 왔습니다.      

 장중하고 근엄했던 바로크와 달리 로코코는 화려하고, 세련됐죠. 이 로코코 문화를 지지한 세력은 귀족문화를 동경한 법복귀족이었죠. 

부르주아 중에서 더 성공한 사람들을 상층 부르주아를 법복귀족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법관이나 공무원들의 관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로 관직은 원래 세습이 되지 않는 것이지만, 돈을 내면 자식들에게 관직을 물려줄 수 있었죠. (매관매직이 너무 흔한 일이었거든요.) 돈으로 귀족화된 사람들이죠. 법복귀족은 돈은 있었지만, 혈통에서 밀렸기 때문에 기존의 귀족들에게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죠. 

법복귀족은 정치에 참여할 수도, 베르샤유 궁전의 파티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혈통은 바꿀 수가 없으니 겉모습이라도 더 귀족처럼 보이고자 했죠. 원래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려고 더 애쓰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화려한 옷, 절도 있는 예절, 우아한 춤에 더 집착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배운 문화가 아니었으니 몸에 배지 않아 마치 연극을 하는 것같이 우스꽝스러웠죠.      

이 법복귀족이 바로 와토의 주요 고객들이었죠. 그림에 나오는 손님들도 법복귀족입니다. 분홍 옷을 입은 여자와 손을 잡아 에스코트해 주는 남자의 모습도 춤이라도 추는 듯 어색하고 과장됩니다.     

진짜가 되고 싶은 가짜 귀족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로코코는 너무도 잘 어울렸습니다.     

로코코는 티내는 패션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화려하고 예쁜 것, 빛나는 것을 있는데로 치렁치렁 달았죠. 이 시대의 패션리더는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 부인이었습니다. 그녀 또한 부르주아 출신이었습니다.

프랑스와 부셰, 마담 퐁파두르 1758년

                           

부셰의 그림 속 퐁파두르 부인은 시원하게 드러낸 가슴 코르셋으로 꽉 조인 잘록한 허리, 한없이 부풀려진 치마 그리고 와토의 그림에 자주 등장해서 와토 가운이라고 불린 로브 아 라 프랑세즈(Robe A' la franciase)를 입고 있습니다. 드레스는 레이스, 꽃, 리본으로 장식했죠. 당시 패션은 속보다는 겉에 집중했죠. 속옷은 대충 정련 안 된 면을 입고 그 위에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조였죠. 코르셋을 조이기 위해서는 하녀의 손이 필요했고 허리를 무지막지하게 조이고 나면 구부리기는커녕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으니 이런 옷을 입는다는 자체가 ‘일 안하고 놀고먹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거였죠. 요즘으로 시선으로 보면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싶지만, 고귀한 신분의 증명처럼 여겨져 사람들이 오히려 동경했답니다.

겉으로는 그녀의 출신을 깔봤지만, 당시 유럽 왕실과 귀족들은 세련된 퐁파두르의 패션을 따라 하기 위해 안달이었죠. 

특히, 퐁파두르 부인의 올백 헤어스타일은 퐁파두르 헤어가 되고 그녀가 좋아했던 분홍색은 퐁파두르 로즈, 요즘 여자들이 신는 하이힐의 원조가 바로 퐁파두르 슈즈입니다. 말 그대로 로코코패션의 아이콘이였죠.     

가짜이야기라면 마담 퐁파두르처럼 딱 맞는 사람도 없습니다. 퐁파두르의 원래 이름은 ‘잔’이었습니다. 황당하게 점술사 마담 르봉이 ‘왕을 다스리는 여인이 된다.’라는 예언을 하면서 왕의 여자 되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일단 왕을 만나려면 사교계를 나가려면 귀족이 되어야 했죠. 퐁파두르의 엄마가 바람을 하도 피워서 정확한 아버지는 모르지만, 아마 아버지 일지도 모르는 ‘샤를 드 투르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녀의 귀족수업을 지원하고, 에티올 영지까지 사서 결혼을 시켜 에티올 부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인물은 타고 났던 잔은 속성 귀족교육까지 완벽하게 이수했던 덕분에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치죠. 왕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가면무도회에서 루이 15세의 눈에 드는 것에 성공한 에티올 부인은 이제 왕의 애첩이 되기 준비에 돌입합니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후작령을 사서 그녀를 마담 퐁파두르로 만들어 줬죠. 베르샤유궁 입성에도 성공했습니다.     

보이는 아름다움이야 금방 시들기 마련이죠. 실제로 몸이 약했던 그녀가 루이 15세의 잠자리 파트너로 보낸 세월은 5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죠. 부르주아 출신으로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던 그녀가 왕의 여자로 죽을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왕이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죠. 어릴 때부터 혼자 자라서 외로움을 잘 타는 루이 15세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가 지루해하면 노래와 피아노 연주해 분위기를 띄우고, 왕이 좋아하는 연극 무대와 공연을 기획하고, 거기다 왕의 잠자리 파트너 선정까지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죠.

부끄러움을 타는 왕을 대신해 사람을 만나는 비서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왕의 책사가 되어 프랑스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여자가 되었답니다. 7년 전쟁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오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죠.

퐁파두르 부인은 매우 지적인 여성으로 3500권의 책을 집필했고 그녀가 운영하는 살롱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습니다. 디드로의 백과사전 편찬을 지원했고 계몽주의자들을 후원해 프랑스 혁명의 원인 제공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죠. 그녀가 세운 왕립 군사학교 출신 중에는 나폴레옹도 있습니다. 루이 15세의 궁정화가 부셰는 퐁파두르 부인의 총애를 받으면서 미술에도 로코코 양식을 정립됐죠. 예술에 후원하느라 죽을 때 남긴 재산이 별로 없을 정도였죠. 로코코를 퐁파두르 양식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 시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상을 호령하는 여자가 됐지만, 퐁파두르 부인은 정적들이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음식도 하녀와 따로 해먹었죠. 먹기 싫은 음식도 왕과 함께라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야 했고 그러고도 날씬해야 했으니 새벽 부터 승마를 해서 살을 빼야 했죠. 전남편과 낳은 9살 딸이 죽었을 때도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예쁘게 차려입고 웃는 그녀를 보고 주위 사람은 오히려 측은하게 여길 정도였죠.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얼굴에 뽀얀 분칠을 하고 머리엔 치렁치렁한 가발을 쓰고 화려한 옷으로 꾸몄던 로코코 시대는 아름다웠지만, 감추어야 할 것이 많아 필요 이상으로 반짝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티에 초대 받지 못한 사람들-     

루이 14세는 정치는 꽝이었는지 몰라도 귀족들을 안달 나게 하는 심리전에는 달인이었습니다. 루이 14세가 여는 화려한 파티에는 왕의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만 입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별거 아닌 것도 남은 받는데 나는 못 받으면 서운한 것이 사람 심리 아니겠습니까? 귀족들은 파티의 초대장을 받기 위해 뭐든 했습니다. 왕과 가까워지기 위해 왕의 변기를 들고 있기, 큰일 보신 뒷일 처리해 드리기가 인기 있는 직무였을 정도였으니까요.      

루이 14세의 이 파티의 이름이 페트 갈랑트(Pete galante)입니다.     

와토의 주요 고객은 법복귀족이었죠. 법복귀족은 이 페트 갈랑트에 초대받을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가보면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못 간다고 하니 얼마나 가고 싶었겠습니까?

가장 여성적인 시대인 로코코에 예쁘게 차려입은 여인이 꾸는 꿈은 뭘까요? 신데렐라처럼 멋진 왕자님을 만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로코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근데 왕자님의 초대장이 없으니 어쩔까요? 


귀족보다는 대중적이었던 부르주아는 답답한 현실이 좀 해결이 안 된다 싶으면 ‘꿈’이라는 판타지를 동원했습니다. 와토는 전원생활에 로망을 가지고 있던 당시 사람들의 이상향을 배경으로 그들만의 파티를 그렸습니다. 

궁전에는 못 가더라도 상상 속에서 파티를 즐기는 것은 자유니까요.      

와토가 그린 그림의 제목은 키테라섬으로의 순례입니다. 


와토는 1712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자격을 얻습니다. 입회심사를 위해서 작품이 필요했죠. 1717년 루이 14세가 죽은 지 2년 후에서야 키테라섬으로의 순례라는 이 그림을 제출합니다.

이 그림을 통해 와토는 파티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갈망을 채워줍니다. 전원에서 열리는 귀족들의 파티를 비너스의 고향인 키테라 섬으로 살짝 옮겨 놓습니다. 

희곡작가 당쿠르가 쓴 [세 사촌들]에 나오는 “비너스가 사는 그 섬에 가서 신랑감을 얻어오자”라는 대사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전원의 연회에서 멋지게 차려입은 남녀가 짝을 만나죠. 열렬한 사랑만이 목적인 시대에 너무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죠. 사실 귀족들의 파티의 주된 목적도 사랑의 대상을 찾거나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었죠. 

그림의 왼쪽 이미 짝을 이룬 남녀들이 배를 타고 떠날 준비를 합니다. 아직 짝을 이루지 못한 오른쪽의 연인들은 한참 사랑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 섬이 키테라 섬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완벽한 사랑을 의미하는 헤르마프로디테의 조각이 있습니다.

왕립 아카데미 입회작은 역사화나 신화를 그리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이 사랑이 넘치는 그림이 시대의 정서에 맞았기 때문이었는지 페트 갈랑트라고 칭하며 새로운 장르로 인정해 줬고 와토는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됩니다.      

와토가 그린 우아한 연회에서 남녀가 만나서 콩닥콩닥하는 내용을, 글로 쓰면 어떤 내용일지 우리는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까칠한 왕자님은 이상하게 별로 대단하지 않은 여주인공에게만 딱 꽂혀서 여주인공이 미워하든 말든 그녀만 열렬히 사랑하고, 여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을 거만하다고 미워하죠. 결국 여주인공이 왕자님의 진심을 알고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그라들든 말든 로맨스의 정석 아니겠습니까?      

와토가 페트 갈랑트의 창시자라면 제인 오스틴은 로맨틱 소설의 창시자십니다.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몽상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까칠한 부잣집 도련님 달시는 귀족처럼 나오지만 실은 젠트리계층입니다. 18세기에 영국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저택을 지어두고 이탈리아에서 그랜드 투어를 하며 사 온 듯한 거의 짝퉁인 것이 분명한 로마 조각들을 쭉 전시해 두고 집을 개방합니다. 엘리자베스는 달시의 집을 방문했다가 입이 떡 벌어지지만, 그딴 건 별거 아니라는 듯 행동합니다. 가난한 목사집 딸인 엘리자베스는 사랑이 결혼에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믿는 여자죠. 어찌 하늘은 그녀한테만 모든 걸 주시는 건지 까칠한 달시에게 기 한번 안 죽으며 자존심을 세우는 엘리자베스를 달시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만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믿는 그녀 또한 달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나 떡이다.’라는 식으로 여자 주인공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남자의 외모와 돈은 그냥 부록처럼 따라 옵니다. 중요한 건 사랑이지 돈이 아니다. 이게 주요 줄거린데 이유는 모르지만 이런 로맨스 소설은 항상 남자는 돈이 많고 잘생기고, 여자는 뭣도 없으면서 자신만만하다는 겁니다. 실제 현실에는 없는 이야기니 이런 로맨스 소설에 여자들이 열광했겠죠.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있는 집 남녀의 결혼은 조건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상류층들의 결혼에서 사랑은 없으면 아쉽지만 있으면 좋은 별책부록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혼한 후에 서로 맘에 드는 짝을 찾아서 바람피우는 것을 서로 용인하면서 사는 경우도 많았죠. 

진정한 사랑은 그 시절 이루지 못할 꿈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간절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명문가의 딸들이 여왕님을 알현하고 상류사회에 본인을 소개했던 ‘데뷔탕트’라는 알현식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 결혼할 나이가 됐으니까, 빨리 청혼하시오.’ 이렇게 알리는 거였죠. 신기하게도 21세기에도 데뷔탕트가 있습니다. 1958년 엘리자베스 2세의 의해서 폐지 됐던 데뷔탕트 볼은 1980년에 자선행사 형식으로 부활했고, 1968년 학생들이 주축이 된 5월 혁명으로 중단됐던 파리에 무도회 역시 ‘발 데 데뷔탕트’라는 이름으로 다시 열립니다.프랑스의 오트 쿠튀르 패션행사와 연계해서 열리는 패션행사죠. 1947년 재클린 캐네디도 프랑스 데뷔탕트에서 사교계에 데뷔했죠. 부시 대통령의 조카 로렌 부시가 부르봉 왕가의 루이스 왕자와 2000년에 손을 잡고 등장하는 것이 전 세계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다시 데뷔탕트가 세계적인 시선을 끌게 됐죠. 지금은 명품패션계가 주목하는 행사가 됐죠. 얼마 전에는 이영걸을 딸과 화웨이 회장의 딸도 발 데 데뷔탕트에서 유럽 사교계에 자신을 알렸습니다. 

수천만 원짜리 명품드레스와 티아라를 걸쳐야 하고 천문학적인 참가비는 내야하죠. 게다가 미모 뿐 아니라 지적인 능력까지 갖춰야 이 참가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젠 신분이 아니라 능력만 있으면 인종도 상관없이 참가할 수 있지만, 능력만 되면 갈 수 있는 데뷔탕트가 되었다고 해도 못 가는 사람이 많은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습니다. 

베르샤유 궁전의 파티는 이제 왕의 초대장 없이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매년 6월 인터넷으로 88~330유로 정도의 입장료를 내고 예약을 하면 페트 갈랑트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2500명이나 참석할 수 있지만, 금방 입장권이 동나기 때문에 빨리 예약해야 한다네요. 파티복은 데뷔탕트에 참석하는 분들처럼 명품드레스를 주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코스튬 파티의상을 빌려주는 곳에서 대여하시면 됩니다. 6월에 파리에 가시면 페트 갈랑트에 가서 EDM음악을 들으며 멋진 누군가를 만나는 로망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베르샤유 궁전 페트 갈랑트

                                                                                                                           

-외로운 삐에로와토-         

                           

피에로 질, 와토 1717년

  

로코코에는 유쾌한 그림만 있을 것 같지만, 와토의 이 그림에서는 왠지 모를 비애가 느껴집니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색감, 반짝이는 새틴옷의 질감표현은 로코코양식 그대로지만, 긴장한 듯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서있는 피에로의 얼굴이 이상하게 애처로워 보입니다. 무대 아래 오른편 관객들의 시선을 전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합니다. 왼쪽 당나귀를 타고 있는 남자 또한 엉뚱한 곳을 바라보면서 웃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피에로는 무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올라갈 무대가 두려워서 떨고 있었던 걸까요? 

이 외로운 피에로의 그림은 와토의 인생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와토는 발랭시엥 출신으로 이곳은 1678년 프랑스로 편입됐던 곳으로 원래는 플랑드르 지역이었습니다. 3차 영란전쟁으로 프랑스가 차지한 지역이었죠. 1702년, 18살이 되던 해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에 온 그에게는 평생 플랑드르 화가라는 말이 별명처럼 따라다녔죠. (플랑드르이 미국식 발음이 프란다스입니다. 지금의 벨기에 지역입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에 온 와토는 가정이나 집을 갖지 않고 친구나 후원자 집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화가로써 명성을 얻어 많은 돈을 번 후에도 그의 더부살이 생활은 계속되었죠.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보헤미안, 그것이 와토가 원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타지에서 온 화가의 숙명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와토는 우울증과 불안증세를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극히 꺼렸습니다. 왕래하는 사람들이라고는 같은 고향에서 온 몇몇 사람뿐이었죠. 37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1712년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기 전까지 여러 사람 밑에서 일하며 그림을 배웠습니다. 무대디자인을 한 스승 클로드 질로(claude Gillot)는 무대와 배우를 화폭에 담았지만, 와토의 그림속의 배우들은 무대에 있는 건지,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건지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와토의 그림에는 뚜렷한 사건이나 이야기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전달됩니다.

 그건 사랑일까요? 아니면 외로움일까요? 

앙투와 와토, 로살바 카리에라 1721년

                              

 로살바가 그린 와토의 얼굴입니다. 여성적인 남성이 사랑받던 시대 초상화속 와토는 무언가 우울하고 겁에 질린 것 같지만 백지장같이 하얗고 여린 모습이(아마 당시에 걸린 폐렴 때문에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당시에는 남자도 이렇게 뽀얗게 화장을 하고 긴 가발을 쓰고 야리야리해 보이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합니다. 로살바는 베네치아에서 인기 있는 초상화가였습니다. 베네치아에 들르면 로살바에게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을 정도로 그녀는 인기 있는 화가였죠. 이 그림을 보면 그녀가 왜 인기 있었는지 설명 안 드려도 아실 겁니다. 그녀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취향에 딱 맞았죠. 마르는데 오래 걸리는 유화가 아니라 파스텔로 그림을 그린 것도 그녀의 성공 비결 중 하나였습니다. 초상화 한 장 그리자고 여행지에서 몇 달씩 있기는 어려우니까요.

당시에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로마상을 받으면 이탈리아 유학을 국비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와토는 2등을 했고 후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은 되었지만, 이탈리아에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와토는 스승이었던 클로드 질로의 소개로 뤽상브르 궁전 장식을 담당했던 클로드 오드랑 3세 밑에서 일하며 궁전에 있는 루벤스의 그림을 모사하며 실력을 키웠습니다. 와토의 드로잉을 보고 있으면 루벤스의 그림과 정말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와토의 드로잉

와토의 뎃생은 미술사에서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죠. 와토는 이런 드로잉을 1000점이나 남겼는데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습니다. 

루벤스가 미술을 공부한 베네치아에 누구보다 가보고 싶었던 와토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파리에서 베네치아의 화가 로살바를 만나 미술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녀는 1721년 여름까지 와토에게 초상화를 보내주겠다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그해 7월 18일에 와토가 폐결핵으로 떠났으니까요. 

화가의 일생을 알고 나면 그림을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림이 다가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촌들, 와토 1717년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만, 왠지 행복한 연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 여인의 뒷모습처럼 애처로워 보이거나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그린 듯한 그림이 많습니다.

평생 주변인으로 살았던 와토의 일생을 알고 나면 그의 화려한 그림에서 느껴졌던 쓸쓸함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화려한 시대 로코코는 귀족이 되고자 하는 부르주아의 열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어쩔 수 없이 파티에 초대 받은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봐야 했고 초대받을 수 없는 소외감을 귀족과 다른 대중성을 내세우며 본인들만의 정체성으로 포장하려 했지만, 실상은 겉모습부터 귀족을 따르고 그들이 되고자 열망했던 가식이 뒤섞인 모순의 시대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법복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던 와토도 그들과 같은 주변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의 구멍은 화려한 겉모습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닌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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