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태어나서 자라 죽는 과정이 있듯 역사도 성장과 변화를 거칩니다. 르네상스는 사춘기에 비교할 수 있겠네요. 신(부모)에게서 벗어나 반항을 시작하고 성에 눈을 뜨고, 겁대가리 없이 무엇이든 도전했었죠. 바로크는 이제 어엿한 직장을 가진 청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0~40대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내 집 마련, 재테크죠. 한마디로 돈입니다. 바로크의 사람들도 그랬죠. 돈의 맛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르네상스의 도전정신은 쇠퇴해가고 무역보다는 토지나 공직 등 안정적인 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근대를 만들어낸 부유한 시민들은 영국에서는 젠트리, 프랑스에선 법복귀족, 네덜란드에서는 레헌트로 기득권이 되어가고 있었죠. 그들은 이제 귀족들이 누리는 혜택을 욕심내기 시작합니다. 이 특혜가 무엇일까요? 세금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크에 절대왕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 부유한 시민이 내는 세금 덕분이었죠. 항상 돈이 필요했던 왕은 세금을 내는 시민들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근데 이제 와 세금을 내지 않겠다니요! 왕과 시민의 달콤한 동거는 이제 끝났네요. 만남보다 어려운 게 헤어짐 아니던가요? 이제 남은 것 왕과 시민들의 진검승부입니다. 그 싸움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수비 축구는 인기가 없다.-
처녀였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가 없이 죽자 튜터 가문은 대가 끊기고 먼 친척뻘인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튜더왕조가 끝나고 영국은 이제 스튜어트 왕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문제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엘리자베스 1세가 ‘어차피 자식도 없는데, 다 쓰고 죽어야겠다’라는 마음이었는지 아버지 헨리 8세로부터 물려받은 땅까지 쏙쏙 팔아먹고 돌아가셔서, 빚잔치를 끝나고 나니 제임스 1세는 100만 파운드 정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녀가 누굽니까?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물리친 천하의 여장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녀가 국민과 의회의 남다른 사랑을 받은 건 다른 이유였습니다. 유명한 해적 드레이크의 뒤를 봐주면서 해적질을 도와준 대가로 엘리자베스 1세는 수익의 5분의 1을 받았죠. (해적이면서 해군인 사략선은 다른 나라 선박을 공격하는 걸 인정해 주었습니다. 말이 좋지, 해적질을 나라에서 눈감아 준 것과 같았죠) 이 배당금 덕분에 여왕은 ‘돈’을 달라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고로 영국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여장부답게 의회에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말년에 아일랜드와의 내전과 자존심이 상한 스페인 함대가 복수를 위해 침입해와 전쟁자금이 궁했을 때도, 세금 징수보다는 선대에서 물려받은 땅을 담보로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필요한 자금을 충당했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역모기지론 같은 거지요.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다 쓰는 거죠. 게다가 정가를 정해서 관직을 파는 매관매직까지 하셨죠. 후사가 없었으니 가능한 일인인지도 모릅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는 재정 부족 문제와 세금 징수에 협조적이지 않은 의회 덕분에 돈이 없었습니다. 본인도 엘리자베스 1세 여왕보다 사치스러웠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본인의 옷이나 보석 치장에는 돈을 아끼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왕은 돈 잡아먹는 하마인 전쟁은 아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살해를 당하고, 어머니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음모죄로 처형당해 폭력이라면 누구보다도 치를 떠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던 제임스 1세에게 시대 상황도 딱 맞춤이었죠. 숙적인 스페인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프랑스는 위그노(신교) 전쟁으로 본인들 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죠. 그러니 영국에게 싸우자고 껄떡댈 나라가 없었던 거죠.
그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와 런던에서 1604년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실은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죽은 언니 메리 여왕의 남편이었으니, 형부였죠. 그녀가 공식 인정한 해적질의 주요 약탈 대상이 바로 형부의 나라 스페인의 배들이었던 겁니다. 정말! 상도덕은 없는 여왕이셨죠. 어쨌든 이 조약으로 영국과 스페인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뒤이어 전쟁에 관심이 없는 펠리페 3세가 즉위하면서 두 왕은 짝짜꿍이 맞아 평화가 유지됩니다. 이 조약으로 사략선을 이용한 공식적인 해적질은 막을 내리게 되죠. 제임스 1세는 사략선이 왕실에 바치는 배당금을 받지 못하게 되어 더 가난해집니다. 제임스 1세에게 돈 나올 구석을 세금밖에 없었죠. 의회에 돈 달라고 조르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왕은 당연히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럭저럭 잘 지내던 제임스 1세는 유럽 본토에서 구교와 신교들의 간의 30년 전쟁이 터지면서 웃기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국민은 “신교인 우리나라가 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냐?”라고 비난을 해댔지만, 의회는 돈이 없다며 배 째라 식이었죠! 사위인 라인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보헤미아 왕위 즉위 문제까지 엮인 전쟁이라 장인인 제임스 1세는 돈이 없다는 소리는 차마 못 하고 “병력을 보내주마!”라고 뻐꾸기만 날리고 군대는 보내지 못합니다. 장인 체면이 말이 아니었죠.
어쨌든 제임스 1세는 뜨뜻미지근하게 전쟁에 발을 담그는 시늉만 하다가 돌아가십니다. 국민은 이제 수비 축구처럼 미지근한 왕에 질려있었습니다. 다음 왕에게는 파이팅 넘치는 한방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림 볼 줄 알았던 이 부부가 볼 줄 몰랐던 건-
안타깝지만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을 찰스 1세도 화끈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1625년 왕이 된 찰스는 말더듬이에 다리가 부실한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죠. 그의 일생을 바꿔 놓은 사건은 스페인으로 간 청혼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의 동행자는 아버지 제임스 1세와 므흣한 관계 덕분에 승승장구한 버킹엄 공작 빌리 엘리어스였습니다. 믿어지진 않지만, 제임스 1세와 공적인 장소에서도 키스해댔다고 합니다. 평민이었던 빌리 엘리어스는 제임스 1세의 총애 덕분에 공작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로 제임스 1세가 죽고 난 후에는 찰스 1세의 정치적 동반자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스페인에서 찰스와 버킹엄은 어이없게 공주의 방에 불쑥 들어가고, 버니 경은 무례하다며 스페인 사제를 뺨을 후려치는 섬나라의 기상(?)을 보여주어 스페인 왕실을 경악하게 했죠. 당연히 청혼은 실패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가톨릭, 성공회, 청교도, 장로교가 짬뽕이 되어 종교갈등이 최고조 상황이었습니다. 헨리 8세가 성공회를 국교로 정했지만, 신교는 영국 젠트리 계층이 주로 믿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신교인 장로교로 또 나눠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구교) 국가인 스페인의 공주에게 청혼하러 갔던 것입니다. 국민은 청혼에 실패하고 온 왕자를 ‘그래도 가톨릭 여왕은 안 맞았네!’라며 잘했다고 치켜세워 줬습니다. 근데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버킹엄 공작이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라고 들쑤셔서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의 공주 헨리에타 마리와 결혼합니다. 덕분에 찰스 1세는 평생 가톨릭 국가로 나라를 되돌리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받게 됩니다.
청혼에는 실패했지만, 찰스 1세는 스페인 여행에서 얻어온 게 있습니다. 바로 예술을 보는 안목이었죠. 영국이 신교 국가가 되면서 그나마도 변변치 않던 교회의 성화를 회칠로 덮어버리는 바람에 그림에는 문외한이었던 찰스 1세는 스페인 마드리드 알 카스로 궁전의 화려한 예술품에 넋을 놓고 맙니다. 특히, 티치아노가 그린 바르도의 비너스에서 홀딱 벗고 있는 비너스를 보고 대륙 사람은 모두 벗고 사는 줄 알고 놀랐다고 하네요. 신교 국가에서 성화나 신화를 구매하는 것은 국민에 정서에는 맞지 않았지만, 찰스 1세는 신경 쓰지 않고 대량구매에 나섭니다.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이탈리아 그림을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이 어려워지면서 3만 파운드에 컬렉션을 통으로 인수하는 행운도 얻었죠.
말을 탄 채 마구간 감독과 함께 있는 찰스 1세, 반 다이크 1633
1632년 루벤스의 제자인 반 다이크를 궁정화가로 초청합니다. 우리에게 찰스 1세의 얼굴이 친숙한 이유는 반 다이크가 그린 초상화들 덕분입니다.
왜소한 체구가 콤플렉스인 찰스 1세를 말을 탄 모습으로 그려서 군주로서의 위엄을 살려줬죠. 찰스 1세는 그림 밖을 주시하는 반면 마구간 감독은 찰스 1세를 응시해 보는 이의 시선이 찰스에게로 쏠리게 합니다. 마치 만지면 느껴질 듯한 튼실한 말의 근육과 찰스의 갑옷의 반짝임은 반 다이크에 얼마나 질감과 빛의 표현에 능숙한 화가인지 말해줍니다.
‘얼음!!’하고 멀뚱히 있는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뻣뻣한 르네상스식 초상화가 초록색 휘장들이 휘날리는 문을 늠름하게 통과하는 멋들어진 바로크 양식으로 변했습니다. 바로크 양식은 역동성과 함께 보는 사람의 입을 딱 벌어지게 하는 휘황찬란함으로 권위를 과시하고 싶은 절대왕정의 왕의 입맛에 딱 떨어지는 양식이었죠. 예술의 변방이었던 영국은 반 다이크의 영입을 통해 대륙의 바로크 양식을 빠르게 따라갑니다. 반 다이크 그림 스타일은 후에 영국의 대표 초상화가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당시 미술계의 큰손이었던 찰스 1세는 2000여 점의 회화와 400여 점의 조각을 수집합니다. 이 수집품은 많이 흩어졌지만, 현재도 많은 부분을 영국 왕실 컬렉션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왕은 수집한 예술품으로 도배한 연회장에서 호화로운 궁전행사를 즐깁니다. 즐기는 사람이야 띵까띵까 재미있었지만, 그 꼴을 보고 있는 국민은 속이 터졌죠.
문제는 제임스 1세처럼 시대 상황이 적성에 맞게 받쳐 주지도 않았죠. 30년 전쟁으로 유럽 전체가 전쟁통이었으니까요. 영국도 이젠 가만히만 있으면 가마니가 될 형편이었죠. 패기는 없지만 젊은 왕은 전쟁에 나서 보기로 합니다. 결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서 보기 좋게 당하더니 신교도 국가인 영국이 어이없게 프랑스 신교도하고 한판 붙자고 설치다가 버킹검 공작은 부하의 손에 암살당하고 맙니다.
평화와 전쟁의 알레고리, 루벤스 1629년
의회에서 도와주질 않아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던 찰스 1세에게 뜻밖의 선물이 도착합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사돈 관계가 되자 둘의 짝짜꿍이 두려워진 네덜란드의 스페인 총독 이사벨라 대공비가 잘 지내보자며 보낸 선물이 루벤스의 평화와 전쟁의 알레고리입니다. 왼쪽의 ‘평화의 여신’은 아기에게 젖을 주고 있고, 사티로스가 들고 있는 뿔에서는 과일이 넘쳐납니다. 평화는 젖과 꿀이 넘쳐난다는 말이겠죠. 평화의 여신 뒤에서는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전쟁의 신’ 마르스와 ‘분노의 신’ 알렉토를 쫓아내고 있습니다. 싸워봤자 열받을 일밖에 더 생기겠냐? 그런 뜻일 테죠. 그림을 좋아하는 찰스 1세에게 루벤스의 그림은 한마디로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었을 겁니다.
의회와 삐걱거리던 찰스 1세는 1629년부터 11년 동안이나 의회를 닫아버리고 왕실 고등법원을 통해 나라를 운영합니다. 문제는 의회의 승인 없이는 세금을 걷을 수 없다는 것이었죠. no의회! no머니! 였던 거죠. 찰스 1세는 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폐지된 세금을 부활시켰습니다. 귀족작위와 무역독점권을 강매하고 소금, 비누 등의 물건에 독점권을 부여하고, 해군 증강을 위해서 해안가 도시에서만 걷던 선박세를 모든 지역으로 확대합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새로운 세금은 서민보다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죠. 어쨌든 이 돈으로 근근이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1633년 캔터베리 대주교를 윌리엄 로드가 성공회에 구교에서 했던 제단과 예복, 성모마리아 동상을 부활시키면서 세금 때문에 안 그래도 못마땅했던 젠트리와 중간계급 신경을 또 거슬리게 합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젠트리와 중간계층은 신교도들이 많았습니다.
종교, 세금 이외에 뭐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런 불만이 밖으로 터져 나온 곳은 찰스 1세의 고향 스코틀랜드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믿는 멋진 아주머니가 “지금 신교도 국가에서 뭐 하는 짓거리냐?”며 성직자에게 의자를 던지는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주교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을 수습하려고 의회를 다시 소집한 찰스 1세는 결국 깊어진 의회와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의회파와 왕당파로 나뉘어 전쟁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왕당파를 지지했던 건 왕과 귀족이었는데 영국은 장미전쟁과 백년전쟁 동안 귀족들이 거의 다 죽어버려서 귀족이라고 해봤자 30개 정도의 가문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신흥귀족 계층인 젠트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봤자 젠틀리도 6,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의회파는 중간계층이 주축이 되었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세금과 종교 문제 때문에 왕에게 감정이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중요한 건 돈은 상인이 많은 의회파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의회파나 왕당파 모두 강력한 군사가 없는 오합지졸이어서 처음에는 전쟁이 빨리 끝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과 다르게 전쟁은 9년이나 질질 끌었습니다. 거기에는 젠트리 출신의 크롬웰이 의회파의 명장으로 활동한 것이 한몫했습니다. 크롬웰은 케임브리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고향에 가서 농장을 운영하던 신실한 청교도였습니다. 전쟁은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타고난 전술가로써의 재능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는 동네 아저씨들의 모임과 마찬가지는 민병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정신무장한 철기대로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반면 찰스 1세는 태어날 때부터 전쟁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죠. 리더가 앞장서지 않는 전쟁은 패배할 수밖에 없죠.
그래도 왕인데 전쟁에 진 찰스 1세는 포로의 신세가 되어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평소 말더듬이 콤플렉스였던 찰스는 그날따라 또박또박 자신의 입장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합법적인 왕이다.”이 말에 사람들은 뜨끔했지만 대세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찰스 1세의 사형 판결이 내려지고 다음 날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찰스 1세는 1648년 윈저궁에 감금되어 있던 그의 마지막 순간에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책 위에는 ‘숨을 쉬고 있는 한 희망은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죠. 그는 인간적으로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미술품 구매 외에는 검소한 생활을 했고, 부인과의 관계도 돈독했으며 자식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는 영국을 위해서 노력하는 왕이었습니다. 해군을 증설을 힘썼고, 조세도 서민이 아닌 부유층에게 과세하는 나름으로 덕망 있는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사형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찰스 1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잘못된 유산 때문이었죠. 찰스 1세의 아버지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습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찰스 1세 또한 자신은 신의 대리자이며 국민은 왕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죠. 태양왕 루이 14세의 조카였던 그의 부인 헨리에타 마리 또한 그 생각을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절대왕정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면 중세에 힘없던 왕에게 상인들이 바친 세금으로 왕은 군사와 관료라는 두 날개를 달고 강력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자신들의 힘의 근원이 세금을 내는 시민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거죠. 시민이 기브 앤 테이크를 모르는 왕에게 보복한 거랄까요?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추위 때문에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떠는 모습으로 보이기 싫다며 셔츠 한 장 더 달라고 합니다. 사형장은 화이트홀의 뱅퀴팅 하우스 앞마당에 마련되었습니다. 뱅퀴팅 하우스는 말 그대로 연회가 열리던 곳으로 찰스 1세가 루벤스에게 주문한 천장화가 그려져 있는 곳이었죠. 천장화는 주제는 ‘왕의 신성한 권리’였습니다. 마치 왕권신수설의 종말을 고하는 듯 그는 화이트홀을 걸어 처형장으로 걸어갔습니다. 왕의 목은 단박에 잘렸고 사람들은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찰스 1세의 죽음으로 세계 역사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주의의 첫걸음을 딛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뱅퀴팅 하우스는 누구 한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개된 장소가 되었죠. 이제는 찰스 1세가 앉아계시던 왕좌 앞에 누구나 주르륵 놓인 빈백체어에 누워서 루벤스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뭐 찰스 1세가 억울하다고 순교자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을 이만큼 바꿔 놓은 죽음이라면 그 가치를 인정해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