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캬닥이 Mar 17. 2022

무의미한 노동을 끝내기 위해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 서평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 잡>은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어보라 추천할 책이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소개하기는 또 겁이 나는 책이다. 저자는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해로워서 그 일을 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노동에 회의를 느끼는 직업’을 불쉿 직업으로 정의한다. 책을 읽으며 자신이 불쉿 업무를 한다고 못 느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자신이 불쉿 업무를 한다고 인정할 사람도 거의 없다.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현대인이 무의미한 일로 보내는 시간과 자원을 모으면 엄청날 것이다. 그걸 모아 의미 있는 일을 한다면 직면한 기후 위기 정도는 거뜬히 해결할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표지 출처 알라딘


'불쉿 직업'의 정의가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가져와 무엇이 불쉿 직업인지 알려준다. 나도 완벽한 불쉿 사례를 알고 있다. 사무직 친구 이야기다.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외부 감사가 들어왔다. 입사하기도 전에 있었던, 아주 오래 전 프로젝트의 서류가 빠진 상태였다. 프로젝트 서류를 인쇄하고 정리했지만 문제는 그대로였다. 방금 뽑은 빳빳한 종이가 도저히 과거 문서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친구는 커피를 묽게 타서 종이를 적시고 말렸다. 친구는 청년채움공제를 다 채우지 못하고 퇴사해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책에 나오는 사례와 친구의 일화만큼은 아니더라도, 일하는 사람 치고 불쉿한 일을 피할 이는 없다. 나는 이 책을 브릭에 소개하려다 포기했다.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 쓸모없는 과제 제안서를 발표하는 교수, 내부인만 보는 게시판을 관리하는 직원이 서평을 읽고 모욕감을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쉿 직업은 좌나 우의 문제가 아니다.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쉿 직업은커녕 불쉿 업무도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세상은 불쉿으로 점점 채워진다. 저자는 역사에서 불쉿 직업의 유래를 찾는다. 불쉿 직업에는 지난 세기에는 없던 개념이기 때문이다. 시계가 생긴 후에야 돈을 주고 남의 ‘시간’을 사는 관념이 생겼다. ‘일을 해야 어른이 된다’는 생각도 르네상스 시절 즈음 영국에서 자식을 다른 귀족의 집에 보내며 생겼다. 시장 경제가 발달하고 유무형의 가치를 구별하게 되자 ‘돈으로 셀 수 없는 것’을 신성시하면서 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에 보람있는 일 대신 쓸모 없는 일로 서로를 고통에 빠트려야만 돈을 받을만 하다고 합의하게 되었다.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고 알려준다. <불쉿 잡>은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 이면에는 앞서 말한 시간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는 관념 외에도 노동은 신성하며, 누군가를 섬기는 것도 일이라는 등의 여러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당연한 관념의 유래를 찾는 과정은 재미있었으나, 그 역사가 서양에 국한된 점은 아쉬웠다.


한국 사회에서 직업의 가치는 직업을 얻기 위해 얼마나 불쉿한 준비 기간을 보냈는지에 달려 있다. 일이 얼마나 사회에 기여하는지는커녕, 일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와도 무관하다. 오죽하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공채 합격자가 임시직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겠는가. 직업을 얻기까지 ‘불쉿 준비 기간’을 겪고서 기업에 보상을 바라는 것이다.


생산기술은 진보하지만 일자리는 줄어드는 오늘날, 한국은 불쉿 준비기간을 늘려 근로 기간을 최대한 늦추는 전략으로 가는 것 같다. 똑같은 개발자라도 특성화고 졸업보다 부트캠프를 갔다온 비전공 대졸의 연봉이 높다고 들었다. 좋은 일자리마다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한 취업 학원이 존재한다. 재미있게도 이런 학원의 강사는 일을 하다가 일자리의 불쉿함에 뛰쳐나온 사람이다. 한국에 불쉿 준비 기간이 길다고 일자리를 얻은 후 불쉿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쉿 직업이 만연한 세상에 저자가 내놓는 대안은 기본소득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다. 사람들이 안심하고 직장을 그만둘 수 있을 때 월급을 주기 위해 쓸모 없는 일을 시키는 악순환이 멈춘다. 사람들은 걱정한다. 사회가 기본 소득을 제공하면 쓸모 없는 한량만 늘어날 것이라고. 저자는 답한다. 사람들의 3-40%는 지금도 쓸모 없는 일을 하고 있다.



* 서평에 공감해서 <불쉿 잡>을 읽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긴다면 감사할 일이다. <불쉿 잡>은 이 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욱 추천하는 책이다. 나보다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불쉿 직업과 불쉿 세상을 훨씬 맛깔나게 설명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 소유의 시기를 지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