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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Mar 07. 2022

우리는 모두 소유의 시기를 지난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서평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독서 모임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2022년 첫 책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농담거리로만 알던 작가였습니다. 누군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을 보고 제목에 홀려 구입했지만 바라던 내용은 없고 어려운 이야기만 가득했다는 이야기요. 그래서인지 프롬이 막연히 어려운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에 인상이 바뀌었습니다. 50년 전에 나온 책인데도 오늘날에 적용할 점이 많았고, 생각보다 읽기도 쉬웠습니다.


책을 소유할 마음이 없어서 중고서점에서 오래된 판본을 샀는데, 책을 읽고 버리기도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이왕 소유할 거면 까치 판본을 살 걸 그랬습니다.


프롬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소유 양식의 삶과 존재 양식의 삶입니다. 전자는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주변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데 집착하는 삶이라면, 후자는 물건도, 사람도 언제든 변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의 차이는 물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계발은 물론이요 취미마저 어느 방식으로도 수행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소유 양식의 교육은 머릿속 지식의 양을 늘리려 하는 반면, 존재 양식의 교육은 외우거나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배운 내용을 곱씹어 삶에 적용하기를 권장합니다. 


작가는 소유가 만연한 삶은 최근 생긴 문제이니, 함께 노력해서 존재 양식의 삶을 살자고 설득합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세상에 스며들기 전, 우리 모두는 존재하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사랑과 나눔이 첫 번째 우선순위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서양 2천 년은 기독교의 시대였으니까요.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개화기 전까지 한반도는 유교와 불교의 땅이었고, 우리 조상들은 삼강오륜을 외우며 컸으니까요.

 

시대를 지배하는 종교와 사상이 존재 양식의 삶을 지향하더라도, 개인 하나하나가 존재 양식의 삶을 살아가기란 어려웠을 겁니다. 달보다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기가 훨씬 편하니까요. 하지만 프롬이 책을 쓴 1970년대는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노골적으로 물질적 소유를 숭상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프롬은 이를 '객체에 소유당하는 삶'으로 표현하며 비판합니다. 


어릴 적 논란이 있었던 TV 광고를 기억합니다. 붉은색 옷을 입은 배우가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하던 광고였는데, 사람들이 그 배우 욕을 했어요. 체면도 놓고 TV에 나와 대놓고 돈 벌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었죠. 공개적으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터부시되던 시절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나, 초등학생한테 주식 교육을 시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그게 왜 문제였는지 이해하지도 못 할 거에요. 


부자 되라는 말을 부끄러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나온 가장 재미있는 발상은 사람들은 존재-소유-존재의 3단계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도 100% 소유나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고 쓰기도 했고요. 저의 취미 운동 생활을 예로 들면, 크로스핏을 시작할 당시에는 안 되던 동작이 되는 것만으로도 뿌듯했습니다. 그러다 실력을 늘리고 싶다는 욕심에 관절이 상할 만큼 운동을 했고요. 지금은 매일 30분 케틀벨만으로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좋은 예시가 아닌 것 같네요. 여전히 저는 운동에 대한 강박을 놓지 못했습니다. 

 


다른 예시를 들겠습니다. 학창 시절 과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큰 발견을 하고 교과서에 이름 한 번 넣어보자는 야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직접 연구에 부딪혀보며 과학자는 ‘되는’ 것, 또는 큰 연구를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매 순간 연구를 ‘하는’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과학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달관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훌륭한 분들의 큰 연구를 볼 수 있는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연구에 집착하던 시절이 있었듯, 무언가에 애정이 있는 사람은 어느 시점에 소유의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존재 양식으로 살라고 설득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한참 욕심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말을 걸겠어요. 언젠가는 지나야 하는 과정이라면, 스스로 지나며 깨닫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여기에 덧붙여 사회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소유 양식으로 몰아갑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욕망으로 돌아갑니다. 개인의 달관을 막거나 늦추는 구조입니다. 모두가 존재 양식으로 사는 세상에서 한 사람만 소유 양식으로 산다면 그는 모두의 자원을 뺏어 풍요를 독차지할 겁니다. 결국 한 번 시작한 소유라는 불은 한 번만 불어도 거의 모든 사람을 소유 양식으로 전염시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함부로 달관하다가는(?) 자칫하다 생존이 어려운 삶으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금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유에는 과거의 제가 삶에 집착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덕분도 있으니까요. 삶의 양식을 선택하는 것도 생존이 충족된 다음의 이야기이니 마냥 개인의 각성과 달관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 스스로는 소유하는 삶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때마침 소유의 아이콘인 차가 생긴 터라, 소유물에 매이지 말자고 다시 다짐했습니다. (자동차가 얼마나 특별한 소유물인지, <소유냐 존재냐>에도 자동차 소비에 대해서만 특별히 한 페이지를 주었을 정도입니다). 앞선 글에도 썼지만, 최근 고등학생 때부터 원하던 드림카를 구입했습니다. 막상 차를 얻고 보니 거리의 크고 좋은 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금 무리했다면 더 좋은 차를 샀을텐데, 철없는 시절의 꿈을 이룬다고 너무 작은 차를 산 건 아닌가 살짝 아쉬우려던 참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깨달았습니다. 저의 소유물은 저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최소한 제 지위를 상징하지는 않아요.


대신 새로 소유하게 된 자동차를 학생 시절과 지금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삼고 싶습니다. 예쁜 자동차라고 공부 플래너 구석에 낙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니까요. 살고 있는 집도, 함께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롬도 삶에서 필요한 소유는 마땅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여기에 아울러, 이왕 제 삶에 들어온 물질들에게 삶이라는 이야기 안에서 의미를 주고 싶습니다. 자전거와 우쿨렐레, 책장에 잔뜩 들어찬 책, 치닝 디핑 기구와 PS5까지도요.




+ 발제자 분께서 토론을 시작하며 꺼낸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MBTI의 ‘NT’들은 존재 양식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었습니다. 삶의 양식이 성격으로 100% 결정된다면, 소유에서 존재로 삶의 지향점을 바꾸는 노력은 성격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하지만 명제는 기각되었습니다. NT인 제가 매번 소유에 유혹당하며 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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