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자유시간과 맞바꾼, 곰국이라는 클리셰

주부 I, 62세

by Eugene

어릴 적, 엄마가 큰 솥에 육개장이나 곰국을 끓이는 냄새가 나면, 하루 이상 집을 비운다는 신호였다. 적어도 곰국의 신호는 여러 가정에서도 통용되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한 가정의 주부가 길게 집을 비울 때 만들어 놓고 나와야 하는 음식의 클리셰/대명사일지도 모른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와 가장 친한 언니는 신랑을 두고 길게 놀러 갈 때면, 곰국을 끓여 놓고 나온다고 하니, 형부는 아마 곰국 냄새를 맡게 되면 마음의 반은 자유롭고, 반은 외로울 것이다. 오래도록 푹 고아서 끓인 노동과 정성의 시간을 그녀들의 자유시간과 맞바꾼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엄마의 육개장과 곰국을 먹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퇴직한 아빠, 출가한 오빠, 그리고 혼자 사는 막내딸을 둔 나의 엄마는 이제 삼식이인 한 남자만 먹여주면 되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더 이상 정성의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자유시간이 남아도는 할머니가 된 것이다. 스물두 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해, 4남 2녀 중 막내아들의 시부모님과 두 아이를 돌보며 잠잘 시간도 몇 시간 없었던 엄마는 이제 더는 그 누구를 돌보지 않아도 되지만 (아, 삼식이가 있었지), 무한대의 자유시간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바보가 되어 있었다.



“꿈 많던 엄마의 눈부신 젊은 날은 너란 꽃을 피우게 했단다. 너란 꿈을 품게 됐단다.” *


할머니가 된 엄마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오빠와 나라는 꽃으로 엄마의 젊은 날을 맞바꾼 소중한 그 시간을, 육개장과 곰국을 끓이고 외출하던 그때처럼, 정성 들여 쓰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곰국을 끓이고 외출할, 어떤 미래를 위해 엄마에게 레시피를 전수받아야겠다. 갑자기 엄마 육개장이 너무 먹고 싶은 밤이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던, 엄마의 눈부신 젊은 날은 어쩌면 잊힌 지 오래일지 모른다. 아니, 잊고 싶은 과거의 시간일지 모른다. 그 젊은 날의 시간과 할머니가 되어버린 현재의 시간은 질적으로 보나, 속도로 보나 무척 다를 것이다. 어떻게 써야 할 줄 모르는 엄마의 무한대 현재 시간을 젊은 날의 시간보다 더 눈부시게 쓰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시간이 외롭지 않고 고독할 수 있기를 응원한다. 외로움은 견디는 것이고 고독은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조만간 엄마의 고독한 시간을 함께 나눠 쓸 계획을 해 봐야겠다. 정성의 시간을 들여 큰 솥 가득 곰국을 끓여 놓고 얻은 자유 시간을 누릴 눈부신 그 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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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y 6집 앨범 『Thank You』 중 “딸에게 보내는 노래” 가사

* 『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 ,이국환, 2019,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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