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
검은색 민소매 롱 셔츠 치마를 입었다. 오늘은 친구의 친구 집에 처음 가는 날이자, “쓰나미” 모임 멤버 면접을 본다.
뉴욕에서 가장 친했던 14살 차이나는 내 인생 영혼의 단짝, 서리 언니는 뉴욕에 머물렀던 3년 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가장 큰 우체국 박스에 들어 있는 한국에서 온 각종 인스턴트 음식을 언박싱했다. 언박싱하는 날은 언제나 한국 맛 가득한 MSG 파티였다. 그 파티 날에 각종 MSG 가득한 인스턴트 음식뿐 아니라 한국 각 지역 음식도 맛볼 수 있었다. “쓰나미” 멤버들은 한국 각 지역 곳곳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대구의 유명한 신천 떡볶이(일명 신떡)와 납작 만두, 포항의 건어물까지도 먹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먹기 힘든 지역 음식을 뉴욕에서 먹다니. 서리 언니 아니었으면, 아니 정확히는 혜영 언니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뉴욕까지 우체국 박스에 인스턴트 사랑을 듬뿍 담아 보내주는 혜영 언니는 서리 언니의 절친이자 그녀의 중매로 꽃다운 나이 20대에 결혼에 골인한 희생자(?)다. 잠실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는 혜영 언니 덕분에 “쓰나미” 모임의 집결지는 주로 언니의 집이거나, 그 근처 식당이다.
“쓰나미” 모임을 결성한 것은 서리 언니와, 중국에 있는 그녀의 또 다른 절친, 민정 언니이지만, 실질적인 모임의 대표는 잠실에 있는 혜영 언니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 멤버십 가입을 위해선 혜영 언니의 컨펌이 필요했다.
뉴욕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인스턴트 사랑을 매달 보내주신, 혜영 언니의 집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서리 언니의 명을 받았다. (언니의 간택을 받은 셈이다) 딱 달라붙는 검정 롱 셔츠 치마에 샌들을 신고 집에 들어가니 거실 마룻바닥엔 신문지가 가득 깔려 있었고, 삼겹살 불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영: 언니, 쟤 너무 말라서 우리 모임에 못 들어와.
서리: 야, 우리 모임에도 한 명쯤은 마른 애가 있어야지.
일단 2번이랑 잘 놀아주나 보자.
(여기서 2번이란, 혜영 언니의 둘째, 아들 태현이를 말한다)
이상하게 보통 한국 여자들은 미국에 가면 살이 10킬로 정도는 쪄 온다던데, 나는 뉴욕에서 10킬로가 빠져 그 덕에 리즈 시절 몸매를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다시 돌아와 금방 10킬로가 쪘지만) 혜영 언니네 집에 처음 방문했던 그때는 리즈 시절 몸무게를 가졌을 시절이었다. 딱 붙는 치마에 어울리지 않는 포즈를 하고 방바닥에 깔린 신문지 위에서 냉동 삼겹살과 돼지기름에 구운 어묵을 먹었다. (TMI: 돼지기름에 구운 사각 어묵은 삼겹살보다 훨씬 맛있다. 그 이후론 삼겹살 먹을 땐 꼭 어묵을 챙긴다) 당시 2번(혜영 언니의 둘째, 태현이)은 너무 귀여운 나이, 3살이었고, 아기를 예뻐하고 잘 보는 나는 2번과 잘 놀아주어서 쓰나미 모임의 멤버로 최종 합격하였다.
서리 언니와 중국에 있는 민정 언니, 두 명을 기점으로 형성된 이 모임은 한마디로 말해 개족보이다. 중국의 민정 언니가 데려온 메이크업 아티스트, 대구와 경북지역의 교수 언니들, 중국 생활하면서 만난 룸메이트들, 서리 언니가 데려온 사회생활 후배와 그 후배 친구, 고등학교 동창들, 뉴욕 대학원 후배들. 이 모임의 나이 차는 무려 20살이 넘어가고, 직업군도 다양하다. 교수에서부터 예술가까지.
스무 살 초반, 한창 놀 때 친구의 친구까지 모여 술집에서 놀던, 5~6명 정도의 개족보는 많이 경험해봤지만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대규모의 개족보는 처음이었다. 이 모임이 모이면 각종 먹을 것들을 “쓰나미”처럼 다 쓸어버려서 모임 이름이 “쓰나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옵션으로 기본 10킬로 이상은 찔뿐더러 하늘이 떠나갈 듯 시끄러워, 주변 사람들까지 다 쓸어버리기까지 해서 모임 이름이 “쓰나미”가 찰떡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경조사나 서로 도울 일이 있을 때, 더욱더 끈끈해진다. 각자의 위치에서 가진 지식과 지혜가 모여, 단체 지성을 발휘하기도 하고,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친분으로 서로에 대한 예의는 충분히 갖춘다.
놀 때는 개족보가 가장 재밌다는 말, 이 모임을 통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놀 때도 최선을 다해 놀고, 슬프고 기쁠 때도 마음을 합친다. 이만큼 지혜롭고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정석이 있을까 싶다. 이 모임의 마지막 멤버가 된 이후로부터 나는, 나를 기준으로 또 다른 개족보를 만들어 맹활약 중이며, 그 멤버들은 모두가 그 관계에 만족하고 있다.
누군가 가장 즐겁고 피곤하지 않은 인간관계를 원한다면, 나는 개족보의 친구 관계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