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술이 26장
황학동에서 B마트 콜을 들고, 대학로에 드나들기를 반복하고 있는 요즘이다. 다시 B마트로 돌아가야 하지만, 빈손으로 가기는 좀 손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황학동 방면으로 가는 콜이 있었다. 황학동으로 바로 가는 콜이 한 개 있었고, 중간에 있는 창신동으로 가는 콜이 2개 있었다. 무엇을 잡아야 할지 망설임이 일어났다. 내 수익만 따지면 창신동 두 개를 잡아야 하지만, 대학로에서 콜을 치는 라이더들을 위해서는 더 멀리 가는 황학동 콜을 잡아야 한다. 내 이익이냐 전체 효율이냐의 문제였다.
그런데 문득 이런 식의 고민을 일삼다 보면, 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돈을 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고작 몇천 원을 가지고 전체 효율을 따지고 있는 중이라니, 스스로가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TV 프로그램만 봐도 한 젊은 연예인이 드넓은 광활한 주택에 살며, 과잉소비를 일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몇천 원, 몇만 원을 가지고 전체 효율을 따지면 자신의 수입은 늘 평균치 아래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또 넓은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은 자신보다 더 못 벌거나 못 가진 사람들만을 내려다볼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평균수입 정도에 만족하며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보다 더 극한의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실천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종로3가역 금은방 가게들 사이를 배달 다닐 때, 스치듯 보았던 방랑자 아저씨가 생각났다. 그럼 그 아저씨의 사랑은 어느 정도일까? 혹시 무소유라는 가치를 말로 떠들어 댈 것도 없이, 그냥 자신이 가장 밑바닥이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밖에 내놓은 남은 음식물을 먹고 있던 그 방랑자 아저씨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남이 먹다 남은 음식 정도면 자신은 충분하다는 듯한 그 아저씨들을 볼 때면, 왠지 이 세상은 반대로 되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上善若水(상선약수),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리만물이부쟁),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사람들은 밑바닥을 싫어한다. 하지만 최고의 선을 품은 사람은 물처럼 아래로 흐르기만 할 뿐이어서 소유하려 다투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모두가 싫어하는 밑바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돈을 쌓고자 하면 아래를 내려다보면 안 된다. 누군가의 것이 줄어들어야 내가 더 가질 수 있는 이 구조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애써 외면해야 한다. 능력주의라는 엘리트들이 세운 합리주의에 맞춰, 나의 정신구조를 거기에 일치시켜야 한다. 엘리트들 본인의 능력과 직업적 가치가 이 사회에 큰 발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회 발전론에 힘입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사회에 진보라는 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보수와 진보 양쪽이 자기의 사회적 지위와 통장 잔액을 유지하기 위해, 갑론을박하며 새로운 더 나은 것이 있는 척 떠드는 걸 업으로 삼은 것일까. 핵심은 자기 몸을 높이고 편안히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자본주의 시대에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맞기도 하다. 혼자 자본주의를 역행하여 경쟁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냥 낙오자로 취급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맞춰 보수를 떠들든 진보를 떠들든 그렇게 해서 자기 몸을 높이고 편안히 할만한 재력을 갖추게 되었다면, 이제는 조금씩 덜어내며 살면 된다. 어느 정도의 지위와 돈을 유지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너무 뒤처지는 사람이 없도록 조금씩 덜어내면 된다.
하지만 왠지 지금 시대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 가진 자들이 덜어내지 않으니, 재원이 필요하면 공평하게(?) 전 국민에게 세금을 매기고, 그 돈으로 또 더 나은 정책을 고심해보겠다며 시간만 소모하는 것 같다. 사실은 그저 가진 자들이 아래를 생각하는 ‘사람의 인격’이 모자란 것이 아닌가? 경쟁 사회의 때를 만났기에 그에 맞춰 나아가는 것도 좋지만, 이미 많이 가졌다면 가끔은 뒤를 돌아보는 것도 또한 좋을 것이다. 가진 자들은 다음의 논어 구절을 깊게 새겨야 한다.
子(자) 釣而不網(조이불망).
공자께서는 낚시질은 하시되 그물질은 하지 않으셨다.
- 『낭송 논어』(북드라망), 「술이7-26장」 , 229쪽.
홍흥조라는 학자는 이 구절을 통해서 어진 자(仁人)의 본마음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본마음은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금 시대는 행동이 곧 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시대다.
가진 자들이 교양있는 모습을 가장해서 없는 자들을 어루만져주는 아름다운 말을 하더라도, 실제 자기 이익을 위해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그물질하는 중이라면? 집안일이라고 모른 척 방관했다면?
그 사람은 그저 신사다운 또는 숙녀다운 얼굴을 가장한 사기꾼인 것이다. 아주 얼굴이 두꺼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