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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Oct 27. 2024

가을 통증과 서정 사이

 시큰거리는 가을에세이 한 편을 나도  쓸 수 있을까

치통이 찾아왔다. 통증은 양쪽 송곳니 뿌리 끝, 좌우 45도, 1cm 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자리에서 시작한 통증은 2cm를 직진한다. 그리고는 갑자기 경로를 바꿔 안구 뒤쪽으로 깊숙이 숨는다. 적의 급소를 겨냥하듯 통증은 가장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에서 멈춘다.  좌우 눈꼬리 1.5cm 지점  관자놀이가  최종 목적지다. 나는 이 통증의 발생지가 치아 근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치통이라 부르기로 했다. 오랜 경험상 타이레놀은 소용없었으니 나트록센 계열의 진통제만이 그 통증을 멈출 수 있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양쪽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니, 나는 그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을이 찾아왔다. 이번 가을 여행의 시작점은 영월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판운섶다리를 보러 갔다. 섶다리는 물에 강한 물푸레나무의 Y자형 몸통과 다리를 거꾸로 세우고 그 위에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를 얹어 다리를 만드는 것이라 했다. 늦가을에 만들어 다음 해 장마가 오기 전 5월에 거둬들인다고 하니, 섶다리를 건널 수 있는 우리 모두는 운이 좋았다. 장난을 치듯 다리를 흔들며 건넜다. 다리를 건넌 후에야 섶다리의 일부분을 자세히 보았다. Y자가 거꾸로 세워진 것이 치아 뿌리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가을에 다시 찾아온 치통을 생각했다. 흔들흔들거리는 이와 굳건히 지키려는 잇몸이 섶다리와 강물의 바닥처럼 느껴졌다. 판운리를 지나자 비가 내렸다. 아직 물들지 않은 목백합나무가 반쯤 접혀있는  우산 같았다.


치과를 찾았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치통에 대해 설명했다. 유일한 개연성이라면 레드 와인을 먹은 후에는 괜찮고 화이트 와인을 마신 후에는 통증이 생긴다는 거였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진지했고 젊은 의사의 답변은 너그러웠다. '레드 와인만 드시면 되죠'라고 말해 줬다. 잇몸은 생각보다 건강했다. 알 수 없는 이 두통의 원인이 치통은 아니었다. 다만 엑스레이상 턱관절이 좋지 않으니 턱으로 시작된 통증이 치통이라 착각할 수 있다고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오른쪽 두 번째 어금니에서 깨진 보철물을 발견했다. 나는 두통의 원인이 치통이 아닌 것이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아리송한 상태로 새로운 보철물 비용 27만 원을 결제했다.


가을 두 번째 여행지는 광릉수목원이었다. 영월과 다르게 위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제 다녀온 동생의 말로는 숲 사이를 걷는 것이 제법 쌀쌀했다고 했으나, 오늘은 따사로웠다. 오늘을 선택한 것이 나의 운인지 나의 딸 운인지 헷갈렸다.  전나무숲길을 걷는 동안 한 달에 한번 광릉수목원에 간다는 고운로 그 아이 작가님을 생각했다. 우리들만의 기호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가 유치하다는 생각에 생각을 멈췄다. 조금 더 숲길을 올라가니 굵은 가지가 무참히 잘린 커나란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상처는 아물었으나 염증으로 뭉개진 자리에는 더 이상 새 가지가 자라지 않았다. 내가 보고 있는 나무를 머리를 한껏 틀어 올린 여자도 보고 있었다.   여자의 뒷모습이 지난 여름 젖소를 혼자 키우다 쓰러진 아랫집 경아 아주머니의 젊은 시절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젊은 치과 의사와 치위생사의 손놀림은 빠르고 부드러웠다. 임시 보형물을 떼어낸 자리를 보여줬다. 희고 노르스름한 것이 피자치즈 같기도 하고, 영월에서 먹은 옥수수 막걸리 빛깔 같다는 생각도 했다. 가볍게 입을 헹구고 다시 누웠다.  치아 뿌리와 가까워진 그 자리에 바람을 불어넣는다고 했다. 잠시 통증이 시큰거릴 것이라 했다. 젊은 의사는 모든 과정을 친절하게 예고했다. '솜을 끼우겠습니다.' 혀와 이 사이에 솜을 물었다. 솜에 침이 고인다. 솜이 침을 먹고 부풀어 오른다. '약을 바르겠습니다.' 액체가 닿으니 시큰거린다. '보철물을 끼우겠습니다.' 보철물이 끼워진다.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다. 땅을 다지듯, 나의 두 번째 어금니가 된 새로운 보철물을 다진다. 


수목원 출구로 향하는 남편과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걸음이 뒤뚱거린다. 딸의 걸음은 조금 더 뒤뚱거린다. 딸의 걸음걸이가 불안한 것이 어쩌면  장애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길 한편에서는 휠체어를 탄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즈로 서있는 부인의 사진을 찍어준다. 행복해 보였다. 때마침 늦은 오후의 바람이 불어와 계수나무의 마른 잎사위 냄새를  달콤하게 퍼트린다. 나는 달고나 냄새라 했지만 딸은 탕후루 냄새라 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과 향기를 느끼는 이 가슴 벅찬 시간이 내 생애에 몇 번이나 찾아올까. 이 가을이 끝나기 전 시큰거리는 에세이 한 편을 쓰리라 마음먹은 것이 그때였다.


빌리조엘의 '피아노맨'을 선곡한다. 새 차의 서라운드 오디오는 웅장했다. '피아노 맨'이 콘서트 버전 피아노 버전으로 무한 재생되는 순간에 친정 아빠에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엄마의 갈비뼈에 금이 간 거 같다고 했다. 벌써 4번째, 올해만 2번째다. 이제  엄마의 갈비뼈는 가벼운 마찰만으로도 쉽게 골절된다. 남편은 차를 서울 쪽으로 돌린다. 나는 침착하게 야간에 진료하는 정형외과를 검색한다.

이번에는 몇 번째 갈비뼈일까? 엄마가 겪을 통증과 골절된 엄마의 갈비뼈를 바라볼 시간들이 시큰거려 온다. 차가 막힌다. 가을의 통증과 서정 사이처럼 남편은 차선을 왔다 갔다 한다.


영월 판운리 섶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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