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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십니까? 저는 브런치 작가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우리들의 아우라에 대하여

by 포도송이 Mar 17. 2025

감기 바이러스가 겨울의 위세와 함께 한창 으스대던 때였다.


도서관에 자주 오시는 이용자 한 분이 데스크에 왔다. 일주일 전만 해도 잔뜩 감기에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출해 달라고 하시는데 비교적 목소리가 가벼웠다. 순간, 나의 스몰토크 본능이 튀어나왔다.


"감기가 좋아지셨나 보네요"

"어머 저 감기 걸린 거 어떻게 아셨어요?"

"지난번에 목소리가 잠기신 거 같아서요"

"아~"

활짝 웃으시며 말하는 것을 보니,  나의 관심이 싫지 않으신 모양이다. 다행이다. 가끔 나의 스몰토크가 괜한 오지랖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용자와 나 사이에 친근감 지수가 10% 상승 성공!

 

그때였다.


"제가 사실은 소설가예요"

갑자기 밝히는 본인의 정체성에 잠시 당황했지만, 반백년이나 살아온 나에게 늘어나는 건 감뿐이지 않은가? 나의 공감은 가을 단감보다 잘 익어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어머 어쩐지요. 느낌이 달랐어요. 사실 저는 브런치 작가예요"

"어머, 브런치 알죠. 제가 아는 분도 브런치에 글 쓰세요."

"어머, 진짜요?"

이건 뭐지? 왜 갑자기 나는 브런치 작가라는 말을 한 거지? 어쨌거나 공감에서 동질감 지수까지  급상승한다.


이윽고 나에게 브런치 필명까지 물으신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을 원하지 않았던 내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부끄럽다고 핑계를 대었으나, 혹시나 생길 수 있는 불편함을 감내하기는 싫었다. 이후 그분은 서가에 가서 본인이 집필한 책을 가져다가 나에게 건네주셨다. 나는 꼭 읽어보겠다 말하였다.


그분이 나가신 후, 나의 머릿속은 덜 익은 감처럼 푸르뎅뎅하였다가, 푹 익은 홍시가 되었다가 했다. 그게 얼굴빛으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나의 스몰토크의 목적은 사실 친근감 정도의 표시였었다. 그런데 그게 상대방이 소설가라는 정체성까지 밝히는 빅토크가 되어 돌아올 줄이야. 게다가 나는 왜 브런치 작가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을까? 이것은 주책인가. 솔직함인가. 마구마구 헷갈렸다.


사실, 도서관에 근무하다 보면, 글을 쓰시는 분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분들이 글을 쓰는 분임을 알게 되는 계기는 비슷하다. 본인의 책을 대출하면서 사실은 제가 이 글을 쓴 작가라고 밝히는 경우, 본인의 책을 기증하면서 정체성을 밝히는 경우, 본인의 등단이나 수상 소식을 슬쩍 전달하는 경우 등 대부분은 그분들을 통해 직접 알게 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들었던 내 느낌은 '어쩐지 느낌이 다르더라'였다.


정말 그랬다. 글을 쓰는 사람들, 그들의 아우라(aura)는 달랐다. 배우에게는 배우의 아우라가, 운동선수에게는 운동선수의 아우라가 있듯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아우라가 있다. 문제는 그 아우라를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 말을 했더니, 그게 어떤 건데 하고 물은 적이 있다. '무진장 잘생겼어', '비율이 달라', '체격이 다부져' 이렇게 딱 부러지게 설명하면 좋으련만, 머릿속에서 맴도는 그 느낌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사실, 이상한 것은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들이 글을 쓴다는 고백을 하는 타이밍에 항상 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아우라가 있는 것일까? 데스크에 앉아서 컴퓨터를 바라보고, 책을 정리하고, 가끔 책이나 들춰보고 있는 나에게도 글을 쓰는 사람의 아우라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옆에 있는 친한 동료에게 쓰윽 물었다. 혹시 나에게서 글을 쓰는 작가의 느낌이 있냐고. 동료는 그런 느낌이 난다고 했다. 그게 뭘까 하고 물었더니 '지성미?'라고 농담을 던지지만 쉽게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아우라.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실제 그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그런 아우라를 가진 것일까, 나의 브런치 이웃들과 길을 가다가 마주친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아볼 수 있을까, 우리가 이 브런치라는 우주 속에 던져놓은 수많은 문장과 비유들이 온전히 그 사람의 것이었음을 알아챌 수 있을까.


사실은 조금은 외롭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명 작가들이야 어딜 가도 주목받겠으나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밝힐 수 있는 공간이 몇 군데나 될까? 병원에서,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내가 사실은 작가라고 밝힐 수 없지 않은가. 그나마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일상을 채워나가는 곳이요. 그들이 쓰려고 하는 책들의 최종 도착지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브런치 작가라고 밝혔던 나의 주책을 더 이상 책망하지 않겠다. 내가 그분에게서 작가라는 동질감을 느꼈듯이 그분 역시 나에게서 작가라는 동질감을 느꼈을 테니까. 누가 뭐래도 우리는 우리를 알아봐 주기를 원하고 있으니까.


그때는 겨울이었다. 감기 바이러스가 으스대던.

어쩌면 브런치 작가라고 말하던 그때도 한창 구독자 수가 늘어날 때였으니 나의 문장들도 잔뜩 으스대고 있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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