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배우이자 출판사 대표인 박정민이 성해나의 소설 『혼모노』에 남긴 추천사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양평도서관을 한마디로 소개해보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힐링카페를 왜 가나, 양평도서관 가면 되는데.”
나는 오십에 들어서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재미있었다. 글을 쓸 때 시간이 가장 빨리 갔다. 그야말로 시간 도둑이었다. 문제는 직장생활과 살림을 병행하자니 늘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반 백 살에 누릴 수 있는 여행이나 휴식의 즐거움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름 생각한 것이 ‘도서관 여행자’가 되는 것이었다. 여행하듯 도서관에 가고, 간 김에 몇 줄이라도 써보자는 계획.
옅은 안개가 속삭였다. 급할 건 없잖아. 속도를 줄이는 건 어떨까?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곳이 서울 동쪽에서 1시간 내로 갈 수 있는 양평도서관이었다. 10월 초순, 가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달리고 싶었는데, 마침 옅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반가웠다. 안개는 내게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빠르게 질주하던 삶의 속도도 서서히 줄어드는 듯 했다. 덕분에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도착 시간보다 15분 늦게 도착했다.
양평도서관의 첫인상은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흰 도화지 같은 외벽, 탁 트인 잔디밭, ‘도서관’이라 새겨진 단정한 조형물, 그리고 까치발을 들면 보일듯한 강물까지. 내가 꿈꾸던 도서관의 풍경이 그곳에 다 모여 있었다. 외벽의 재질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흰색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이 도시의 공기가 그만큼 맑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행자인가, 도서관 이용자인가.
경계가 모호한 채로 1층 로비에 들어섰을 때, 다시 한번 헷갈렸다. 이곳은 카페인가, 도서관인가. 1층 한가운데 카페가 있었고, 높고 깊은 서가 벽면에는 양평군의 읍 면에서 기증받은 도서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양평을 대표하는 도서관이자, 이 도시의 랜드마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하면서도 섬세한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다.
1층 어린이실에서는 ‘우리 아이 천 권의 기적’이라는 독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천 권의 책을 읽은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어떤 청소년으로,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다독이 정말 좋은 독서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책을 읽는 속도에만 매몰되어 정작 책이 주는 깊은 울림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나의 목적지. 2층 종합자료실로 향했다. 여행지도에 스탬프를 찍듯 전국 도서관을 하나로 이어주는 ‘책이음’ 회원증에 양평도서관을 더했다. 도서검색 PC 옆, 강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는 철저히 읽고 쓰는 이용자로 머물기로 했다. 역시, 도서관만큼 고요한 장소가 없었다. 유일한 소음이라면 회원가입을 묻는 이용자의 질문과, 그것에 응대하는 직원의 다정한 목소리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은 도서관 휴게실에서 먹는 컵라면
두 시간을 꼬박 앉아 있으니 배가 고팠다. 1층에는 이마트 24 편의점이 있었다. 컵라면이 먹고 싶었다. 요즘은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는 식사를 금지하는 도서관이 예상외로 많았다. 과연 이곳에서는 컵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편의점 문을 여는 순간까지 두근두근거렸다.
'대박, 컵라면이다'하마터면 주책없이 외칠뻔했다. 더 고를 것도 없었다. 오늘의 점심은 도서관 컵라면이었다.
한때 나는 도서관을 ‘라면 먹는 재미’로 다녔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을 핑계 삼아 친구들과 도서관을 찾았다. 엄마의 잔소리 없이 라면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솔직히 도서관 식당 냄새에 묘한 거부감이 있었으나 컵라면에 물을 붓는 순간 그 모든 냄새를 평정하는 건 오직 내 앞에 놓인 컵라면이었다.
컵라면에 나름의 예절이 있었다. 3분을 기다릴 것, 뚜껑은 들추지 말 것. 3분 기다리기, 절대 뚜껑 들춰보지 않기. 하지만 인내심은 30초를 남겨놓고 언제나 무너졌다. 빳빳한 파마머리처럼 덜 익은 면발을 향해 맹렬히 젓가락이 달려갔다. 컵라면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는 강물 위의 쓸쓸한 물안개와 달리 포근했다. 나는 그 포근한 연기를 마시듯 뜨거운 국물을 들이켰다.
쉼과 여백이 있는 도서관에서 제대로 힐링했다.
컵라면까지 맛있게 먹었다면, 다음은 ‘쉼’의 시간이다. 배를 채웠으니 이제는 도서관에서 제대로 힐링을 즐겨야 한다. 양평도서관이 컵라면만큼 좋았던 건, 공간의 여백이 많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북적이는 카페에서는 고요한 사색을 즐기기 어렵고, 사람이 없는 카페에서는 커피 한 잔으로 몇 시간을 버티기에 눈치를 보게 된다. 하지만 도서관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누구도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다. 갤러리 같은 2층 로비,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3층 테라스, 루프탑 카페처럼 운치 있는 옥상정원. 지금까지 내가 가본 도서관 중 여백이 가장 많았다. 완벽한 ‘쉼’ 그 자체였다.
최근 신축된 도서관들은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한다. 규모도, 시설도, 프로그램도 화려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웅장함에 압도되지만, 도서관의 한 구석에 앉아 책을 펼치거나 공부를 시작하면 금세 깨닫게 된다. 도서관에서 정작 중요한 건, 몇 시간을 앉아 있어도 끄떡없게 하는 편안한 의자라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양평도서관의 의자들은 내 엉덩이에게도 휴식을 제공했다.
양평도서관의 특별한 점은 바로 옆에 미술관이 있다는 것이다. ‘양평군립미술관’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미 도서관 내부에도 다양한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미술관까지 들른다면 여행의 기쁨은 두 배가 된다. 시간이 남는다면 조금 떨어진 '황순원문학촌소나기마을’에도 들러보길 권한다. 『소나기』를 현실로 옮겨 놓은 야외와, 빛으로 물든 디지털 공간이 풋풋하고 싱그러운 소년·소녀의 감성을 되살려줄 것이다.
낯선 도시로 떠나는 도서관 여행을 더 여행답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900번대 서가에 들어가 여행 관련 도서를 읽는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프라하의 묘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서관에 가면 때로 기차역 플랫폼의 차일 아래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이국의 어느 장소들에 관한 책을 읽노라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에 젖는다.”
낯선 도서관을 여행하는 내내, 그 문장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낯선 동네의 낯선 도서관이 좋은 여행지인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익숙함이라는 권태를 이겨낸 낯선 생각이, 뜻밖에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로 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가을이니까. 더더욱 그렇다. 생경하지만 포근한 문장 하나를 써보고 싶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
*넷플릭스, 왜 보나! 삶은 도서관 보면 되는데.... 누군가 이 한 마디 남겨주시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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