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별 Mar 07. 2024

모래알 같은 불안, 파도 같은 불행

월요일부터 또 아파서 오늘까지 계속 죽으로 연명하고 있다. 좋아하는 커피와 빵을 먹지 못하는 강제 금욕생활에 들어갔다. 새삼 내가 커피를 이렇게 좋아하는, 아니 커피에 중독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루 한잔 마시는 커피의 작은 행복을 빼앗아간 생리통을 저주하고 있다. 지난 1월에도 혹독한 생리통으로 일주일을 앓았는데, 이번에도 비슷하다. 진통제와 소화제만 사러 갔다가 약사에게 여성에게 좋다는 비싼 영양제를 강매당했다. 극심한 생리통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면서 두 알을 삼키고, 성분들을 찬찬히 찾아보니 내가 먹으면 좋지 않은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 질환이 있는 사람은 먹지 않는 게 나은 성분이다. ㅜㅜ) 망할 약사를 원망하며 침대에 누워있자니,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약사의 말에 덥석 구매한 내가 바보스럽고,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지도 않고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무조건 팔아넘기려던 약사의 얼굴이 생각나서 화가 치밀었다. 이건, 그냥 약 장사꾼이다.... 다시는 그 약국에 가지 않겠다는, 소심한 복수를 계획하며, 건강한 몸뚱이의 소중함, 일상 루틴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2024년에는 건강을 위한 일들,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 절제(특히 마라샹궈), 아침마다 먹는 빵류 줄이기, 요가와 걷기&러닝 운동 꾸준하게 할 것, 과일이나 채소, 단백질 위주의 식단 챙겨보기, 요리 다시 시작하기 등등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몸이 아프니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다. 건강 챙겨보겠다고 고르고 고른, 식재료들이 어갔다. 주말에 도착한 토마토는 그 사이 맛없는 모습으로 물러지고, 사과도 주문해 놨는데, 하나도 먹질 못했다. 양배추도 그 모습 고대로, 그릭 요거트는 유통기한이 다가오고,  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베이글도 냉동실에 고대로 있다. 2월 한 달간 쉬었던 요가가 이번 주부터 시작되었는데, 가질 못하고 있고, 어제에서야 겨우 산책 정도의 걷기만 할 수 있었다. 화요일에 급한 대본은 겨우 넘겨놨지만, 요 며칠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글쓰기도 당연히 하지 못했다.


매일 아무렇지 않게 해 왔던 일들이 정지되자 생활 루틴이 무너지고, 내적 불만감이 쌓여갔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우울감에 약간의 무기력증까지 더해져 그동안 빌드업 해 온 정신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상태로 주변을 돌아보니 불안의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처럼 건강하지 않다면, 나는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될 것이고, 운동도, 일도, 지금처럼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커피와 빵의 소소한 행복, 맥주와 마라샹궈를 마주할 때의 기쁨, 매일 걷기의 즐거움, 스스로 일을 해서, 스스로를 관리하고 먹고살 수 있다는 자기 만족감이 사라질 것이다. (요즘 내가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포인트다, 내 능력으로 나를 돌보고 관리하는 일)


많이 벌지 못해도, 지금의 일상을 잘 유지하면서 일과 일상을 분리하는 라이프를 추구하고 나에게 집중하자는 게 평소 나의 신조이기도 한데, 그 신조마저 깨질 위기다. 올해부터는 작년에 했던 소액 알바가 종료되어, 레귤러 프로그램 하나만 하게 되었는데, 소득이 줄어든다는 생각만으로도 생활의 만족감이 떨어지고 불안감이 증대되었다. 지금까지는 적게 버는 대신, 시간을 활용하고 누리자는 긍정적인 모토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계속 적게 벌다가는 하고 싶은 일에 제약이 생겨서 결국 불행해지거나 인색해질까 봐 불안해졌다. (사실 고작 50만 원이 사라지는 것이고, 기회가 되면 언제고 다른 일을 겹쳐서 할 수 있다. 헌데,  '불안'하다 생각하니 한없이 불안하고 부정적으로 생각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무섭다.


의식의 흐름대로 불안을 따라가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들이 기어 나왔다. 걱정하지 마, 내가 더 큰 불안을 보여줄게,라고 말하는 듯 거침이 없었다.


의식의 흐름은 말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 불안의 요소이다. 가장 아끼는 존재(사랑하는 사람, 아이, 부모님 등)가 주는 불안도 있고, 잘 다니는 직장도 불안 요소(실직, 해고, 만족스럽지 않은 연봉 등) 매일 다니는 거리나 장소(교통사고, 각종 위험에 노출, 묻지 마 살인 등),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집도 불안하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불안으로 바뀔 수 있다. 매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우리의 일상에서,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다는 건 그래서 기적과도 같다.


그래, 일상이 기적이다.


우리 주변에 잠재하고 있는 모래알 같이 셀 수조차 없는 불안 요소가 내 이야기가 되는 순간, 그것은 파도처럼 우리 삶을 잠식시키는 거대한 불행이 된다. 언제든 어떤 불안은 형태를 바꿔 불행의 얼굴이 될 수 있고, 그것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남 일이라고 생각했을 땐, 불안에서 끝나지만, 그것이 나에게로 오면 불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불행에서 위안을 얻는 일은 의식적으로 조심하려고 한다. 위로가 아닌, 위안을 삼지 않도록.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안을 잘못 관리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적은 돈을 벌지만, 시간을 누릴 있다는 큰  장점 대신, 적은 돈에만 포커스를 맞추니 불행해졌던 것처럼.


어차피 모두에게 불안은 모래알처럼 펼쳐져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일일이 세고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불행의 파도를 걱정만 하고 있겠지만, 모래알이 펼쳐져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식하고, 그 위를 걸어 나가 아름다운 바다를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모래알은 그저 모래알일 뿐이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에 불안을 잘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나에게는 루틴의 관리인데, 올해는 우선 건강부터 잘 챙기고! 하루하루 일상을 잘 쌓아가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거창한 미래 계획보다 하루의 일상을 짜임새 있게 실천하는 것)  그냥 지나가버리는 시간들 같지만, 나름의 체계를 이루고 내 생활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 바로 루틴 = 불안 관리에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들어서'라는 말 금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