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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orsense Nov 13. 2019

로마 출국장에서 드라마를 쓰다

여행 이야기 1할 연애 잡담 9할

로마가 지루했다.

이탈리아 여행지로 로마를 빼놓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들 로마의 매력에 미쳐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나오면 그러려니 했었고, 유럽 역사도 잘 모르는데 내가 왜 로마에 4일가량을 있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로마가 멋진 곳은 맞다. 꼭 역사적인 유적지만 보러 가는 곳도 아니고 나름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이탈리아의 한 도시지만, 나에게 황홀해서 기절할 만큼은 아니었다. 아마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만 아니었다면, 로마에 바티칸 제국이 없었다면 분명 다른 데로 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내가 혼자 여행을 탓인 것 같다.


그때 찍었던 사진을 보면 모든 풍경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만 보기에만 그럴 뿐, 지금 생각해도 혼자 하는 여행을 지치도록 한 '나'는, 은연중에 썸(thing)이 있길 바라며 마지막 여행지에서 긴 여행을 견뎠다. 그러나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단순하게 말 거는 사람 하나 없이 철저히 혼자였던 것 같다. 거기서 먹은 3대 젤라토 집에서 먹은 아이스크림이나 길거리 피자만이 나의 허함을 달래주었기에 로마의 마지막 날에는 그저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로마에서 뭔 드라마를 썼다고?
@unsplash

(무려 7년 전 일이라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고 그 사람은 다르게 기억할 수 있지만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본다.) 마지막 떠나는 날, 출발시간 2시간 전에 도착하기 위해 일찍부터 서둘러 짐을 챙기고 나왔다. 그러나 헬이었던 그날의 교통상황. 택시도 없고 버스도 늦게 와서 나는 정말 비행기를 놓칠까 봐 전전긍긍했고 막히던 도로 위에서 공항이 보이길 기다리며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렇게 출발 거의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겨우 수속을 하고 보딩게이트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다. 선물이고 기념품이고 아무것도 살 겨를 없이 정말 영화처럼 공항 안 사람들을 헤치며 정신 나간 듯이 달려갔다. 체크인부터 탑승게이트 까지 가는 모든 시간이 거의 20분이 채 안 걸린 것 같았다. 때마침 사람들이 탑승을 하는 중이었고, 출발 전까지는 2~30여분이 남아있었다.

그 줄 끝 즈음에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일본 사람으로 추정되는 동양인 남자가 있길래 이게 서울행 탑승게이트인지 물어보았고 그 사람은 "맞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고 나선, 그 남자가 "그런데 한국사람이세요?"라고 한국말로 나에게 되물었다. 한국행 비행기이니 그렇게 신기할 일도 아니지만 '오! 신기하다.' 싶었고 짧은 보딩 시간 동안 간단한 통성명과 함께 그는 건축 역사를 공부하러 왔다가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나는 단순 여행으로 로마에 왔다는 등의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번째 비행기에 앉았던 좌석에서 그 사람의 머리가 바로 옆 열의 한 3줄 앞에 보이던 것을 마지막으로 식은땀 닦으며 러시아로 출발했다.


@unsplash

모스크바에서 환승하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려 대기하는데 당연하게도 그 사람을 또 마주하게 되었다. 거의 4시간 정도의 환승 대기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그때 같이 보았던 항공기 스케줄 스크린이 어렴풋이 기억나고 같이 면세점에서 가서 면세품도 샀던 건 기억이 나는데,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을 텐데도 그때 어디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지워졌다.

@unsplash

다만 그 사람은 영국 영어를 구사하는 게 신기해서 영국식 악센트로 말해보라고 하고 그걸 들으면 내가 까르르 웃었던 것 그리고 '탑승 후에도 이 사람이랑 좀 더 얘기해보고 싶다.'는 그때의 단편적인 감정만 기억난다.

그렇게 각자 자리에 착석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내 좌석 쪽으로 왔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사람에게 정중하게 자신과 자리를 바꿔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고, 너무나 수월하게 그가 내 옆에 앉게 되었다. 속으로 엄청 짜릿해했지만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둘 다 피곤했지만 서로 얘기하며 쉬어가며 긴 비행시간을 견뎌 한국에 도착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
@unsplash

어떻게 서로 연락처를 교환해 귀국 후에도 그 사람과 나는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사람이 외국 학교 연수 프로그램 소개 모임이긴 했지만 관심 있을까 해서 나를 초대해주기도 했고, 그 당시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았던 북촌 한옥마을에서 만나서 전망 좋은 한옥 카페에 앉아 같이 펜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콧바람이 단단히 들어 난 외항사 객실 승무원을 하고 싶었고, 열심히 준비하는 과정에서 애매한 관계와 감정이 방해가 될까 싶어 그 사람에게 자세한 설명을 못한 채 아주 확실하게 선을 긋는 문자를 보냈다. 그는 이해한다며 계획한 것들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답장을 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 당시의 더 솔직한 속마음을 말하자면, 그렇게 몇 차례 그와 만나면서 물론 충분히 훤칠하고 점잖은 학구파스러운 매력을 느꼈고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들도 보였지만, 내가 완벽히 그를 남자로 보기에는 아마 뭔가 부족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가 나를 좀 더 원하는 액션이 있었더라면 나도 흔들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끝난 줄 알았던 드라마, 그로부터 5년 후

그렇게 그 사람과의 직접적인 연락은 끊겼지만 관계는 완벽히 끊어지진 않은 상태였다. 페이스북 친구여서 아주 아주 가끔 연중행사로 짧게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그의 피드에 여자 친구가 생겼고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한 현황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unsplash

연락하기에 어색하기 그지없는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에게 데이트 신청 비슷한 것을 했다.

"좀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 시간 되시면 반 고흐 전시회에 같이 가지 않을래요?" 이 뜬금없는 메시지에 그는 내가 자신을 기억하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고마워했고, 자신은 현재 건축 관련 대학원 과정을 위해 다시 이탈리아에 있으므로 함께할 수 없기에 반 고흐를 주제로 한 유명한 노래 "Starry starry night" 링크를 보내주는 걸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런 성의에 '그도 나에 대한 호감이 적지 않게 있구나.'하고 느꼈다.


@unsplash

내가 연락을 했던 이유는 내 안에 있던 그 사람에 대한 호감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예술적인 소재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해하고 같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갑자기 용기가 났던 건, 연락을 안 하던 그 기간 동안 혼자 나지막이 '어쩌면 서로에게 인연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아끼고 있다가, 힘든 연애에 지쳐가던 어느 순간에 그 사람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크게 부여해서였던 것 같다.

그 대화로 시작이 되어서 그와 나는 전보다 더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행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좋아하는 음악도 함께 공유했다. 그중 기억나는 것은,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를 보며 울었다던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같은 작품을 보고 똑같이 울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 사람과 나는 감수성 코드가 맞나 보다. 그럼 둘이 이야기가 잘 통하고 지루할 틈이 없겠다.'라고 생각했던 시간이다.





상상과 달랐던 현실의 연애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은 지 오래되지 않아, 그가 잠깐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많이 기뻤고 오랜 기간 만나지 못했던 사이에 어떻게 변했을지, 다시 만나게 되면 어색할지, 호감이 계속 유지될지가 궁금했다. 무엇보다도 묵은지보다 더 오래 혼자 간직했던 그림이 현실로 그려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서울에서 그와 나는 5년 만에 다시 만났다. 만나서는 베니스에서 건너온 수제 수첩과 이탈리아 전통 소스 등을 건네받았다. 나는 준비한 게 하나도 없었는데 미안하기도 하면서 날 생각해서 사온 기념품들에 감동을 했다. 그렇게 서로 강한 호감의 눈빛 교환과 각자 어떻게 살아왔는지 공유하며 시간을 보냈고, 만나고 난 그날 밤부터 출근할 시간이 가까워질 정도로 새벽녘까지 통화를 하며 서로 느끼는 감정을 확신했다.

결국 우리는 사귀게 되었고, 사귀고 난 이후에도 만날 수 없는 날들에는 엄청난 양의 시간을 전화 통화하는 시간으로 투자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특히 타지 생활을 오래 하게 되면서 오게 된 매너리즘과 자존감 하락 상태였던 그에게 나는 용기를 주고 싶어서 꾸밈없이 그가 마음을 잘 추스르고 회복할 수 있도록 따뜻한 말을 건넸다. 그는 덕분에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며 고마워했다.

또한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미래에 있을 그와 나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신이 나는 일이었다. 추석 때는 내가 이탈리아에 가고, 안되면 중간지점에서 만날까? 싶고 어찌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서로를 위한 미래가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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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가 잠깐 한국에 들어왔던 기간에 모든 일들이 일어났고, 그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거의 매일 만나며 하루하루를 아깝지 않게 보내려고 노력했고 그 시간을 대부분 산책하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채웠다. 여느 연인이 그러하듯,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그의 세계관도 바라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여친(남친)의 이성과의 룸메이트 생활을 하는 경우를 무난하게 용납할 수 있다는 점, 본인은 가능하다면 늘 뭔가를 배우러 다니는 (돈 많은) 백수가 되었으면 좋겠고, 현재 도전하려는 직업으로는 자신이 돈을 많이 벌 수는 없지만 부모님이 여유가 있기에 결혼을 혹시 하게 되더라도 경제적인 것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느끼게 된 것은, 그의 생각을 존중하고 굉장히 열린 사고를 갖고 있다 확신하지만 너무 이상적이라 현실감이 없는 조선시대 '선비'같았고, 나와는 삶을 살아가는 속력과 방향이 약간 다르다고 생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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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내야 하는 아쉬움과 좋아하는 감정이 분명 남아있긴 했지만 '이 사람과는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관계가 적절하지 '연인'관계로서는 아니구나.'라고 그가 이탈리아로 떠나간 뒤에 생각이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마음이라면 나나 그 사람에게 7시간가량의 시차와 자주 만날 수 없는 물리적인 거리의 연애는 원만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기에 관계에 대한 확신이 이미 떨어지고 있었고, 그도 대학원 생활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연락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만난 지 두 달도 안돼서 나는 그에게 이별을 선언했다. 그는 많이 아쉬워하면서도, 전에 내가 그와의 연락을 끊으려 했을 때처럼 "모든 게 잘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고, 나도 그의 행운을 빌어줬다.






시작은 해외 로케이션, 엔딩은 일본 영화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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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흔히 말하는 첫 만남, 첫인상이 사람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나 알 것이다. 난 그 로마 공항에서의 첫 만남의 판타지에 젖어 애매했던 관계를 5년이나 묵혀두고 스스로 포장하여 한 편의 드라마를 홀로 썼다.

그리고 드디어 제작을 하기 시작했지만, 제작비가 벌써 바닥이 난 것처럼 감정의 연료가 너무나 빨리 동이 나버렸다.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설계했던 그림과 그걸 실재화하는데에서 오는 차이가 크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되는 해프닝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이 드라마의 시작에 비해 엔딩은 마치 잔잔하게 마무리하는 일본 감성영화와 비슷하게 끝이나 버렸다. 그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지금 쓴 글의 타임라인이 정확하긴 한 건지 솔직히 확신은 없지만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드라마틱한 경험담이기에 시시한 결말이더라도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며 혼자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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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연애가 필요한 청춘들은 여행을 통해 기대하는 것들이 있고 기대가 산산조각이 날 때도 있지만, 몇몇의 케이스는 여행지의 추억이 필연으로 이어지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여행을 통해 드라마를 기대하는 게 영 바보 같고 허무맹랑한 짓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드라마가 허구인 것을 알면서도 보는 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거나 겪을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드라마를 보면서 각자의 목적에 맞는 만족감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풍요로움과 즐거움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여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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