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감옥

by 은해


그곳은 분홍색이었다.

빨간색처럼 너무 강렬하지도 않으면서 아늑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편안한 공간일 것이라고 믿었다. 진달래 꽃 색깔을 닮아서일까. 우리는 환하고 예쁜 핑크빛 미래를 꿈꾸며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많은 여성이 출산 준비를 할 때부터 딸이라고 생각하면 아기 옷이며 이불까지 온통 분홍 일색으로 준비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기 방을 가질 때쯤이면 보통은 딸아이의 방을 분홍색으로 꾸며주고 싶어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한 느낌의 분홍은 꽃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여성스러움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핑크 계열의 벽지에 분홍색 커튼까지 달린 방이라면 여자로서의 행복을 꿈꾸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것일까. 그런 방을 꾸며준 엄마도 흐뭇하고 그 엄마의 딸도 분홍 빛깔로 꾸며진 그 방 안에서 몸과 마음이 여물어 간다.


분홍은 여자의 색이고 파랑은 남자의 색이라고 누가 정해준 것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온 것일까.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딸을 낳았는데, 그다음 아이는 아들을 낳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여자 아이에게 파란색 옷을 입혀 키우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세대의 많은 여자가 언젠가부터 누군가에 의해서 분홍색으로 규정지어진 여자로서의 삶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성별이 여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여지없이 ‘너는 분홍색 옷을 입고 분홍색 커튼이 달린 방에서 살아야 한다.’라고 강요당했던 것은 아닐까. 이 세상 구경을 하기도 전에 딸들의 삶을 분홍으로 규정짓기를 즐겨하던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여성에게 결혼 적령기라는 굴레를 씌워 등을 떠밀고, 결혼하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아니 아이를 낳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성을 어디까지나 남성의 조력자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가.

여자에게 결혼이 곧 행복이라는 등식이 누구에게나 다 들어맞을 수는 없다.


이제 갓 태어난 너무나도 무력한 아기에게 ‘분홍색 삶이 너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의 아이에게 오히려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 매력적이고 멋지고 아름다운 색깔의 삶이 있다고 그들은 말해주었어야 한다. 따뜻한 노란색, 고혹적인 보라색, 싱그러운 초록색, 아주 순결한 흰색 그리고 강하고 시원한 파란색의 삶에 도전할 수 있도록 딸들을 이끌어 주었어야 한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아니 태어나기 그 이전부터 여자에게는 분홍색 삶이 가장 좋은 것이고 최선이라고 세뇌당한 사실에 분노한다. 그것은 폭력이요 고문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수없이 많은 여자의 삶을 규정지어준 말마디들이 그대로 우리의 뇌리 속에 쌓여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따금씩 툭 툭 던져진 그 말은 엄청난 사회적인 압력이었고 폭력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딸들이 스스로 자기의 길을 접고 남편과 아이들의 조력자로서의 삶을 택하도록 만든 엄청난 폭력이었다.


이제는 그 분홍색 환한 감옥에서 나오고 싶다.


물론 핑크빛 벽지로 꾸며 놓은 그 분홍색 환한 감옥에서 더러는 편안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등이 떠밀렸을지라도 스스로 걸어 들어간 그곳에서 더러는 행복하기도 했다. 아니 그곳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라고 스스로 믿으며 때로는 자신을 그 감옥 안으로 밀어 넣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쁜 분홍색 벽지가 아니라 황금으로 도배를 한 좋은 곳이라고 할지라도 감옥은 감옥인 것이다.

인간이란 자기 존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정받으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삶의 참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더 이상 그 누구의 조력자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빛을 내며 살아가고 싶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할 것이다.


작가 이문열은 <선택>이라는 소설에서 안동 장 씨라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기보다는 남편과 자식을 통한 자아실현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그런 길이 여성 스스로의 선택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여성으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인 압력 또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요즘 많은 지면과 방송을 통해서 결혼과 남녀 역할분담에 대한 담론이 뜨겁다. 더 이상 분홍색으로 상징되는 여자의 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딸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들의 커진 목소리에 박수를 보내며 그 담론들이 서로가 여성성과 남성성을 인정해주면서 함께 성장해 가는 아름다운 전쟁으로 마무리되기를 소망한다.


이제는 그 분홍색 환한 감옥에서 걸어 나온다.


아무도 나를 강제로 그 감옥에 가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걸어 들어간 감옥이기에 내가 안으로 잠갔던 문을 열고 걸어 나오면 되는 것이다. 당당히 걸어 나간다.

이 세상을 향해서. 더 넓은 세상을 향해서.



제목 ‘분홍색 환한 감옥’은 이태순의 시 <환한 감옥>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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