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에는 사랑을

by 은해


눈 내리는 날에는 사랑하고 싶습니다.

영하로 떨어진 매서운 추위 탓일까요. 그대의 따뜻한 손을 잡고 그대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함께 집어넣고 싶습니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둘만의 따스함으로 교감하고 싶습니다. 쌩하니 바람까지 불어올 때는 얼굴을 그대의 가슴에 파묻고 그대의 체온을 느끼고 싶습니다. 아니 ‘얍’하고 마술이라도 부려서 아주 작아진 다음 아예 그대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고도 싶습니다.

눈 내리는 날에는 사랑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처럼 사랑을 쏟아부어 줄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펑펑 쏟아지는 눈처럼 그대에게 사랑을 마구 쏟아부어 주고 싶습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힘껏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니까요.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은 그대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신혼 초 그 해 겨울은 너무 추웠습니다. 보리차가 끓고 있는 난로를 껴안다시피 하고 있어도 낡은 아파트의 가난한 창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겨울바람 소리가 나의 가슴을 에이는듯했으니까요. 홀로 쓸쓸함에 눈물짓고 있을 때 작업복 차림으로 퇴근을 해서 돌아온 그대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내게 그대의 등을 돌려대며 업히라는 몸짓을 하였습니다. 그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나를 업어주었습니다. 나를 업은 채 얼마 되지도 않는 작은 집 안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내게 위로의 몸짓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울고 있는 나를 아무 말 없이 업어주던 그 사랑은 수 백 마디의 현란한 언어보다도 더 큰 위로가 되어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눈 내리는 날에는 뜨거운 찻잔을 마주하고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흰 눈을 그저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날 밤 말없이 업어주던 그 사랑을 추억하면서..........


눈 내리는 날에는 용서하고 싶습니다.

온갖 삶의 흔적들로 여기저기 어지럽던 세상이 지난밤 내린 하얀 눈으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눈이 흰색이 아니고 다른 색깔이었다면 이렇게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순백의 아름다움이라니. 모든 것을 덮어주는 그 관용을 하얀 눈에게서 배웁니다. 긴 세월을 함께 걸어가다 보면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선명한 흉터는 아닐지라도 삶의 고단함이 가져다준 크고 작은 얼룩들로 더럽혀진 자리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하얀 눈이 내리는 오늘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싶습니다.

창 밖에 펼쳐진 새하얀 세상처럼 깨끗한 도화지를 다시 받아 들고 고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두 명의 눈사람을 그려 놓고 남자 눈사람에게는 멋진 모자를 씌우고 여자 눈사람에게는 앞치마를 입혀주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녁상을 차려야 하니까요. 눈 내리는 날에는 아이처럼 소꿉장난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눈 내리는 날이면 아주 새하얀 세상에서 신혼의 단꿈을 다시 꾸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눈 내리는 날 저녁 식탁에는 와인을 준비하고 싶습니다.

샤또 마고 같은 고급 와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소박한 가격의 와인 한 병을 준비하고 식탁 한가운데에는 키 낮은 두 개의 촛불을 밝히고 싶습니다. 눈 내리는 날 하루를 지내면서 떠오른 상념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와인을 마시고 싶습니다. 붉은 포도주가 몸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르면 마음속 갈피갈피 간직해 두었던 눈송이같이 뽀얀 이야기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고 식탁 위로 나와 앉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릅니다. 고만고만한 외로움과 행복감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무도회장 같습니다. 무슨 춤을 추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추고 싶은 대로 추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다가 눈이 그치면 마음속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을요.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는 그대와 함께 조금은 취하고 싶습니다.


눈 내리는 날이면 그대를 위해 시를 쓰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다가 고난을 만났을 때 그 고난 때문에 상대를 버린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이란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인생의 고난을 함께 견디고 인내하는 의리 같은 것이 아닐는지요. 바람이 불고 눈이 마구 흩날리던 그 겨울을 그대가 곁에 있어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때처럼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오늘 그대를 위한 시를 쓰겠습니다.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혈육보다 더 진한 정으로 그대를 지켜주겠노라는 다짐의 시를 쓰면서 오늘 밤엔 가만히 그대 곁에 누워보겠습니다.

아, 눈 내리는 날에는 마음껏 사랑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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