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보다는 둘이 낫다.
성서의 창세기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래서 신은 남자에게 여자를 만들어 주었다는 신화가 등장한다. 그 신화 속에서 남자를 위해서 여자를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사람이 혼자인 것보다는 둘이 더 낫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유사 이래 지금까지 결혼이라는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일 보도되는 뉴스를 보면 남녀 간의 결혼으로 인해 빚어지는 수많은 불행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완벽하지 못해서 서로 다른 성性을 가진 자와 결혼하게 되면 여러 가지 갈등과 부조화가 생기게 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정말 나쁜 것이니 절대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도록 해라.’하고 권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자기들의 결혼이 잘못되어 불행하게 살면서도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결혼시키기를 원한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니 지지고 볶으며 살더라도 좋은 짝을 만나서 함께 살도록 해라.”라고 부모들은 말한다.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신이 그랬던 것처럼.
혼자는 왠지 불안하다.
삶을 살아갈 때도 혼자 살아가는 것은 외롭고 불안한 것처럼, 여행을 할 때도 짝꿍이 있어야 안심이 된다. 어떤 이들은 혼자서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나는 상대가 누가 되었든 꼭 동행이 있어야 어디든 떠날 수 있다. 심지어 여고 시절에는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갈 때도 꼭 친한 친구 한 명 데리고, 팔짱을 낀 채 다녀오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 화장실 문 앞에서 서로를 지켜주고 기다려주곤 했다. 교실로 돌아올 때도 팔짱을 낀 채 들어서면 선생님이 화장실도 같이 다니는 거냐며 놀리기도 했다.
그 짧은 화장실 여행도 혼자보다는 역시 둘이 안심이 된다. 친구가 함께 있으면 화장지가 떨어졌을 때 챙겨줄 수도 있고 수업 시작 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 아직 시간이 남았는지 알려주기도 한다. 얼마나 든든한가.
더러는 화장실 여행에도 늘 동행하던 그 친구와 싸워서 여러 날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낸 적도 있지만 삐쳐있는 그 시간에도 속으로는 그 친구와 화해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다니는 것은 왠지 외롭고 불안하니까.
사람이 늘 그립다.
여고 시절 화장실을 같이 다니던 그 친구와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니 아주 가끔 서로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이다. 대신 우리는 각자 결혼해서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을 갖게 되었으니 새로운 친구가 생긴 것이다. 새로 생긴 그 친구와는 더 많은 일을 같이 한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함께 여행을 한다.
그렇게 신의 뜻대로, 부모님의 바람대로 모든 것을 함께하며 잘 지내다가도 어쩌다 싸움이 나서 잘 풀리지 않으면 냉전에 돌입한다.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자기가 옳다며,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고 버틴다.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자며 전투태세를 강화하고 허물어지려고 하는 마음을 다잡는다.
아, 하지만 전의戰意를 불태우며 두 주먹을 불끈 쥐던 그 순간에도 마음 한 귀퉁이에서는 벌써 사람이 그립다. 사람이 그리워 슬그머니 주저앉는다.
‘스타일 좀 구겨지면 어때.’ ‘신께서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잖아.’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사람 하나 건진다. 혼자가 되어 외롭고 불안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이긴다.
사람은 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신이 우리 안에 슬쩍 숨겨놓은 ‘더불어 유전자’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고 더 많은 세월을 살아갈수록 사람이 더욱 그립다. 소원하게 지내던 형제도 그리워지고 어릴 적 소꿉친구들도 그립다. 더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먼 대륙에 살고 있는 어느 한 영혼이 문득 그리워져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어느 시인의 시 구절 하나가 생각난다.
'하필 이 저물녘
긴 그림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한 그루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사람을 그리워하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 오 인태>
사람이 그립다.
사람이 늘 그리운 것은 우리의 유전자 속에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도록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