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좀 긁어줘

by 은해


등이 가렵다.

매일 샤워를 하는데도 한 번 씩은 등이 가렵다. 옆에 다른 식구가 있으면 등 좀 긁어달라고 한다. 그러면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내 등을 긁어준다. 등을 긁어 주면서 묻는다. 어디? 여기? 아니, 아니. 조금 아래. 요기? 아니 쪼끔만 옆으로. 아, 요기? 응 응응 맞아 거기. 등을 긁어주는 사람이 가려운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 긁어주면 정말 시원하고 좋다. 하지만 더러는 내가 아래로, 위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라고 말해줘도 엉뚱한 곳을 긁어대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 혼자서 등을 긁어보려고 온갖 애를 써보지만 ‘등’이란 곳은 절대 나 혼자서 속 시원히 긁을 수 없는 너무도 먼 곳이다. 우리 몸의 다른 곳은 스스로 긁거나 주물러주면서 돌볼 수 있지만 ‘등’은 누군가가 긁어주고 토닥여주어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대가 필요하다.

내 등을 가장 시원하게 긁어주던 사람은 할머니다. 어릴 적 할머니 방에서 잠이 들 때면 할머니는 늘 내 등을 긁어주었다. 그것도 한두 번 긁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잠들 때까지 슬 슬 긁어준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긁어준다. 농사일로 갈라지고 거칠어진 할머니의 손바닥으로 등을 긁어주면 아주 시원했다. 등을 긁어주면서 할머니는 늘 뭐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이쁘지’ ‘착하지’ 같은 말을, ‘어이구, 이쁘다’ ‘착하다’ 같은 소리를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데 나는 잠이 든 척했지만 그 말을 다 듣고 있었다. 할머니는 등을 긁어주는 일 말고도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예쁜 옷을 입혀주고, 업어주고, 안아주고 했지만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할머니가 내 등을 내가 잠들 때까지 슬슬 긁어주던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난 지금도 식구들의 등을 잘 긁어준다. 요 쪽 저쪽 긁어주고는 ‘시원하지?’하면서 어릴 적 할머니가 긁어주던 그 등을 생각한다.

등을 긁어주며 키운 그 아이들이 자라면 어른들은 서로의 등을 긁어주며 살아갈 짝을 찾아주고 싶어 한다. 어른들이 자식들의 나이가 차면 결혼하라고 성화를 대는 것도 오래도록 함께하면서 서로의 등을 긁어줄 사람을 붙여주고 싶어서다.

그대의 등을 안아주리.

우리는 여러 가지 경우에 서로 안아준다. 기쁠 때도 얼싸안고, 슬픈 일이 있을 때도 서로 부둥켜안고 운다. 안아준다는 것은 기실 그 사람의 등을 안아주는 것이다.

그 안아주는 자세를 보면 등을 만지거나 쓰다듬어 주는 자세다. 누군가를 안으면 손은 자연스레 그 사람의 등에 가 닿는다. 열심히 하라며 상대를 격려해 줄 때도 등을 두드려 주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상대를 위로해 줄 때도 우리는 그 사람의 등을 토닥인다. 우리는 왜 그렇게 등을 토닥여주는 것일까.

수필가 최민자는 그의 작품 <외로움이 사는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엊저녁, 욕실에서 비누칠을 하다가 우연찮게 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무심코 돌아본 벽거울 속, 뭉게구름 화창한 등판 한가운데에 어스름한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만져지지 않는 견갑골 등성이 아래 후미진 골짜기, 허리를 구부려도 어깨를 젖혀 봐도 내 손이 닿지 않는 비탈진 벼랑 외진 그늘막에, 출구를 찾지 못한 한 마리 짐승처럼 그곳에 내 외로움이 산다. 나 아닌 타자만이, 오직 그대만이 어루만져 줄 수 있는 한 조각 쓸쓸한 가려움이 산다.’

그녀의 말대로 그곳에는 우리의 외로움이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등을 토닥여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내는 일이다. 누군가가 내 등을 한 번 씩 토닥여줄 때마다 내 안에 은밀히 숨어있던 외로움이 한 되가웃 쯤 덜어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번씩 외로움을 덜어내야만 우리는 아주 조금씩 행복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렇게 서로 등을 토닥이며 서로의 외로움을 덜어내줄 때 비로소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등은 그렇게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토닥이며 살아가도록 마련된 축복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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