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새벽은 유난히 조용했다.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 작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소리에 서연은 눈을 떴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하늘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이 귓가를 스쳤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더니, 어제의 기억이 밀려왔다. 김영갑 갤러리, 바다 위로 튀어 오르던 돌고래들, 그리고 달콤했던 귤밭에서의 고백.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10분. 밖은 아직 캄캄했지만, 동쪽 하늘이 아주 천천히 빛을 머금고 있었다. 서연은 조용히 이불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같은 방에서 자고 있는 다른 여행객 두 명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한 명은 간간이 코를 골았고, 다른 한 명은 이불을 끌어안고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서연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방을 나섰다.
준호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공용 공간의 베란다 쪽 작은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 카메라 가방이 놓여 있었고, 텀블러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연은 가만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을, 봄, 여름, 그리고 이번 겨울까지, 네 계절을 함께 보낸 그의 모습은 이제 너무나 익숙했다. 그의 하나하나의 동작, 생각에 잠길 때의 표정, 웃을 때 눈가에 모이는 주름까지.
"일찍 일어나셨네요."
서연이 나직이 말했다.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 속에 담긴 다정함은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커피 준비했어요. 아직 뜨거울 거예요."
준호가 테이블 위의 다른 머그잔을 가리켰다. 그는 이미 서연이 일어날 시간을 알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
"서연 씨하고 오름 올라가려면, 일출 전에 움직여야죠. 오늘 하루치 감동을 예약해둬야 하니까."
그는 웃으며 머그잔을 내밀었다. 따뜻한 커피의 향이 새벽 공기 속으로 퍼졌다.
"남자 도미토리에서 새벽 네 시부터 뒤척이다가 결국 산책 나갔다 왔는데, 서연 씨는 곤히 잠들어 있더라고요. 깨우기 아까워서 기다렸어요."
준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미 등산복 차림이었고, 신발까지 신은 상태였다.
"사실은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하는 내내 '서연 씨가 안 일어나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와 사투를 벌였어요. 일출 놓치면 제가 태양을 직접 그려야 할지도 몰라서."
서연은 조용히 그 옆에 앉았다. 게스트하우스의 테라스에서는 어스름한 바다가 보였다. 밤새 잠들지 않고 계속 쉼 없이 움직이는 파도.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어젯밤 도미토리 옆방에서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심하던데. 잘 주무셨어요?"
서연이 웃으며 물었다.
"난 피곤해서 그대로 잤어요."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준호 씨가 여자 도미토리에 같이 있었으면 좀 더 조용했을 걸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여러모로 문제가 될 것 같네요."
"근데 진짜 새벽에 오름 가는 건 처음이라 좀 긴장돼요."
서연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준호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새벽엔 사람이 제일 정직하대요. 얼굴에 필터도 없고, 말도 덜 가공돼 있죠. 지금 이 커피도, 아마 하루 중 가장 진심일걸요."
그가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새벽빛에 반사된 그의 눈이 반짝였다.
"준호 씨, 아침부터 그런 말 하면 오늘 하루 철학 모드로 갈 것 같은데요."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철학 아니에요. 경험에서 나온 진리죠. 그리고 오늘 우리 등반 성공하면… 제주 오름 명예의 전당에 이름 올려야죠. 새벽 다섯 시 반 팀. '뀰까당 등정대'라고."
준호가 손으로 허공에 그 이름을 그리며 말했다.
"귤도 먹었고, 이제는 오름도 오르고, 감정도 올라야죠. 인생은 결국 고저장단. 오름이 우리 인생과 닮았네요. 올라가는 과정은 고단하지만,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그 모든 걸 보상해 주죠."
준호는 해돋이 방향을 가리키며 윙크했다.
"그리고 이 경치가 더 특별한 이유는 서연 씨랑 함께여서."
"준비 다 됐어요? 카메라 배터리 다 챙겼고요. 조금 쌀쌀할 테니 재킷 하나 더 챙겨요."
준호가 가방에서 경량 패딩을 꺼내 서연에게 건넸다.
"그럼 출발해 볼까요, 내 등정 파트너?"
준호가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서연은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새벽빛 사이로, 어제의 달콤함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었다.
차를 타고 용눈이 오름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점점 붉은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주변 풍경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연은 창문을 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달랐다. 도시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비옥한 화산토와 식물의 향이 섞인 제주의 아침 냄새.
"이렇게 새벽부터 사람들이 있네요."
서연이 놀라며 말했다. 주차장에는 이미 몇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오름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의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일출 명소니 까요. 하지만 걱정 마요. 정상에서 우리 공간은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준호가 트렁크에서 가방과 장비를 꺼내며 말했다. 서연은 그가 얼마나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삼각대, 여러 개의 렌즈, 그리고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차까지.
"여기예요. 김영갑이 가장 사랑했던 오름. 그의 사진 속에서 수없이 본 그 곡선이, 지금 우리 눈앞에 있어요."
준호는 감탄하듯 말했다. 오름은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짐승처럼 고요히 누워 있었다. 부드러운 능선 위로 얇은 안개가 흘렀고, 바람은 숨을 고르듯 천천히 불었다.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숨 쉬는 것 같아."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갤러리에서 본 사진 속 풍경이 실제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 오름, 몇 해 전엔 한 해 동안 사람들 못 오게 막았던 거 알아요?"
서연이 말을 보탰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오름이 지친 거죠. 자연도 숨이 차면 좀 쉬어야 하니까. 그게 또 김영갑 선생님의 사진 철학이랑 닮았어요. 기다림, 조심스러움, 그리고 존중."
준호의 목소리에는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서연은 그가 단순히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풍경과 대화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분 사진 속의 용눈이 오름은 그냥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날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생명체처럼."
서연이 말했다. 그녀는 문득 어제 카페에서 준호가 말했던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의 사진 속에는 풍경뿐만 아니라 삶이 담겨 있었다.
"오늘 우린 그 표정을 보러 온 거네요."
준호가 부드럽게 서연의 팔을 잡았다.
"자, 이제 좀 힘든 길이 시작될 거예요. 천천히 올라가요.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까."
등산로는 생각보다 완만하게 이어졌다. 어두운 새벽길을 조심스럽게 오르는 동안, 서연은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괜찮아요? 좀 쉬었다 갈까요?"
준호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서연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서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서울 지하철 이용자를 너무 얕보시면 안 돼요."
서연은 다소 평온한 상태로 말했다.
"매일 출근길에 삼십 분씩 걷고, 환승할 때마다 두 층 이상 계단 오르내리고, 마감 날에는 사무실에서 출판사 창고까지 뛰어다니는 사람이에요. 이 정도 오름은 서울 시청역 환승보다 쉬운걸요?"
준호가 놀란 얼굴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우와, 서울 사람들은 무시할 게 아니었네요. 그럼 저보다 훨씬 체력이 좋으실 수도 있겠어요."
"당연하죠. 우리 서울 강철체력이 이렇습니다. 횡단보도 뛰어 건너기, 지하철 계단 뛰어올라가기, 회의실 직전 질주... 모두 일상 훈련이에요."
"그렇군요. 제주도에서는 그런 훈련이 없어서..."
준호가 진지한 척 말했다.
"사실 뉴욕에서 급하게 제주도로 와서 제 나름의 훈련을 했어요. 화산 분화구 옆에서 자고, 파도소리에 맞춰 운동하고, 돌하르방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근력 운동도 했죠. 맨해튼 고층빌딩 대신 오름을 오르내리면서 적응 훈련한 덕분에 할만했어요. 그리고 사실 제주도의 돌담은 다 제가 쌓은 거예요. 아침 운동 삼아서요."
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감각이 제주도의 바람처럼 거침없으시네요."
준호는 웃으며 물통을 넘겼다.
"그래도 물은 마셔야죠.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저기 보이는 게 정상이에요."
어둠 속에서도 오름의 정상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늘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고, 주변 풍경도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땐, 동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용눈이 오름 한쪽 정상에 앉아 있으면 마치 바람의 언덕에 오른 듯한 기분이 든다. 사방이 트인 능선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세상의 소음을 잠재우고, 오직 자신의 숨소리와 바람의 리듬만이 귀에 맴돈다.
"와... 정말 멋있네요."
서연은 숨을 들이켰다. 눈앞에 펼쳐진 제주의 풍경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웅장했다. 동쪽으로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이, 서쪽으로는 드넓은 평야와 점점이 박힌 오름들이 보였다. 얇은 안개가 마치 이불처럼 대지를 덮고 있었다.
준호는 재빨리 카메라와 삼각대를 세팅했다. 그러나 셔터를 누르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그저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끔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냥 보기도 해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도 아름답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더 진실하니까요."
서연은 준호의 옆에 서서 함께 풍경을 바라보았다. 수평선 너머로 아주 얇은 태양의 테두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초록빛 오름 사이로 금색 빛줄기가 스며들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서연은 숨을 고르며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동쪽엔 오름이 이렇게 많은데, 서쪽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요. 논도 있고요. 제주 지형이 참 재밌죠. 같은 섬인데도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손으로 지형을 그리듯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 태양이 점점 더 높이 떠오르면서, 대지의 색깔이 달라지고 있었다. 어두웠던 풍경이 붉게, 그리고 금빛으로 물들어갔다.
"사실... 오름 이름이 왜 '용눈이'인지 알아요?"
준호가 서연에게 물었다.
"용의 눈 모양이어서 그런가요?"
"맞아요. 정상에서 보면 화구가 용의 눈처럼 보인다고 해서 용눈이오름이예요. 화산이 폭발하고 남은 분화구가 마치 용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처럼 생겼다고 해서요."
준호는 정상 쪽으로 걸어가며 서연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보실래요? 용의 눈을 들여다볼까요?"
잠시 후, 그들은 분화구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둥근 원형의 움푹 파인 공간이 정말로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눈처럼 보였다. 내부는 초록빛 풀로 덮여 있었고, 아침 이슬이 반짝였다.
"김영갑 선생님은 이 오름에 완전히 매료되셨대요. 특히 이 능선의 부드러운 곡선에요."
준호가 오름의 능선을 따라 손짓했다.
"여성의 가슴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곡선이라고 하셨다는데, 그 자연스러운 흐름과 조화에 사로잡히셨대요. 그래서 그의 사진에서 용눈이오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서연은 오름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부드러운 물결처럼 이어진 곡선이 새벽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준호 씨도 오름을 많이 찍었어요?"
"네, 여러 번요. 제주의 오름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란... 맨해튼의 직선적인 빌딩 숲과는 너무 다른 곡선미에 반했죠."
서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바르셀로나가 생각나네요."
"그래요?" 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 여름, 우리가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있잖아요. 가우디의 건물들 보면서 준호 씨가 했던 말 기억나요? '도시 한가운데 놓인 자연의 곡선'이라고..."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나무 기둥 같은 내부 공간이요. 정말 마법 같았죠."
"그리고 카사 밀라의 물결치는 지붕선이요. 준호 씨가 말했잖아요. '건축물이 이렇게 유기적일 수 있구나'라고..."
"서연 씨는 정말 기억력이 좋네요."
준호가 감탄했다.
"그건 중요한 순간이었으니까요."
서연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당신이 파크 구엘 언덕에서 바르셀로나 전경을 찍으며 너무 행복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해요. 그때 처음으로 준호 씨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됐거든요."
준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때 서연 씨는 가우디의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철학에 대해 이야기했었죠. 나무와 바다, 산의 형태를 건축에 가져온다는..."
"맞아요. 그리고 지금 이 오름도 마찬가지죠. 자연이 만든 완벽한 곡선."
서연이 말했다.
"바르셀로나의 인공적인 곡선과 여기 제주의 자연적인 곡선이 이상하게 닮아있어요. 둘 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점에서요."
"맨해튼, 바르셀로나, 그리고 제주..."
준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의 여행 지도가 점점 채워지고 있네요."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준호는 이제 카메라를 들고 분화구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셔터 소리가 고요한 아침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그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특히 새벽빛에 물든 용눈이 오름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사체 중 하나예요. 계절마다, 시간마다 표정이 달라지거든요."
그의 말에는 바르셀로나에서 건물들을 찍을 때의 그 열정이 담겨있었다.
잠시 후, 준호가 서연에게 카메라를 건넸다.
"한 장 찍어볼래요? 서연 씨의 시선으로 본 용눈이오름은 어떨지 궁금해요."
서연은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전 사진 찍는 거 잘 못하는데..."
"괜찮아요. 그냥 서연 씨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셔터를 누르면 돼요."
서연은 렌즈를 통해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왠지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더 선명해진 듯했다. 분화구의 곡선, 그 안에 자라난 초록빛 식물들, 그리고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방울들까지. 마치 준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지난 계절들 동안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이다.
"와, 이 렌즈가 모든 걸 다르게 보여주네요."
서연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카메라가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어요. 이걸 들고 세계 곳곳을 다니셨다니 대단하네요."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제 몸의 일부와 같아요. 뉴욕의 거리에서 히말라야 산맥까지, 이 카메라가 제 눈이 되어줬죠. 근데 지금 서연 씨가 찍은 것처럼, 가끔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필요도 있어요."
서연이 셔터를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때요? 서연 씨의 첫 용눈이 사진."
준호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서연은 화면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음...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요. 특히 이 빛이..."
"서연 씨의 시선이 담겼네요. 출판편집자의 구도감각이 느껴져요."
서연은 웃었다.
"당신 갤러리 오픈하면, 이 사진도 전시해 주세요. 구석에"
"당연하죠. '서연의 시선으로 본 용눈이' - 특별 초대작가 시리즈."
두 사람은 웃으며 다시 정상에 자리를 잡았다. 준호는 보온병에서 따뜻한 차를 따라 서연에게 건넸다. 아침 바람은 조금 쌀쌀했지만, 떠오른 태양이 점점 그들을 따스하게 감쌌다.
잠시 후, 서연이 문득 말했다.
"이번 겨울, 제주에 오길 정말 잘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만족감이 배어 있었다. 준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요. 그리고... 이 풍경 속에 서연 씨가 있어서, 더 기억에 남을 거예요. 나중에 언젠가, 이 장면을 꺼내볼 수 있겠죠. 서연 씨도, 나도."
서연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이런 걸 보면요... 그냥 괜찮아져요. 이유 없이요."
그녀가 말했다.
준호는 옆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만,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그저 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보다 이 순간이 먼저니까요."
"바르셀로나에서도 그랬어요."
서연이 문득 말했다.
"그 여름날, 산 파우 병원 옥상에서 바라본 도시의 모습이 기억나요? 가우디의 타일이 햇빛에 반짝이던 순간..."
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도 사진을 찍다가 그만두고 그냥 풍경을 바라봤었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조금 세졌지만, 춥지 않았다. 마음이 먼저 따뜻했기 때문일까. 바다도, 땅도, 하늘도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중심에서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준호가 조용히 손을 뻗어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그렇게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사계절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깊어진 관계였다.
"지금 여기 있어서, 행복해요." 서연이 속삭였다.
"서연 씨가 있어서, 더 행복해요."
준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도 마치 아침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난가을 뉴욕의 쌀쌀한 공원 산책, 봄 서울에서의 짧은 만남들, 뜨거웠던 여름 바르셀로나, 그리고 이번 겨울의 제주까지. 그들은 이미 사계절의 변화를 함께 경험한 것이다.
서연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용눈이 오름의 아침. 그들의 이야기에도 드디어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