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나와 다시 올레길로 향하는 길.
서연은 여전히 두모악에서 본 사진들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운동장의 돌담 벤치에서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겨울의 맑은 햇살이 바다 위에서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갤러리에서 본 사진들,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려요."
서연이 말했다.
"김영갑의 사진은 그런 힘이 있죠. 보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를 끼고도는 올레길을 따라 걷던 중, 두 사람은 해안가에 자리한 작은 마을 카페를 발견했다. 파란색 문과 흰색 외벽이 인상적인 단층 건물이었다. 카페 앞에는 작은 화단에 감귤나무와 제주 야생화들이 심어져 있었다. 피로가 쌓인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커피 한잔할래요? 창가 자리에서 바다 구경하면서요."
준호가 카페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마을 카페는 창문 너머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서자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반겨주었다. 목재 테이블과 의자, 벽면에는 제주도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아메리카노와 이 마을 특산품인 녹차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근데 서울 갤러리를 열면, 로케이션 디렉터 일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서연이 손가락으로 머그잔 테두리를 그리며 물었다. 녹차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먹은 후였다. 눈빛에 호기심이 반짝였다.
"둘 다 할 거예요. 갤러리는 한국에서의 기반이 될 테고, 로케이션 일은 세계를 계속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주니까요.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준호는 웃었다. 해가 잘 들어오는 카페 창가에 앉아, 그의 얼굴이 따스한 빛에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요?"
서연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시며 기다렸다. 준호의 말끝에 담긴 무언가가 그녀의 심장을 조금 더 빠르게 뛰게 했다.
"당신과 함께할 시간도 더 많아질 거고요."
준호는 한 번 더 미소 지었다. 창밖으로 제주의 겨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서연은 미소로 답했다. 그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할 시간, 함께 걸을 길, 함께 바라볼 풍경들에 대한 생각. 아까 갤러리에서 그가 말했던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당신과 함께할 시간'. 간단한 다섯 글자가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흔들 수 있는지, 서연은 자신도 놀라웠다.
"어떤 갤러리를 열고 싶으세요?"
서연이 물었다. 관심을 돌리려는 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음...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요. 화려하거나 대단한 순간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특별한 순간들. 웃음, 대화, 그리고..."
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르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리고 사랑. 그런 순간들이요."
준호의 눈이 서연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좋을 것 같아요. 나 초대해 주실 거죠? 오픈 날에?"
서연이 말했다.
"당연하죠. 아니, 초대가 아니라... 함께 열고 싶어요. 당신의 시선으로 보는 이야기들이 필요해요."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진지했다.
서연은 잠시 놀란 눈으로 준호를 바라보았다. 갤러리에서 그가 이야기했던 예술과 건축에 관한 책들, 그녀가 편집자로서 가진 경험에 관한 대화가 떠올랐다. 여행 내내 그가 서연의 의견을 묻고, 그녀의 생각을 존중하는 모습을 봐왔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함께하자는 제안은 새로웠다. 그녀가 해외문학 팀장으로서 쌓은 감각이 그의 갤러리에 새로운 차원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엮일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이 그녀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창 밖으로 잠시 시선을 돌린 서연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기, 오른쪽 바다봐요."
준호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페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완벽한 풍경화 같았다. 그런데 그 풍경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돌고래인가요?"
서연이 창가에 바짝 붙어 물었다.
"맞아요! 돌고래 떼에요!"
준호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요. 나가볼까요?"
서연은 흥분해서 얼른 일어났다. 두 사람은 바다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들의 마음은 따뜻했다. 서연은 아침에 입은 니트가 바람을 완전히 막아주지 못해 몸을 살짝 떨었다. 준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갤러리 벤치에서처럼 익숙한 제스처였지만, 이번에는 더 자연스러웠다.
올레길 해안가에 멈춰 선 그들에게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웠다. 멀리서 보았던 돌고래들이 여전히 수면 위로 튀어 오르며 놀고 있었다. 더 가까이서 보니 그 움직임이 더욱 생생했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서연은 무의식적으로 준호의 팔을 잡았다.
"헉, 봤어요? 세 마리예요!"
서연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한 마리, 두 마리, 이번엔 막내까지. 삼 남매 총출동이네요."
준호의 눈도 반짝였다. 그는 카메라를 꺼내 들며 빠르게 렌즈를 조절했다.
"이거 거의 대청봉급 아닌가요? 지리산 대청봉에서 일출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고…"
준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지리산은 천왕봉이에요, 설악산이 대청봉."
서연이 정정했다.
"아... 이런 제 인생 등반 계획 전체를 다시 짜야겠네요. 지리산 최고봉은 천왕봉인거죠? 근데 지금 우리가 덕을 쌓았다는 건 분명하네요."
준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우리가 덕을 쌓은 게 아니라 제주가 마음을 연 걸지도."
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준호는 셔터를 몇 번 누르고 나서 카메라를 내렸다.
그들은 웃으며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튀어 오른 꼬리가 물 위로 그려놓은 곡선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서연과 준호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서연은 자연스럽게 준호의 손을 잡았고, 준호도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 사람의 손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더 단단하게 맞잡고 있었다. 바다는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부른 것처럼, 돌고래 떼가 인사를 남기고 돌아간 듯했다.
"진짜 근사하네요."
준호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 감동이 묻어났다.
"기억에 남을 장면이에요."
서연이 대답했다. 그녀는 준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둘은 잠시 멈춰 바다 쪽을 바라봤다. 겨울 바다는 조용했고, 돌고래가 사라진 수면은 다시 고요를 되찾고 있었다. 아침에 본 바다와 비교해 이제는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마치 그들의 관계처럼.
"오늘 촬영한 돌고래 사진, 당신 갤러리 첫 전시회에 넣으면 어떨까요?"
서연이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일상의 기적'이라는 주제로요. 평범한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특별한 순간."
준호가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바다가 우리에게 준 선물 같아요."
서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따스함이 묻어있었다.
"어제 모래사장에서 봤던 화살표, 기억나요? 바다를 향해 있었잖아요."
준호가 문득 떠올렸다.
"그래서 오늘 바다가 답장을 보낸 거군요. 돌고래라는 답장을."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함께 고개를 돌려 다시 올레길을 걸었다. 어느새 풍경은 바다에서 귤밭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초록 잎 사이로 주황빛 귤들이 반짝였다.
"귤밭이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어요."
서연이 말했다. 그녀의 눈은 이제 바다 대신 주황빛 귤들에 반짝였다.
"제주도니까 가능한 풍경이죠. 돌고래 보고 귤 따먹는, 거의 판타지 동선."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서연도 따라 웃었다. 김영갑 갤러리부터 지금까지, 평범한 여행 코스도 그와 함께라면 뭔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지금 같은 이 순간들, 정말 갤러리에 담고 싶어요."
준호가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함께라면."
서연의 말에 준호는 미소 지었다. 바다에서 불던 바람은 이제 귤향기를 품고 있었다. 이 겨울 올레길에서, 그들은 또 다른 특별한 순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가에 나란히 놓인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무인 판매. 한 봉지 천 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데선 그냥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죠."
준호가 지갑을 꺼냈다. 서연은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갓 딴 듯, 귤껍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제주도 귤이랑 서울 귤은 다른 나라 과일이죠. 마치 야생과 동물원의 차이랄까요?"
준호가 귤 봉지를 흔들며 말했다. 서연은 피식 웃었다.
근처에 놓인 돌담 위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등 뒤로 낮은 겨울 해가 내려앉았고, 마을 어귀의 개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서연이 조심스레 귤 하나를 까기 시작했다. 껍질이 벗겨지며 상큼한 향이 퍼졌다.
"귤까당해요, 어서."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뭐라고요? 귤뭐?"
서연이 귤 까던 손을 멈추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귤을 까먹으며 당 충전. 줄여서 뀰까당. 감정 방전될 틈이 없죠."
준호가 씩 웃으며 설명했다.
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귤밭에 울려 퍼졌다.
"그건 또 어디서 나온 말이에요."
"방금. 내가 만들었어요. 이 정도면 오늘 하루 캐치프레이즈감이죠."
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 정말이지 말장난을 좋아하네요."
"사진만큼은 아니지만요. 말장난은 내 인생의 귤껍질 같은 거예요. 벗겨내면 달콤한 사진이 나오죠."
준호가 윙크하며 말했다. 서연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 비유는 좀... 억지스럽네요."
"그러니까 껍질이라니까요. 벗겨내야 할 부분이라고요."
준호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왠지 돌고래보다 더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늘 하루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김영갑 갤러리의 사진들, 바다 위로 튀어 오르는 돌고래들, 그리고 지금 이 귤밭. 모두 다른 풍경이지만, 준호와 함께하니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날에는 귤 세 개가 꼭 필요해요. 이건 귤이 아니라 이심전귤이니까"
준호가 귤껍질을 깔끔하게 벗겨내며 말했다.
"왜요?"
"고생한 카메라에게 하나, 용감한 발에게 하나, 그리고 당신 미소에게 하나."
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호를 바라보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또 무슨 귤 철학인가요?"
"제주도 귤 분배론이요. 모든 좋은 것들은 셋씩 나눠야 한다는 철학이죠."
준호는 장난스럽게 귤을 흔들어 보였다. 햇살이 점점 기울고 바람이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준호가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 씨, 사실은...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요."
귤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진짜로요. 함께 걷고, 함께 웃고, 같이 무언가를 발견하는 이 모든 순간이 너무 소중해요."
서연은 준호의 눈빛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
"돌고래도, 귤도, 김영갑의 사진도 다 좋지만... 당신과 함께여서 더 특별한 것 같아요. 내 일상이 자꾸 당신 쪽으로 기울어요."
준호는 귤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이 귤처럼, 자연스럽게, 조용히."
서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따스하게 퍼져나갔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준호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하나의 선명한 그림처럼 떠올랐다. 뉴욕에서의 첫 만남, 서울에서의 우연한 재회, 그리고 지금 이 제주의 겨울.
"나도요."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사진으로 담기지 않는 순간들도, 당신과 함께라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이렇게... 조용히, 자연스럽게."
준호는 미소 지었다. 그들 사이에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귤향기 가득한 그 순간,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충분히 가까워져 있었다. 뀰까당. 그날의 귤처럼, 그들의 고백은 달고 조용했다.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내일 일정은 뭐예요?"
서연이 마지막 귤 조각을 입에 넣으며 물었다.
"오름에 가야죠. 용눈이 오름 기억나요? 김영갑이 가장 사랑했던 오름. 이른 아침에 올라야 안개를 볼 수 있어요."
준호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실렸다.
"그럼 일찍 자야겠네요."
"근처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요. 바다 전망도 좋고, 지역 맥주도 팔아요. 오늘 마무리로 딱이죠."
준호가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서연은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른 아침 오름에 오를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김영갑 갤러리에서 봤던 그 풍경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그것도 준호와 함께.
"뀰까당, 잊지 말아요."
준호가 마지막 귤껍질을 챙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겨울 올레길에서의 하루가, 달콤한 귤처럼 마음 한구석에 녹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