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올레] 바다를 향한 화살표

by 강마레

제주의 겨울 아침, 갈대숲을 비추는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었다. 갈대숲 옆 벤치에 앉은 서연은 두 손을 비비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제주의 겨울바람은 서울보다 까다로웠다. 언뜻 보기엔 따스해 보였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거칠었다.


준호가 작은 매점에서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옥수수차였다. 그가 서연에게 한 잔을 건넸다.


"이걸로 몸 녹일까요. 인생 옥수수예요. 진짜로."


준호가 자신의 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의 눈가에는 웃음의 흔적이 서려있었다.


서연은 감사히 종이컵을 받아 들고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말미오름에서의 포옹, 소나무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안아주었던 그 순간, "흔들리지 말라고요"라고 속삭이던 준호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서연은 무의식적으로 스카프를 목에 더 단단히 둘렀다. 마치 그의 팔이 감싸안던 따스함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것처럼.


"옥수수가 인생이면, 삶이 좀 고소하겠네요."


서연이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따스한 옥수수차가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삶이... 고소하다. 메모해도 돼요? 나중에 다큐 제목으로 쓸지도 몰라요."


준호는 마치 진짜 메모라도 하려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럼 나는 저작권 요구할 거예요."


둘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웃음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어제의 무거웠던 대화가 오늘은 가벼운 농담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그들의 관계가 한 계절을 건너온 것처럼.


"오늘은 바다 따라 걷는 길이라면서요?"


서연이 물었다. 멀리 수평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그들을 부르는 것 같았다.


"맞아요. 바다, 갤러리, 그리고 운명의 사진작가."


준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구 운명요?"


서연이 컵을 입에 가져가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글쎄요. 난 내 운명은 이미 앞에 있는 것 같은데?"


준호의 말에 서연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컵을 들었다. 입가로 올라오는 미소를 차로 덮었다. 어제는 고백 같던 말들이 오늘은 자연스러운 농담처럼 오갔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혹은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았던 연인처럼.


둘은 제주올레 3코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겨울빛을 품고 있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아졌다. 이 거리는 뉴욕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 바르셀로나에서 서로를 알아갔을 때, 그리고 어제 제주에서 다시 만났을 때까지, 계속해서 좁혀져 왔다. 마치 우주의 중력처럼, 서로를 향해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서연이 갑자기 말했다.


"어제 1코스, 오늘 3코스... 우리 2코스를 건너뛰었네요."


준호는 웃었다. "맞아요. 다음에 오면 완주를 목표로 꾸준히 걸어야겠어요. 1코스부터 순서대로."


"그래요. 우리 제주에 자주 와서 코스별로 올레길 완주해요."


그 말에 담긴 약속이 둘 사이를 따스하게 감쌌다. 앞으로도 계속, 이 길을 함께 걸을 것이라는.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저 옆에 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 발소리와 파도 소리만이 그들을 따라다녔다. 작은 모래사장을 지나게 되었을 때, 준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모래 위를 가리켰다.


"저기요, 선생님."


준호가 뒤돌아 모래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발자국을 보세요. 보이시나요?"


서연이 시선을 모래로 향했다. 그들이 걸어온 자취가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모래길이 시작될 때만 해도 서로 떨어져 걷다가, 어느새 가까워진 발자국들.


"혹시 지금 저를 따라오시는 겁니까?"


"올레길이 한 방향이라 그렇죠."


서연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 발자국이 제 발자국으로 자꾸 다가서고 있잖아요. 명백한 접근 시도 아닌가요?"


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준호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마치 오랫동안 그의 곁을 걷는 연습을 해온 것처럼.


"말장난도 걷다 보면 고갈될 줄 알았는데, 당신은 갈 길이 멀군요."


"난 직업이 그래요. 로케이션 디렉터이자 사진작가로서 항상 새로운 장소와 순간을 찾아다니는 사람인 걸요."


둘은 웃음을 나누며 발걸음을 맞췄다. 바람이 밀려와 파도를 끌어내고, 갈대가 쓸려나가듯 몸을 흔들었다. 서연의 머리카락도 바람에 나부꼈다. 준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서연은 그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그 손길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둘은 모래사장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란히, 그러나 점점 더 가까이. 마치 두 개의 물결이 만나 하나가 되어가는 두물머리처럼. 서연은 문득 자신의 삶이 이 올레길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가, 준호라는 사람을 만나 하나의 방향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 좀 봐요."


준호가 다시 한번 모래를 가리켰다.


"모래 위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어요. 보이시나요?"


서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았다. 그들이 걸어온 방향에서, 바다를 향해 그려진 희미한 화살표가 있었다.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는 거겠죠?"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내 생각엔... 우리 마음이 향하는 곳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준호는 잠시 그 화살표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연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바다보다 더 깊었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준호가 먼저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의 손은 따뜻했다. 마치 서로의 온도를 주고받는 것처럼, 그들의 체온은 서서히 닮아갔다.


"저기요, 선생님."


모래사장을 지나 바위가 놓인 해변에 이르렀을 때, 준호가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지금 저를 따라오시는 겁니까?"


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 질문 좀 전에도 했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자꾸 나한테 바짝 붙어서 그래요."


"이건... 접사 구도일뿐입니다."


준호는 카메라를 꺼내며 말했다.


"오늘 안에 당신 웃는 얼굴 한 장은 남겨야겠어요. 안 그러면 이 코스는 미완성이니까."


서연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준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셔터 소리가 바닷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영원히 그의 카메라 속에,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당신이 찍는 사진들, 가끔 보곤 해요."


서연이 문득 말했다.


"네? 어디서요?"


준호가 물었다.


"인스타그램이요. 팔로우하고 있거든요."


서연이 대답했다.


"바르셀로나 이후로."


준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예전에 올린 제주 사진들도 봤겠네요?"


"네, 봤어요. 특히 말미오름 사진이 인상적이었어요. 어제 우리가 섰던 그 자리랑 비슷한 곳 같더라고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제 말미오름에서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바람에 홀로 흔들리던 키 작은 소나무를 바라보던 그 순간. 서연은 무심결에 손을 뻗어 준호의 팔을 가볍게 쓰었다. 그의 품 안에 안겼던 순간이 갑자기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의 따뜻한 팔이 그녀를 감싸안던 그 순간, 세상의 모든 바람과 흔들림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던 그 포옹. '흔들리지 말라고요'라고 그가 속삭였던 그 낮은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가 느꼈던 안전함과 편안함.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그 느낌.


"내 사진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어요? 기억에 남거나..."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비가 내리는 마드리드의 카페... 창문 너머로 거리를 바라보는 사진."


준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걸 기억하다니... 정말 오래된 사진인데."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했거든요."


서연이 천천히 말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사람."


준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었어요. 내 상상 속에서."


서연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녀도 그랬다. 준호가 찍은 풍경들을 보며,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했었다. 뉴욕에서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의 사진 속 풍경들은 그녀의 마음속에 작은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지금, 그 씨앗은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이제는 상상할 필요 없겠네요."


서연이 말했다.


"지금 여기, 제가 있으니까."


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주저함 없이 손을 뻗어 서연의 손을 잡았다. 서연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의 손이 자연스럽게 얽혔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바닷가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두 사람을 감쌌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의 리듬으로 맞춰지는 심장 소리. 마치 바다가 그들에게 선물하는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처럼.


"저기요, 선생님."


준호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


"우리가 걷는 이 길, 바다를 향한 화살표 같지 않나요? 우리 마음이 가는 곳을 가리키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느꼈다. 이 길이, 그들의 마음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그럼 바다가 우리의 목적지인가요?"


서연이 물었다.


준호는 미소 지었다.


"아니요. 바다는 우리 여정의 동반자일 뿐이에요. 우리의 목적지는..."


그는 말을 멈추고 서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로예요."


그 말에 서연의 가슴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마치 바다가 그녀의 안에 있는 것처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어왔다. 서연은 멀리서부터 한눈에 들어오는 학교 건물을 보며 발걸음을 멈췄다. 교문을 지나 운동장이 펼쳐져 있었고, 국기게양대가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평범한 1층짜리, 백색의 시골 초등학교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건 완전히 학교네요."


서연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예요. 삼달국민학교였어요. 폐교된 후에 김영갑 선생님이 이곳을 갤러리로 바꾸셨죠. 외관은 거의 그대로 두고요."


그들은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건물로 향했다. 본관 입구에는 '두모악'이라는 작은 간판만이 이곳이 더 이상 학교가 아님을 알려줄 뿐이었다.


"학창 시절이 떠오르네요. 뭔가 설레는 기분이에요."


서연이 건물에 들어서며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곳은 내게 특별해요."


준호가 문을 열며 말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김영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제주를 평생 사랑했던 사진작가. 섬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


"김영갑 작가에 대해 알아요?"


준호가 물었다.


"물론이죠. 루게릭 병을 앓으면서도 제주를 찍었던 분이잖아요"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냥 제주 풍경이 아니에요. 영혼이 담긴 초상화죠."


두 사람은 이제 본격적으로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교실마다 다른 주제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칠판이 있던 자리에는 대형 사진들이, 학생들이 앉았을 책상 자리에는 작은 전시대가 놓여있었다. 창문으로 흘러드는 자연광이 사진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듯했다.


"정말 그대로예요. 교실 창문, 복도, 학교 특유의 냄새까지."


서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그게 이 미술관의 매력이에요. 옛 기억과 새로운 예술이 공존하는 곳."


준호가 답했다.


그들은 천천히 전시장을 돌아다녔다. 교실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사진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서연은 학교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신기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을 이 장소가 이제는 예술의 공간으로 변신한 것이.


"이런 폐교를 활용한 공간이 좋아요. 역사와 추억이 있는 곳이니까."


서연이 말했다. 준호는 웃었다.


"나도 그래요. 옛것과 새것이 만나는 지점이 좋아요. 내가 서울에 열고 싶은 갤러리도 이런 느낌이에요. 버려진 공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서울에 갤러리요?" 서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네, 아직 계획 단계지만... 성산 근처에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서 갤러리를 열고 싶어요. 김영갑 선생님처럼 한 장소, 한 주제에 몰두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서."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자 흰 벽에 걸린 흑백사진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제주의 바다와 사람들, 그리고 시간을 담고 있는 작품들. 서연은 한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이 사진이 좋아요."


서연이 말했다.


준호는 그녀의 옆에 서서 함께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왜요?"


“담담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요.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이 사진, 내가 2003년에 처음 봤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여기 왔군요?"


"네. 그땐 사진을 잘 안다고 착각했죠. 근데 여기서... 사진이 뭔지 처음으로 멈춰서 봤어요."


서연은 그의 곁에 조용히 섰다. 준호의 말에서 깊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었다.


"김영갑 선생님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았대요. 손가락이 굳어갈 때도 셔터를 눌렀다고."


준호가 다른 사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보세요. 이 사진, 용눈이 오름이예요. 김영갑이 가장 사랑했던 오름 중 하나죠."


서연은 사진 속 능선을 따라갔다. 부드러운 곡선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내일 우리도 올라갈 수 있어요. 용눈이 오름. 가보면 왜 그가 그곳을 그토록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예요."


그들은 천천히 다음 전시실로 이동했다. 학교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낡은 복도의 나무 바닥은 수많은 아이들의 발걸음으로 닳아 있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듯했다.


"보세요, 여기에 학교 우체통이 있어요."


서연이 복도 끝에 있는 작은 우체통을 가리켰다.


"아마도 아이들의 편지함이었을 거예요. 지금은 방문객들이 김영갑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넣는 곳이 됐어요."


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서울에 갤러리를 열면, 이런 것도 해보면 어떨까요? 방문객들이 사진에 대한 감상을 남길 수 있는."


"좋은 생각이네요. 폐교의 흔적을 살리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요."


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서연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출판사에서 예술 공간과 건축에 관한 책들을 몇 권 출간했거든요. 해외 사례도 많이 있어요."


준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정말요? 당신이 그런 책들을 만들었다니 더 흥미롭네요."


"그래요. 해외문학 팀에서 일하지만, 예술과 건축 관련 서적도 종종 맡아요. 당신 갤러리 아이디어는 정말 좋은 기획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긴 듯했다. 단순한 감정을 넘어선,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무언가.


또 다른 교실로 들어서자 더 많은 용눈이 오름 사진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아침, 정오, 저녁, 그리고 안개 낀 날의 용눈이. 매 순간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사진처럼."


준호가 말했다.


"네?"


"아까 말했던 우리의 프로젝트요. 저 사진처럼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갤러리를 만들고 싶어요.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서연은 미소 지었다.


"김영갑 선생님이 이 학교를 갤러리로 바꾼 것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준호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제주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운동장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그리고 서연에게 말했다.


"저 바다를 보세요. 항상 같은 바다지만, 매 순간 다른 모습이에요. 우리의 관계도, 우리가 만들 갤러리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전시실 안엔 바람이 조금씩 스며들었고, 빛은 사진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서연은 교실 창가에 서서 운동장 너머 바다를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빛나는 바다는 마치 거대한 캔버스 같았다.


그들은 마지막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으로 나갔다. 갤러리를 나서자 다시 바람이 불었다. 국기게양대 아래 놓인 돌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서연은 자신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준호의 어깨에 기대는 것을 느꼈다. 어제, 말미오름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편안함. 이번에는 더 이상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바르셀로나 이후로, 내 사진이 좀 달라졌어요."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어떻게요?"


서연이 물었다.


"더 밝아졌다고 해야 할까... 어둡고 무거운 사진을 많이 찍었거든요. 그런데 최근엔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동료들이."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본 그의 최근 사진들도 확실히 달랐다. 더 많은 빛, 더 선명한 색감. 마치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준호는 시선을 바다로 향한 채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당신을 만난 후, 내 안에 뭔가 밝아졌어요. 마치..."


"마치요?"


"마치 오랫동안 흐린 하늘만 보다가, 갑자기 맑은 하늘을 본 것처럼."


그 말에 서연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녀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준호를 만난 후, 그녀의 세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색이 더 선명해지고, 소리가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사실... 한국에 갤러리 준비하면 여기에 더 머물게 되겠죠."


준호가 문득 말했다.


"정말요?"


서연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실렸다. 준호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 서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 년의 반 정도는 한국에 있을 계획이에요. 뉴욕과 서울을 오가면서... 이제는 더 이상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의 말에 서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준호가 한국에 더 오래 머문다는 건, 그들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시청역 앞에서 다시 만났던 그 봄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설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깊은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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