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올레] 아직 걷지 않은 길

by 강마레

이른 시간 용눈이오름에 오른 두 사람은 종달리 해녀의 집에서 조개죽으로 따뜻한 아침을 먹었다. 둘은 겨울 햇살 아래 맑은 해안길을 따라 성산포 성당으로 향했다. 차로 이동하면 가까운 거리지만, 겨울 햇살 아래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었다.


종달리 해안길은 겨울의 차가운 공기 덕분에 더 맑고 투명해진 바다색을 품고 있었고, 바닷물은 마치 유리판처럼 햇살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갈매기 몇 마리가 멀리서 날고 있었고, 해안도로를 따라 드문드문 감귤 상자가 쌓여 있었다. 길가에선 갈대가 흔들리고 있었고, 바다 건너편으로는 우도의 실루엣이 또렷했다.


성산포 성당은 마을 한가운데 위치해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성당이었다. 특별한 꾸밈 없이 단정한 외벽과 조용히 울리는 풍경 소리, 그리고 작은 정원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문구가 새겨진 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준호는 그 문구를 보고 살짝 웃었다.


"어, 이거 추기경님이 우리한테 숙제 내신 건가요?"


서연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준호는 얼른 말을 돌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냥... 뭐랄까, 여행 와서 이런 문구를 보니 좀 의미심장하달까."


서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준호를 바라보았다.


"준호 씨 추기경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이었겠어요."


"네? 아니... 그게... 초등학교 때 미사는 조금밖에 안 빠졌습니다만."


준호가 헛기침을 했다.


"오~ 세례명도 있으세요?"


서연이 문득 궁금해졌다.

준호는 잠시 망설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퐁소입니다."


"알퐁소요?"


서연이 놀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신부님들이나 수사님들 세례명 같네요. 요한, 베드로, 바오로 이런 것보다 훨씬 특별해 보여요."


"사진작가의 수호성인이에요."


준호가 진지하게 말했다가 서연의 표정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어릴 때 신부님이 리구오리 성인 얘기하시면서 지어주셨어요."


둘은 말없이 성당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엔 바다와 우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전망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 보니 우도가 정말 가깝게 보이네요."


서연이 감탄하듯 말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당 뒤에서 본 우도 뷰가, 제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예요. 여긴 좀 특별하죠. 뭔가… 고백하기 좋은 각도랄까."


서연은 피식 웃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그대로 얼굴을 들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준호는 그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 계절이 지나가면, 다음엔 어디에서 우리 바다를 볼 수 있을까요."


서연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를 바라봤다.


"바다는… 꼭 제주나 우도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어디에서든 당신이 같이 있는가인 것 같아요."


준호는 그 말에 살짝 웃었다.


"이야, 문학적인 날입니다. 출판사 문학팀장님 다운 멘트예요."


"준호 씨가 시작했잖아요. 고백하기 좋은 각도라고."


"그건... 그냥 각 잡으려던 건데요."


서로의 웃음이 잦아들자, 두 사람은 성당 옆 조용한 돌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마을 뒤편, 잔잔한 바다와 떠 있는 우도가 정물처럼 펼쳐져 있었다. 둘은 서로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그 침묵조차 익숙하고 따뜻했다. 네 계절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성산포항 근처 카페에 들러 따뜻한 커피를 나눠 마시고, 그들은 발걸음을 돌려 공항으로 향해야 했다. 겨울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속에선 낯설지 않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네요."


서연이 말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레길이든 인생이든, 좋은 길은 항상 짧게 느껴지죠."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출판사 회의가 있어요. 준호 씨는 뉴욕까지 다시 먼길이네요."


"도착하면 서울에서 진행한 갤러리 미팅 정리하고 꽤 바쁠 것 같아요. 시차 적응할 틈도 없겠네요."


"이제 서울에도 준호의 방이 생기는 거네요."


"방이라기보단… 아주 작은 전시 공간이에요. '갤러리'라고 쓰고 '준호 아지트'라고 읽는 곳. 창문은 꼭 있어야 해요. 혹시 당신이 불쑥 찾아올지 모르니까요."


카페를 나와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랐다. 두 사람의 감정도 잠시 말없이 접어두고 있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채.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서연은 출국하는 준호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준호의 뉴욕행 출발 게이트 앞, 이별을 앞두고 둘은 마주 섰다. 어색한 정적은 없었다. 이들은 이제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다음 계절은 어디에서 만날까요?"


준호가 물었다.


"어딘가 함께 걸을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요. 걷다 보면, 우리 이야기는 늘 조금 더 이어졌잖아요."


서연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걷는다는 행위가 이들 사이에 얼마나 큰 의미가 되었는지를 담고 있었다.


"서울, 뉴욕, 혹은 다시 제주."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작은 사진 인화지를 꺼냈다. 새벽에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 붉게 물든 능선과 나란히 선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선명했다.


"같이 찍힌 거예요? 언제?"


"삼각대의 위대함이죠."


준호가 말했다. 서연은 사진을 손에 쥐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고마워요. 이 계절 덕분에 내 안에 있던, 오래 잊었던 감정들이 조금씩 깨어났어요."


"그 감정들, 봄이 와도 잊지 말아요. 더 선명해질 테니까."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둘 사이의 시간이 더 이상 미래를 확정짓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이, 오늘을 충분히 나눴다는 표정으로.


"잘 다녀와요. 그리고… 서울에서 봐요."


"서울에서 봐요."


그들은 서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각자의 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겨울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걷지 않은 길이 남아 있었다.


일주일 후, 뉴욕.


뉴욕의 겨울은 제주보다 더 차갑고 길었다. 브루클린의 사무실에 앉은 준호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노트북을 열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달력은 이미 봄을 향해 한 장 한 장 넘어가고 있었다. 요즘 그는 사진 찍기보다 사진을 정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 갤러리 오픈과 개인전을 앞둔 그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다.


"2월의 제주, 아직 끝나지 않은 뉴욕의 겨울, 그리고..."


그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화면 속에서는 제주의 풍경들이 하나둘 지나갔다. 오름, 바다,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 그리고 성산포 성당 뒤에서 바라본 우도의 실루엣. 그리고 마지막 사진, 삼각대로 찍은 용눈이 오름의 두 그림자.


뉴욕에 돌아온 지 일주일. 겨울은 여전히 그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은 암실에서 인화하는 일, 갤러리와의 미팅, 그리고 매일 밤 카페에서 정리하는 사진들. 그 모든 일과 속에서도 그는 매일 아침 서울의 날씨를 확인했다. 왜인지는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서울의 하늘이 궁금했다. 아니, 정확히는 서울의 어떤 하늘 아래 있는 그녀가 궁금했다.


[서연] 안녕하세요, 뉴요커. 서울은 눈이 많이 왔어요.


메일에는 PDF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제목은 "오름의 숨결, 바다의 기억". 서연이 담당하는 유명 해외 소설가의 제주 에세이였다. 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파일을 열었다.


첫 페이지에는 그가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서연이 종달리 해안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뒷모습. 그는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 카메라를 들었을 때, 마침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렸고, 그 순간 빛이 완벽했다.


책은 작가가 제주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준호의 사진이 책에 실린 것은 서연의 제안이었다.


"준호 씨 사진이 이 글과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준호는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서연이 모든 계약 과정을 매끄럽게 처리해주었다.


준호는 메일 답장을 썼다.


"서울은 눈이 많이 왔군요. 뉴욕도 마찬가지예요. 창밖을 보니 제주의 바다가 그립네요."


몇 분 후, 답장이 왔다.


"네, 여기도 눈이 많이 와요. 창문 밖은 온통 하얗습니다. 근데, 책에 실린 준호 씨 사진들 어떤가요? 작가님이 정말 마음에 들어하셨어요. 사진작가님께 감사하다는 말도 꼭 전해달래요."


준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신의 반응에 서연이 조급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한 후 답장을 보냈다.


"표지가 마음에 들어요. 어울리게 잘 들어갔어요."


서연의 답장은 빠르게 왔다.


"프로필 사진도 넣을까요? 사진 보내주세요. 가능하면 웃지 않은 것으로요. 너무 잘생기면 책이 안 팔릴 수 있으니까요."


준호는 키득거렸다. 서연의 유머 감각은 여전했다.


"다음 달 초에 서울 갑니다."


준호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몇 초 후, 추가 메시지를 보냈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제가 아는 좋은 카페가 있어요."


"어디요?"


"마포 쪽이요. 갤러리 근처예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꽤 좋아요."


"...풍경이요?"


"네, 누군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풍경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특히 출판사 문학팀장님처럼 빛을 보는 사람에게요."


서연은 한참을 답장하지 않았다. 준호는 조금 불안해졌다. 혹시 너무 직설적이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의 겨울, 그들이 함께 걸었던 길, 그리고 이별했던 공항에서의 약속.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포석이었다.


마침내 서연의 답장이 왔다.


"공항에서 준 사진, 제 책상 위에 있어요. 매일 보고 있어요. 그런데 준호 씨가 걱정하던 것과 달리, 그 감정들은 겨울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선명해졌어요."


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그럼 이제 걸을 준비가 된 걸까요? 아직 걷지 않은 그 길을."


답장은 곧바로 왔다.


"준호 씨가 카메라만 들고 오면 됩니다. 다음 작가님 책 프로젝트도 같이 하실래요? 저희 봄 시리즈예요. 제목은 '섬과 파도, 그 사이의 시간'이 어떨까요?"


준호는 사무실 창가에 기대어 서서 눈을 감았다. 뉴욕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서 그는 어쩐지 곧 다가올 봄의 기운을 느꼈다. 그는 눈을 뜨고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다음 달 첫주 수요일 오후, 인천공항 도착. 꼭 마중 나오세요. 이번엔 삼각대 없이도 우리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무슨 방법인데요?"


서연이 물었다.


"간단해요. 누군가에게 부탁하면 되죠. 우리 둘 다 프레임 안에 들어가게요. 이번엔."


서연이 마지막으로 답장했다.


"알겠어요. 그때, 거기서 만나요. 우리."


준호는 노트북을 닫고 뉴욕의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송이들이 유리창에 닿아 녹아내리는 모습이 마치 제주 바다에 일렁이던 파도 같았다. 계절은 변하고, 장소는 달라져도, 어떤 감정들은 그대로 남는 법이었다.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눈 덮인 거리 너머로 봄이 오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도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걷지 않은 길 위에서, 이제 그들은 함께 걸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거기, 우리. 그리고 이제, 여기, 우리. 아직 걷지 않은 길 위에. 앞으로 걸어갈 모든 길 위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