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시작된 그날
1988년 가을 저녁.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가족들과 TV 앞에 모여 MBC 대학가요제를 보고 있었다. 당시엔 이 프로그램이 진짜 문화행사였다. 우리 집만의 예외사항이 아니었다. 나는 괜히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진지하게 시청하고 있었다.
어느덧 무대는 막바지. 마지막 팀 소개가 나왔다. 팀 이름은 '무한궤도'. 낯설었다. 무한… 궤도?
그리고 그들이 "그대에게"의 첫 전주를 연주하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거실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었다. 신체가 자발적으로 반응하는 어떤 충격. 심장은 뛰고, 귀는 확장됐고, 손발이 질주하듯 어디론가 뻗어가는 듯했고 뭔가 '다르다'는 느낌에 벅찼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다가 갑자기 완벽한 주파수를 찾은 것 같았다. 세상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내 안엔 어떤 리듬이 하나 새겨졌다. 그건 어쩌면 내 심장에 새겨진 암호 같은 것이었다. 세상엔 이런 멋짐도 존재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 그리고 그때부터, 난 음악을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들은 이야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가왕 조용필은 무한궤도의 전주만 듣고 만점을 줬다고 한다. "전주만 듣고 우승을 직감했다"는 것이다.
그 전설 같은 평가를 나중에 들으면서, 나도 속으로 생각했다. "우주적 지휘 속에 내가 거실에서 뛴 거였군."
한편, 우리 집에서는 아빠가 말씀하셨다. "대학생다운 진짜 음악 나왔구먼!"
그건 아이의 감각, 어른의 귀, 심사위원의 판단이 모두 일치했던 순간이었다.
조용필이 전주만 듣고 만점을 준 것은 단순한 미담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왕관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1980년대 한국 록의 대부가 인정한 그 순간, 한국 록은 더 이상 서구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우리만의 언어를 갖기 시작했다.
내 또래 친구들은 지금도 누군가 "따라라 따라라 딴딴 따라 따라라"를 외치면 이어지는 건 거의 자동 합창이다. 마치 프리메이슨의 암호처럼, 지금도 술자리에서 “따라라 따라라 딴딴” 하면 다들 허공에 에어기타를 친다. 이 멜로디는 우리 세대만이 아는 비밀 신호가 되었다. 〈그대에게〉의 전주는 하나의 호출음이자, DNA처럼 각인된 감정이다.
그 시절엔 녹화도, 다시 보기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 장면을 다 기억한다. 신해철의 엄마가 보고 싶다던 귀여운 인터뷰, 미간을 찌푸리며 부르던 표정, 군더더기 없는 무대 매너. 단언컨대, 그는 대학생도, 어른도 아니었다. 그는 미래에서 온 메신저 같았다.
<그대에게>가 왜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무한궤도의 사운드는 당시 한국 음악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제3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복합성과 한국적 서정성이 만나는 지점, 그 어딘가에 그들만의 영토가 있었다.
신해철의 보컬은 기교를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성을 드러냈고, 이는 당시 주류였던 발라드나 트로트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음악적 진정성을 보여줬다.
특히 "따라라 따라라 딴딴" 하는 전주 부분, 이것은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음악적 선언문'이었다. 기본적인 A단조 진행이지만 중간에 예상치 못한 화음 전환이 들어가면서 듣는 이의 뇌파를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당시 한국 대중음악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었던 세련된 편곡이었지만, 동시에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직관적 멜로디였다.
신해철의 보컬 스타일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다. 기존 한국 가수들의 비브라토 중심 창법 즉, 그 과잉된 감정의 분출에서 벗어나 직설적이고 절제된 발성을 구사했다. 마치 말하듯 노래하는 그의 창법은 록 음악을 '듣는 음악'에서 '사유하는 음악'으로 바꿔놓았다.
이후 신해철이 '서강대 철학과' 재학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학교도서관에서 십진법 001번대, 철학 코너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철학과에선 뭘 배우는 거지?"
책장은 낯설었지만, 그 미지의 느낌이 좋았다. 플라톤의 <국가>부터 시작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까지, 나는 제목도 어려운 책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지만, 그 '이해할 수 없음' 자체가 매혹적이었다. 그 덕분에 독후감 상도 받았고, 도서관 책 빨리 찾기 대회에 나가서 1등도 했다.
나는 결국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고, 철학을 부전공했다. 아마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그때 신해철이 심어준 철학의 씨앗이 여전히 자라고 있을 것이다. 신해철의 음악에는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깊은 사유의 층위가 있었다.
<그대에게>에서도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라는 가사는 그냥 사랑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극한 상황에서의 선택, 조건 없는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었다. 당시 대학가요제 참가곡들이 대부분 '예쁜 사랑', '아픈 이별' 수준에 머물렀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10대 시절, 밤에 듣던 라디오는 우리에겐 학교 이상의 학교였다. 특히 신해철의 라디오는 거의 '야간 철학 아카데미'였다.
낮에는 친구들이랑 웃고 떠들다가도, 밤이면 신해철 목소리에 잠 못 드는 삶. 그는 음악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었다. 그 밤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의 라디오는 단순히 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취자들과 함께 세상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1990년대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철학적 성찰을 대중과 나누는 살롱이었다. 밤 시간대 라디오라는 매체의 특성상, 그의 목소리는 청취자들의 가장 내밀한 공간까지 스며들어 일종의 '철학적 상담'의 역할을 했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갖는 마법이 있다. 화면 없이 오직 목소리만으로 만들어지는 친밀감. 그 어둠 속에서 신해철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졌고, 그의 생각들은 더욱 깊어졌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만난 87학번 언니들은 당시 신해철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했다.
"쟤는 왜 방송 나와서 뻔한 얘기 하냐…"
지금 생각하면, 그 언니들은 이미 오후 3시였고, 나는 새벽 4시였다. 시간차가 나면 같은 풍경도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언니들은 서울의 대학생이었기에 특권적 시각을 누렸던 것이다. 1987년이 끝난 대학가의 자유분방함을, 지방의 중고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에겐 그 '뻔한' 이야기조차 처음이었고, 계시였다.
언니들은 이미 오후 3시의 햇볕 아래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새벽 4시의 어둠 속에서 첫 빛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1988년이라는 시점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87년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온 직후, 88 올림픽을 앞둔 국제적 주목 속에서,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무한궤도의 등장은 단순한 음악적 사건이 아니라 문화적 세대교체의 신호탄이었다.
문화의 속도는 지역마다 달랐다. 서울 대학 가는 이미 '문화적 중심부'가 되어 있었고, 지방의 중고등학교는 여전히 '문화적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 격차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렬한 충격이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학생이 되어 신해철의 1992년 솔로 앨범을 워크맨으로 들었다. 그 앨범은 넥스트 2집이었다. 락, 전자음악, 독백이 뒤섞인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작이었다.
자습시간 음악을 들으면서 공무하고 있으면, 물리 전공 담임선생님이 내 워크맨을 압수하시곤 했다. 하지만 나중에 되돌려 주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음… 근데 너 굉장히 수준 있는 거 듣는 구만."
그 "칭찬 아닌 칭찬"에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있다.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시절의 경험은 현재의 스트리밍과는 완전히 다른 우주였다. 앨범 전체를 순서대로 듣는 것이 당연했고, 그 과정에서 아티스트가 의도한 여행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다. 신해철의 앨범은 그런 청취 환경에서 비로소 완전한 의미를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카세트테이프를 뒤집어 B면을 듣는 그 순간의 의식성. 빨리 감기로 좋아하는 곡을 찾아가는 그 설렘. 그때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바늘처럼 긴 이어폰 줄을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과정이 음악과 더 깊이 관계 맺는 방법이었다.
한국 록 역사에서 무한궤도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선배들과의 연결선을 그어봐야 한다.
1970년대 산울림의 개척
산울림이 한국 록의 토대를 닦았다. <아니야>나 <청춘>에서 보여준 것은 서구 록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용감한 시도였다. 그들은 '한국어로도 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1980년대 들국화의 정착
들국화는 한국적 서정성을 록에 접목시켰다. <행진>이나 <그것만이 내 세상>은 록의 형식 안에 한국인의 마음을 담는 작업이었다. 그들은 록을 한국의 토양에 뿌리내리게 했다.
1988년 무한궤도의 도약
무한궤도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단순히 한국적 정서를 담는 것을 넘어 철학적 사유를 록의 언어로 번역했다. 록이 단순한 오락이나 감정 표출의 수단이 아니라 사유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특히 신해철의 후속 작업들, 즉 넥스트의 실험적 시도들, 솔로 활동의 전자음악 탐구를 살펴보면, 그는 일관되게 한국 록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1992년 솔로 앨범 <Myself>는 일렉트로니카 요소를 도입한 실험작이었고,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시도였다.
1988년 당시에는 녹화나 다시 보기가 불가능했다. 대학가요제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지금 여기'의 사건이었다. 놓치면 끝이었다. 이러한 일회성이 그 경험을 더욱 강렬하고 소중하게 만들었다.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역시 그런 '한 번뿐인 경험'의 강렬함 속에서 각인되었고, 그래서 더욱 신화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그 순간을 공유한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지금의 무한복제 시대에는 모든 것이 다시 볼 수 있고, 언제든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그 순간의 특별함은 희석된다. 1988년 10월 15일 밤의 경험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귀중하다.
2014년.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그해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했고, 저녁시간이면 나는 혼자였다. 그때, 그의 부재는 단순한 팬심 이상의 실존적 슬픔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는 울었고, 다짐했다. 남은 내 생애를, 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고.
신해철의 죽음은 한국 음악계에 거대한 공백을 남겼다. 그의 부재는 단순히 한 음악가의 죽음이 아니라, 한국 록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음악과 사유는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신해철의 경우, 그의 음악이 얼마나 앞서갔는지, 그의 사유가 얼마나 깊었는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2024년 현재,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는 여전히 한국인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살아있다. 그 전주 리프는 하나의 '문화적 원형'이 되어 세대를 넘나들며 전승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향수나 추억이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이 도달한 하나의 원점을 보여주는 증거다.
최근 K-pop의 전 세계적 성공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 성공의 뿌리 깊은 곳에는 신해철과 무한궤도가 만든 '생각하는 대중음악'의 전통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BTS가 빌보드를 뒤흔들 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네가 여기까지 왔구나, 그대에게."
BTS의 <Spring Day>에서 보이는 사회적 메시지, IU의 <Through the Night>에 담긴 철학적 사유, 심지어 래퍼들의 가사에서 느껴지는 자기 성찰이 모든 것들이 무한궤도가 시작한 지적 성찰의 계보 위에 서 있다.
K-pop이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문화적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그 안에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깊이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1988년 10월 15일 밤, MBC 홀의 무한궤도에 닿는다.
상업성과 예술성의 균형, 대중성과 깊이의 조화—이것이야말로 신해철이 평생 추구했던 것이고, 지금의 K-pop 아티스트들이 계승해야 할 DNA다.
어쩌면, 그 시절 내 마음에 이런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숨 가쁘게 살아가는 순간 속에도
우린 서로 이렇게 아쉬워하는 걸
아직 내게 남아 있는 많은 날들을
그대와 둘이서 나누고 싶어요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어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나는 그대 숨결을 느낄 수 있어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
지금 이 가사를 다시 읽어보니 알겠다. 이 노래는 사랑 노래인 동시에 음악에 대한 맹세였다. 신해철이 음악에게, 우리가 그 음악에게 하는 약속이었다.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
그날 거실에서 뛰었던 열두 살 아이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는 한국 록이 만들어낸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순간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지금도 살아있다.
2024년 현재도 신해철은 내 플레이리스트에 있다. 스포티파이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것도 아니고, 유튜브가 자동재생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선택해서 듣는다.
그것은 1988년 10월 15일 밤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진정한 음악의 힘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대화를 계속하는 일이다.
그날 이후, 내 안에서 그 노래와 나는 수천 번도 더 대화를 나눴다. 거실에서 뛰었던 그 아이는 아직도 내 안에서 뛰고 있다.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야근 후 빈 사무실에서, 여전히 그 리듬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리고 그 떨림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