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을 닮은 한 사람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언제나 나의 산책길에 동행한다. 우리는 벌써 5년 전 혼인서약에서 언제까지나 함께 산책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의 ‘산책자’이다.
그 약속의 증인이 된 결혼식의 주례는 전국에 걷는 길 열풍을일으킨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었다. 제주올레에서 오랜 봉사를 해온 나와, 올레길에서 만난 우리의 인연을 듣고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두 사람은 함께 산책하는 즐거움을 잊지 않고
서로 좋아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을 함께 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일상을 나누는
친구 같은 남편, 친구 같은 아내가 될 것을…
지금 이 마음 이대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때때로, 아니 주말부부인 탓에 대부분의 일상을 함께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함께 산책할 수가 없다. 그림 속의 이 날은 지난 설 명절 연휴였다. 우리는 오랜만에 찾은 서귀포 도심을 걷다가 천지연폭포 쪽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라아무도 없었다.
천지연폭포로 가는 작은 숲길, 지역주민이나 알법한 숨은 숲길로 접어들었는데, 우리를 조금 앞서 가던 누군가 공원 안내소 직원이었는지 문을 열어 두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덕분에 갓 문을 연 아무도 없는 오래된 숲을 천천히 산책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과로로 지친 상태가 지속되던 중에 서귀포에서 일주일을 지내면서 묵은 도시의 독을 천천히 빼내고 있었다. 일단 많이 잤고(이른 아침 산책을 하고 잠을 자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주로 오래 걸었다.
며칠 동안 쉼 있는 하루하루를 보낸 덕분인지 이날은 그가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는 초록을 닮은 사람이다.
초록은 한결같지만 계속 변화한다. 봄에는 연초록 잎이었다가 여름에는 짙푸른 색을 띤다. 겨울이 오면 약간은 옅어진다. 초록이 가득한 깊고 오래된 숲에서 그는 자연스럽다.
서귀포에서 우리가 산책하는 최애 코스는 천지연 폭포로 가는 옛길만큼이나 좋아하는 새연교 가는 길이다. 새연교 안 쪽 새섬 입구에 한라산이 잘 보이는 벤치를 나는 무척 좋아한다.
서귀포에 가면 거의 매일 한 번은 이곳에 앉아 오늘은 한라산이 잘 보이네, 조금만 보이네, 안 보이네를 읊조린다. 이날 한라산이 보였는지, 얕은 구름으로 조금 가려졌는지, 뭉게구름으로 덮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연휴 동안 머문 매일매일 우리는 새연교에 갔으니까.
새연교를 지나 닿는 이 휴게공간에는 음악 벤치가 있다. 서귀포 칠십리부터 감수광, 클래식까지 참으로 맥락도 없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곳을 지나 새섬 산책로에 접어들면 숲길을 지나 바다에서 서귀포항을 보는 듯한 뷰를 제공한다.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봄날의 햇살 최수연과 권모술수 권민우는 술을 사러 나왔다가 야경에 이끌려 새연교를 걷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를 보다가 깜놀하는 순간이란 이런 것. 나의 최애 공간이 이렇게 공개되다니…
한편, 나의 동행인이자 산책자는 종종 내가 ‘처음’ 시도하는 인물화의 주인공이 되어 잦은 시련을 맞곤 했다. 형태도, 구도도, 원근도… 그 무엇도 맞지 않아 언제나 실물보다 늘 ‘몬나게’ 그려주곤 했는데, 이번 초상화엔 본의 아니게 실물보다 눈이 좀 더 커졌다.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로 시작하는 정호승 시인의 시 <방문객>은 그의 과거, 현재, 미래,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인생이 오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이어지는 구절이 널리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은 덜 알려진 이 시의 뒷부분이 더 좋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가을이면 이 시에 담긴 부서지기 쉬운,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에 대해, 이어지는 환대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게 되곤 했다. 가을이 오고 있다.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 모두에겐 환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