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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경 Jul 24. 2023

잘 가, 나의 세이코

어머니의 시계가 된 세이코(Seiko) SPB241


잘 가, 나의 세이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팔려고 올려둔 시계가 있다고 어머니께 말했던 그 순간, 어머니는 언제나와 같은 평온한 말투로 "그래? 무슨 시계인데?"하고 물으셨다. 나는 이 시계를 팔려고 한다며 사진을 보여드렸고, 어머니는 사진을 가만 보시더니 "흥정을 해볼까?" 하셨다. '죄송하지만 네고는 어려운데요'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상대였다.


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내가 굉장히 종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갑자기 사람을 불러 좋아하는 옷이 있으면 주겠다 해놓고, 막상 옷을 골라가면 일주일 뒤에 역시 안 되겠다며 돌려달라고 말하는 것 말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주지 않았으면 기분이 나쁘지라도 않지, 당하는 상대방 입장에선 내가 줬다 뺏는 것인 데다가 심지어 '뭐래, 이미 줬잖아'하고 안 줄 수도 없는 입장이라서, 그냥 이 쫌스러운 놈에게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다며 물건을 돌려주게 되는 것이다.


시계를 뺏긴 것도 아니고 시계를 판 것도 아닌 이상한 상황. 나는 주기 싫다는 마음과 드려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어머니의 손목에 맞게 시계줄을 조정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시계알도 그렇게 크지 않아서 어머니의 손목에도 잘 어울렸고, 이미 비슷한 시계가 있으셔서 사용법도 알고 계셨으며, 혹시 고장이 나더라도 공식 업체에서 수리가 가능했다. 시계 자체도 전천후 탐험가용 시계를 지향하는 만큼 어머니의 어떤 순간에도 함께 할 수 있을 터였다. 생각이 이쯤 미치니 아까워하는 게 이상한 지경에 이르렀고 나는 내 조금 낡은 중고 시계를 어머니 손목에 채워드렸다.


이렇게 나는 어머니께 시계를 쾌척하는 듯했으나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돈을 조금은 받아야겠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셨다. 그랬다가는 또 제 발이 저려서 3시간 뒤에 결국 안 받는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야 이런 나를 오랫동안 보셨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나와 맺은 시간이 적다면 누구든 아마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맷돌로 저놈의 머리를 찍는다면 더 이상 말을 바꾸지 못하겠지 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왜인지 시계를 드리는 그 순간만큼은 나도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비록 평소보다 저렴한 가격에 얻어서 만족스러웠고, 때로는 손목에 차고서 같이 잠들었으며, 내가 사무실을 가든 약속을 가든 함께했던 소중한 시계였지만, 어머니가 요구하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시계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건에 대한 애착 혹은 집착은 언제나 내 필요보다 과하다. 손목은 하나인데 시계가 하나 초과인 순간부터 이미 내 욕망은 내 필요를 뛰어넘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부터 시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해왔고, 마침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께서 요구하셨기에 나도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드릴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시계가 아까운 마음과 아끼는 시계가 없어졌다는 아쉬움, 또 한 편으로는 시계를 잘 떠나보낼 수 있었고 동시에 그 사람이 다른 이가 아닌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뿌듯함이 서로 교차한다. 이처럼 원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어서, 그 두 마리의 늑대 중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는데, 내 늑대들은 고만고만해서 그런지 서로 왕왕 짓기만 한다. 어쩌겠는가, 시계가 아까운 것도 사실이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도 사실인데.




'물건이란 게 죄다 그렇지 뭐'하는 마음으로 왔다 떠나는 모든 것을 생각하며 나는 다른 시계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생각보다 괜찮은 글감이 될지도 모른다며 어머니의 세이코 SPB241을 사진으로 남겼다.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어머니와 세이코에게 장수와 번영과 포스가 함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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