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끼지 않는' 예쁜 시계, 알리익스프레스 브랜드 프록시마(Proxima)의 px1697
내가 아끼는 47%
나는 시계를 몇 개나 갖고 있을까? 시계 유튜브를 보거나 혹은 시계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다른 사람들이 가진 시계의 개수를 알게 될 때가 있다. 시계 애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적정한 시계의 양은 몇 개일까? 1개가 아닐까? 선물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제 돈으로 스마트워치를 2개 이상 구매한다고 해서 그게 어떤 이점으로 이어지겠는가?
물론 아날로그시계는 스마트 워치와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가장 큰 점은 디자인이 고정되는지 아니면 바뀔 수 있는지 아닐까? 다운로드하거나 혹은 원하는 대로 편집해서 화면 인터페이스를 바꿀 수 있는 스마트워치와는 달리, 기계식 시계의 다이얼은 물성을 갖기 때문에 한 푼 두 푼 모아서 커스텀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대개 바꿀 수가 없다. 나도 시계를 가져보니 그 마음을 알게 되어서 검정 시계만 차다 보니 하양 시계도 갖고 싶고, 파랑 시계를 사고 나니 왜인지 빨강 시계도 사게 되고, 요즘 유행은 초록 시계라길래 초록 시계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런 탓에 6벌이나 있는 검은색 옷 위에서 내 손목시계는 매일같이 신호등처럼 색을 바꾼다.
어디 그뿐이랴? 시계의 디자인은 단순히 색깔에만 있지 않다. 어떤 것은 초침이 가운데가 아니라 옆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스몰세컨드고, 또 어떤 것은 시간 측정 기능을 가진 크로노그래프면서, 또 어떤 것은 회전식 베젤이 달린 다이버 시계이다. 그 안에서 또 이것이 베젤 고리의 너비가 두툼하고 시계알 크기가 큼지막한 현대식 다이버 시계인지, 아니면 베젤 고리가 얇쌍하고 시계알도 조그마한 빈티지풍의 다이버 시계인지에 따라 또 다르다. 이놈의 시계 디자인 단어를 알게 될수록 시계 개수도 같이 늘어나고 있다.
과소비를 판단하는 간단한 질문이 있다고 알고 있다. 1번, 이것이 내게 없고 필요한 물건인가? 2번, 이것이 내게 없지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인가? 3번, 이것이 내게 이미 있고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인가? 보통 1번을 제외한 2번과 3번이 과소비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만약 새로운 디자인의 시계를 알게 되어서 그것을 산다면 그것은 2번일 것이고, 분명 내게 있는 디자인이면서도 사소한 디테일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소비를 정당화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다면 3번일 것이다. 물론 이 간단한 질문들마다 우리는 다음의 명제를 추가해야 한다: '내게 이를 지불할 충분한 양의 돈이 있는가?' 만약 1번을 만족하더라도 돈이 충분치 않다면 그게 과소비가 아니고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진작 위의 질문들을 했더라면 내 시계함에 이만큼 많은 시계가 있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애초에 시계함 같은 물건이 있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계가 담겨있는 내 시계함은 내가 내 통장의 배를 갈라서 만들어낸, 내 과소비의 물화된 현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계가 많은 사람이 꽤 많다. 시계 유튜브 채널의 운영자들이 지나가는 말로 던지는 개수들을 생각해 보면 못해도 세 자릿수가 넘어가더랬다. 시계 커뮤니티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시계들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100개짜리 시계함을 만들어서, 그것을 자신의 시계로 꽉 채운 사진을 커뮤니티에 올렸을 때는 깜짝 놀랐다. '저게 얼마어치야?'와 더불어서 '정말 저걸 다 차는 거야?', '저건 낭비 아니야?'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시계함을 본 주변인들도 똑같이 반응했다.
이걸 실용적인 물건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액세서리로 여겨서 그런 것인지, 시계를 계속 모으게 된다. 이건 굳이 시계뿐만도 아닌 것 같은 것이, 어떤 이는 신발을 모으고, 어떤 이는 가방을, 헤드폰을, 책을, 옷을, 그리고 다른 물건들을 모은다.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과 그로 인한 물질적 풍요, 세계의 공장의 탄생과 국제적 물류의 이동,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물건들 사이의 위계화와 그 물건의 제조과정에서 나타나는 노동착취 등등 많은 이슈가 연결되어 있겠지만, 어쨌든 물건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태어난 영향이 있을 것이다. 분명 기계식 시계는 주기적인 점검만 전제된다면 반세기를 넘어 한 세기 넘게도 쓸 수 있는 물건일 텐데, 그런 물건을 몇 개씩이나 갖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퍼백에 담아서 보관만 하고 사용하지 않는 시계들을 제외한다면 내가 20구 시계함에 담아둔 시계는 17개이다. 이것마저도 줄이고 줄여서 만들어낸 결과이다. 시계함은 위층 10개, 아래층 10개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내가 소위 '아끼는' 시계가 위층에 있다. 8개, 47%이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나는 발가락까지 깨물어야 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안 아픈 게 있긴 하다. 최근에 이걸 명확하게 인지한 계기가 있는데 이때서야 내가 무엇을 '아끼는지'의 기준도 설정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시계를 팔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갈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아래층에 있는 시계를 팔지는 않았다. 9개 시계의 모든 사진을 촬영하고, 그것을 전부 정리해서 중고 시장에 올린 뒤에, 그 하나하나마다 들어갈 노고를 생각하다 보면 그냥 관짝 옆자리에 시계함 놓을 자리를 만드는 게 낫겠다 싶은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아끼는 것과 아닌 것을 명확하게 선언한 탓인지, 내가 그 두 개를 바라보는 시선도 확 바뀌었다. 위층의 시계는 내가 아끼고 수리해서 오래오래 쓸 시계라면, 아래층 시계는 대충 어디다 확 박아서 깨져도 시계함에 1달 정도 넣어두다가 천천히 고쳐도 되는 것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어떤 시계를 차더라도 생기는 불안과 강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시계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혹시 모를 수리를 대비해서 부품을 모으고 수리비를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 있다. 평소에는 똑같던 어떤 것이 지나치게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말이다. 매일 같이 지내던 사람에게 느껴지는 낯섦 때문에, 꼭 처음 만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 드는 순간. 앤디 그래머(Andy Grammer)의 'fresh eyes'는 그래서 좋은 노래다, 오늘 차고 나온 내 아래층 시계가 여전히 예뻐 보이는 걸 보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