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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타 Jul 03. 2024

<키노의 여행>

<인과율의 나라>라는 제목은 일본의 서브컬처 라이트노벨 <키노의 여행(キノ の旅)>에서 따왔다. <키노의 여행>에서 주인공 키노(キノ)는 말하는 오토바이 에르메스(エルメス)와 함께 여러 가지 나라를 여행한다.


<키노의 여행(キノ の旅)>의 각 챕터는 키노가 여행하는 나라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의 아픔을 아는 나라>. <다수결의 나라>. <어른의 나라>. <평화로운 나라>. 키노가 여행하는 나라는 이름에 맞게 각자의 특징을 갖고 있다. <남의 아픔을 아는 나라>에서는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 나라의 주민들이, <다수결의 나라>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라의 주민들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인과율의 나라>는 내가 사는 나라의 이름이 된다.


고등학교 내내 공부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공부 자체도 어려웠지만 공부를 하는 일이 특히 어려웠다.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 자신, 마음, 정신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때리고, 굴복시켜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당시에 “원인이 좋아야 결과도 좋다”는 의미를 담아 <인과율의 나라>라는 말을 책상에도, 수첩에도, 공책에도 적어두었다. 같은 반 친구가 그 단어의 의미를 물었을 때 “원인이 좋아야 결과가 좋으니까”라고 대답했다. 나는 같은 반 친구에게 <인과율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겠다고 했다.


나는 공부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던 고등학생에서, 불안증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대학원 졸업생이 되었다. <남의 아픔을 아는 나라>의 주민들이 다른 주민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결국 고립되어 생활하게 된 것처럼, <다수결의 나라>의 주민들이 다수결의 원칙으로 서로를 처형하고 결국 단 한 명의 주민만이 남게 된 것처럼, <인과율의 나라>의 주민은 원인과 결과를 너무 믿은 나머지 불안증과 강박증에 시달린다.


<인과율의 나라>는 그러므로 불안과 강박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어떤 결과가 다가올지 불안해서, 어떤 원인에 집착했는지에 대한 기록일 수밖에 없다. 불안해서 대학에 집착했고, 다이어트에 집착했고, 연애에 집착했고, 물건에 집착했고, 대학원에 집착했다.


<인과율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책을 낼 수는 없겠지만, <인과율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 기록이 어떤 미래로 이어질지 벌써부터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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