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서울에 홀로 거주하고 있다. 자취를 시작한 지 6년이 되어가고 있다. 혼자만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의 부분적인 해석이 가미된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에는 각 인물의 소개에 집중해 보자.
1994년 5월 23일 13시 20분, 내가 이란성쌍둥이로 태어났을 때, 내 가족은 총 7명이었다. 친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내 쌍둥이, 그리고 나.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재혼이었고, 형과 누나는 아버지의 이전 결혼에서 생겨난 자식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재혼 이후 나와 내 쌍둥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거의 모든 친가 쪽과 절연했다. 서너 살 무렵, 아버지와 함께 친가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다시는 그 친가에 가지 못했으니, 아마 그날이 아버지가 친가와 완전히 손절한 날일 것이다.
교사였던 친할아버지는 아버지를 학대했다고 했다. 이후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와 자수성가하여 공장을 운영하였지만(달랑 5천 원을 들고 상경하여 성공했다는 풍문이 있다), 친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찾아와 돈을 요구했다. 그런 친할아버지를 아버지가 다툼 중에 밀어버리자 친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존속상해죄로 고소했다. 이후 친할아버지는 바다 근처에서 객사하였다.
친할머니는 일본에서 사셨던 분이셨고, 친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할머니는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이름을 팔고 다니며 돈을 꾸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하루가 멀다 하고 공장에 사람들이 찾아와 어머니가 빌려간 돈을 갚으라며 소리를 쳐댔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친할머니를 끔찍하게 여겼다. 친할머니는 가끔 자기가 일본의 아쿠타가와 상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는데, 그 상금을 아직 못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다. 내가 본가를 절연하고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아버지는 이전 결혼에서 배우자의 불륜으로 인해 이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소년이었던 것 같고, 책을 좋아했다. 우리는 가끔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그가 쓴 소설 뭉치를 보기도 했으니까. 과거엔 서울로 상경하여 회사에 다니다가, 자신이 스스로 공장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경제위기(소위 IMF)가 터졌고, 아버지가 매일 밤늦게 귀가하였던 기억이 난다. 이후 공장을 처분한 돈을 들고 일찌감치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혼 이후에 어머니와 이혼하게 된 이유는 그의 불륜 때문이었다. 자신의 공장 여비서와 눈이 맞은 그는, 자신의 가족이 거주하는 곳 근처에 따로 집을 얻어서 두 집 살림을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였고, 나는 아버지와 내가 집을 나오기 전인 2018년까지 함께 살았다. 미남이었고, 화술이 좋았지만, 호색한이었고, 자신만의 가족을 꾸리고 싶었던 것 같지만 실패했다. 손재주가 좋았다. 요즘은 가끔 돈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이 자수성가하며 모은 재산이 있겠지. 요즘 다른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것 같은데, 슬슬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 같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지금 내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고, 어른이며, 스승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반대로 하자면, 어머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원에 대해 입을 털어도 상관이 없을 만큼 나는 그들과 멀어졌다. 이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나의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형은 베이시스트였다. ‘가이아(GAIA)’라는 크로스오버 밴드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때 그가 음악을 하던 사진을 보던 중에, 형에게 크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나와 나이 차이는 16살이 난다. 일본 서브컬처를 좋아했고, 음악을 하며 먹고사는 게 꿈이었으나 군대를 제대한 이후 생각을 바꾸었다. 컴퓨터를 좋아했고, 컴퓨터 수리를 잘했다. 한동안 꾸준히 공부를 하여 지방의 회사 대리점에서 근무하였고, 이후 대기업에 스카우트되었다. 자신의 팬이었던 사람과 결혼하였고 현재는 이혼한 것으로 보인다. 군대를 끔찍이도 가기 싫어했다. 나의 어머니인 계모와 사이가 끔찍하게 나빴다. 동시에 계모에게 관심받지 못했던 삶이 한탄스럽다고 얘기했던 적이 있다. 진미채만 싸줘서 화가 났다던가.
누나는 나와 나이차이가 12살이 난다. 어렸을 때부터 나와 내 쌍둥이를 돌보는 몫을 맡았다. 장난기가 많았다. 어렸을 땐 누나가 아르바이트하는 비디오 가게에 놀러 가 피자를 먹고, 게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누나에게 어머니 역할을 시키려 했기 때문이었고, 그게 부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몇 년간 누나와 연락이 끊겼다. 누나가 결혼할 즈음 다시 누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누나가 아버지에게 예의상 결혼 소식을 알리자, 아버지가 화해의 제스처로 누나의 결혼식 비용을 전부 내준 것. 누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두 딸을 낳았다. 누나랑 판박이인 두 딸의 소식을 가끔 전해 듣는다. 지금은 또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진 모양이다.
어렸을 땐 7명의 대가족이 목동 어딘가의 아파트에서 한 집안에 살았다. 이후 인천의 아파트로 이사하여 살았다. 나는 이 인천 동네에서 20살까지 쭉 머물렀다. 부모님의 이혼, 누나의 가출, 학교에서의 따돌림, 대학 진학이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부천의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고모의 죽음을 들었던 곳이었고, 여기를 떠나오면서 할머니의 죽음을 들었다.
지금 나는 서울에 홀로 거주하고 있다. 자취를 시작한 지 6년이 되어가고 있다. 혼자만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