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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hadi Oct 06. 2021

내가 노란색을 즐기는 방법


당신은 맛있는 걸 가장 먼저 먹는 타입인가. 마지막까지 아껴두는 타입인가.


우리 할머니는 과일을 항상 검은 봉지에 싸 냉장고 깊숙이 넣어두셨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다가 과일이 썩기 시작하면 그제야 많이 썩은 과일부터 하나씩 드셨다. 아니! 맛있을 때 드시지 왜 그러시는지 이해가 안 갔다. 어차피 먹을 거 왜 썩혀 먹냐며 언성을 높였는데 사실 나도 과일만 안 그럴 뿐이지 늘 아끼다가 똥을 만드는 타입이다. 역시 핏줄은 못 속이나 보다.


맛있는 건 항상 마지막까지 남겨둔다. 야금야금 먹다 보면 어느새 배가 불러 가장 맛있는 걸 가장 맛없게 먹을 때도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가끔은 아끼고 아껴둔 걸 눈치 없는 누군가 잽싸게 먹어버리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하지만 좋은 걸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설렘을 포기할 수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노란색도 그렇다. 사실 우리 집에 노란색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 옷장 속 대부분은 검은색, 흰색, 회색의 무채색 계열이다. 무채색 옷을 차려입고 마지막에 노란 신발을 꺼내 신는다. 나는 이 정도가 딱 좋다. 좋아하는 색깔도 아끼고 아낀다. 쉽게 질리지 않기 위해서, 너무 흔한 색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작업실을 갖게 된다면 전체를 화이트로 꾸미고 노란색 암체어 하나만 둘 것이다. 온통 노란색으로만 꾸며진 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인생만사가 '적당히'가 최고지만 사실 '적당히'라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넘치는 것보다 부족한 것이 낫다. 무엇이든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게 좋다. 존재보다 의미가 주는 설렘이 더 매력적이다.


노란색 암체어를 힐끔 바라보는 것. 노란색 암체어에 앉아 책 읽을 시간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 일과를 할 끝내고 고요한 밤이 오면 드디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암체어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하루를 음미하는 것. 그렇게 기다리는 설렘을 즐기다가 그 순간이 오면 온전히 집중하는 것. 이 정도가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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