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모래 놀이터에 갔다. 따가운 가을 햇볕이 자비심도 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더위에 호락호락 물러설 아이들이 아니지. 그 땡볕에도 깔깔 웃으며 열심히 뛰어 논다. 그 뒤로 더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으니 신종 노예랄까.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자발적 노예들이 아직 곳곳에 남아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온 아빠, 엄마들은 자외선 쿨토시와 모자로 무장하고 열심히 파라솔을 세우고, 간간히는 작은 우산으로 최대 그늘을 만들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린다.
그들을 애처롭게 바라보지만 내 처지라고 뭐 다르겠는가. 오늘따라 인력난까지 겹쳤다. 요즘따라 바쁜 남편도 어디선가 고생하고 있을 테니 어느 정도 퉁치기로 하지만 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이라 마음 한구석이 꽁한 건 어쩔 수 없다.
아이와 단 둘이 집에 있는 건 너무 위험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게 느리게 흐르는 시간, 수시로 열리는 간식 상자와 배달어플, 텔레비전을 보여달라며 떼쓰거나 갑자기 수가 틀려 막무가내 짜증 내는 아이, 이 모든 것이 겹치고 겹쳐 결국 끊어지는 내 이성의 끈. 그리도 좋은 엄마 역할에 실패했다는 자괴감까지.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잠깐이라도 나오는 것이 현명한방법이다.
아이를 모래 놀이터에 앉히고 모래놀이 장난감 세트를 쏟아낸다. 쓱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른 집 모래놀이 장난감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난다. 모래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인데 어쩜 저리 깨끗할까? 꼬질꼬질한 우리 집 모래놀이 장난감을 잠시 바라보다 모래놀이 장난감이 모래놀이 장난감다운 게 뭐 어떠냐며 모르는 체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영원히 모를 계획이다.
드디어 내 비장의 무기를 꺼낼 차례다. 노란색 스마일 파라솔. 노란색 파라솔에 스마일이 그려져 있다. 스마일은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다. 타고난 투덜이이자 염세주의자는 나는 종종, 때론 너무도 순식간에 부정적인 생각에 빠진다. 모든 상황에서 다양하고 창의적인 최악의 변수를 떠올리고 세상의 온갖 불안과 시름을 수집한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나는 이런 인간인걸 인정하기로 했다. 자꾸 부정적이고 불안한 생각에 빠지다 보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모든 게 무섭고, 인생이 허무하기만 한 늪의 시기가 오는데 이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곳곳에 노란 스마일 모양을 심어둔다. 휴대전화 케이스에도 노란 웃는 얼굴, 손목 팔찌 위에도 노란 웃는 얼굴, 그리고 이 땡볕의 고난 앞에도 파라솔 위 노란 웃는 얼굴. 이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꽤 도움이 된다. 노란 스마일은 내게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라는 정지 버튼이 되어준다. "자자. 이봐요. 잠깐 STOP! 뭐 그리 힘들게 살아요? 그럴 필요 없잖아요. 아무 생각 말고 잠깐 쉬어요." 잠깐 생각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살만한 기분이 든다. 신이나 덩실덩실 춤출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스며든다.
노란색 스마일 파라솔 아래 의자를 편다. 따가운 햇볕 아래로 시원한 그늘이 생겼다. 얄미운 햇볕 덕에 생긴 그늘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기만 한 아이는 쉴 새 없이 바쁘다. 덥고, 발은 모래 때문에 지저분해지는데 뭐가 그리 즐거울까. 주변을 둘러보니 각양각색의 표정들이 눈에 들어온다. 잔뜩 찡그린 표정, 세상 즐거운 표정, 몹시 집중한 표정. 깔깔 웃는 표정. 모두 똑같이 뜨거운 햇볕 아래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찌푸린다. 뭐.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굳이 짜증내고 있을 필요 없지.
돌아오는 나들이 가방은 언제나 처음보다 가볍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마셔야지.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아이가 낮잠을 사준다면 더욱 좋고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밤잠은 빨리 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