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손해 볼 것 없는 풍수지리 5) 중국황실이 사랑한 꽃중의 왕 모란
풍수에서 꽃 중의 왕으로 불리는 모란꽃은 거실에 두면 좋은 기운을 불러온다고 전해진다. 생화뿐만 아니라 모란 그림도 집에 두면 부와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하여 ‘부귀화’라고 불렸다. 화려하고 큰 꽃잎이 당당한 위엄을 지닌 모란은 자연스럽게 좋은 기운을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단순히 아름다움만으로 1400년 넘게 동아시아에서 행운과 부귀의 꽃으로 여겨졌을까? 그 답은 모란의 원산지인 중국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모란을 재배식물로 키우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수나라(581년~619년) 시기로, 황실에서 모란을 즐기기 시작한 이후 그 사랑은 민간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귀족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모란이 널리 소비되며, 모란은 점차 부와 번영을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 잡았다.
당나라 (618년 ~ 907년)의 모란은 하나의 문화였다.
모란에 대한 수요가 황실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확대되자 모란재배에 뛰어든 사람들도 늘어났다. 수요와 공급이 발맞추어 증가했고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당나라에서는 화려한 모란의 인기가 최고조를 달했다. 궁중 여인들은 저마다 머리에 모란꽃을 꽂았고, 모란이 만개하는 5월이 되면 황실과 민가에서 모란구경을 하러 장안에 나서는 말이 만 마리였다고 한다. 당나라 장군은 모란이 필 무렵에는 시인들을 집으로 불러 모란에 대한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란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는 아니었다. 그 가격이 너무 비싸 모란은 부유층에서만 소비할 수 있었다. 장안에서는 부유층들의 집과 정원을 모란으로 꾸며주는 전문 인테리어 업자들이 성행해 중산층으로 자리 잡았고, 모란 봉오리가 피기 시작하는 3월이 되면 전국 모란경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1등을 한 모란은 수도였던 장안의 집 한 채 값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였다. (참고로, 모란이 만개하여 시들기까지의 시간은 평균 2,3 일이며 길어도 7일이다.) 모란은 그 아름다움과 더불어 고가의 가격으로 인해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그 위상은 당나라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당나라 대표 시인중 한 명인 백거이는 당시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나타낸 풍유시 <진중음>에서 매화(買花)라는 시를 통해 이러한 상황을 그려내기도 했다.
..모두들 모란의 계절이라면서
줄지어 모란꽃을 사 들고 가네
..집집마다 버릇 되면 풍속이 되니
사람들도 현혹되어 깨달을 수 없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산다는 노인
우연히 모란을 사고파는 곳에 와서
고개를 떨어트리고 깊이 탄식해보지만
노인의 탄식을 알아듣는 사람 없네
한 무더기 아름다운 모란꽃 값이
웬만한 살림 열 집의 세금이라니
출처: https://blog.naver.com/moyangsung/102520705
송나라(960년 ~ 127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길상성으로서의 모란
길상성이란 중국문화에서 복을 부르는 행운의 기운을 의미하는 말이다. 송나라의 유명 학자인 주돈이라는 사람이 애련설이라는 산문에서 모란은 꽃 중에 부귀한 꽃이다라고 한 뒤로부터 모란은 행운을 부르는 꽃이 되었다. 이 부분에서 약간의 오해가 있었구나 싶었다. 주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왜 주돈은 모란을 부귀한 꽃이라고 했을까? 그 이유는 한시에 적혀있지 않다.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첫째는 모란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부유한 사람들만 살 수 있는 꽃이었기 때문에 부귀한 꽃이라고 했다는 가설이다. 두 번째는 모란의 모습이 화려하기 때문에 모양만 보고 부귀한 아우라를 내뿜는다는 뜻에서 부귀한 꽃이라고 했지 않았을까 싶다. 내 생각에는 첫 번째 이유였을 것 같은 게, 모란을 묘사한 바로 다음 구절에서 자신은 진흙탕에서 피어난 군자 같은 연꽃이 좋으며 나처럼 연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고, 다들 모란만 많이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해해~ 라고 표현한 것에서 은근히 모란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흘겨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돈은 아마 남들이 다 좋아하는 건 안 좋아하고 싶은 유형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유야 뭐였 든 간에, 주돈은 모란을 가지면 행운이 온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주돈은 모란을 그저 자신의 느낌대로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후 주돈의 애련설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사람들은 모란은 부귀한 기운을 지닌 꽃이구나라고 해석해 버렸고, 모란은 길상성을 지닌 꽃이 되었다.
청나라(1644년 ~ 1912년) 모란으로 강희제를 유혹해 형들을 제치고 황제가 된 옹정제 이야기
실제로 모란을 이용해 행운을 가져와 자신과 아들의 인생을 바꾼 역사가 있다. 청나라 건륭제에 관한 이야기다. 청나라의 황금기는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로 이어지는데, 황금기의 기반을 닦은 강희제에게는 아들만 35명이 있었다. 강희제는 황실의 정원을 지어 아들들에게 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후계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 아들들은 강희제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강희제가 자신의 정원에 방문하는 것을 고대했다. 4번째 아들인 윤진은 원명원이라는 정원을 받았다. 윤진은 원명원에 모란대를 만들어 모란을 아름답게 가꾼 후 꽃이 만개한 1722년 5월 10일 아버지 강희제를 초대해 모란꽃 감상회를 열었다. 윤진이 아버지를 모셔오기 위해 자신의 정원에 얼마나 많은 모란들이 심어져 있는지,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강희제에게 어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사실 윤진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윤진은 모란 감상회를 핑계 삼아 강희제에게 자신의 똑똑한 12살 아들 홍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록에 의하면 강희제의 손자인 홍력은 용모가 아름답고 영특하여 누가 보아도 황제감이었던 것 같다. 강희제에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어필할 수 없으니, 모란 감상회로 아버지를 유인하여 자연스럽게 손자와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모란 감상회에서 아름다운 모란을 보고 이미 기분이 좋아졌을 강희제는 특출난 손자 홍력을 만나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이 날 이후 7개월 동안 강희제는 손자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손자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결국 강희제는 자신의 아들 윤진을 다음 황제로 정하고 세상을 떠났고 윤진은 옹정제가 된다. 강희제가 윤진을 다음 황제로 정한 진짜 이유는 손자인 홍력을 그다음 황제로 세우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옹정제는 홍력에게 황제를 물려주었고, 홍력은 건륭제가 되어 청나라를 63년이나 통치하며 나라의 황금기를 이끈다.
한반도로 퍼진 모란꽃과 모란의 의미
옛날에는 중국에서 유행한 것들은 대개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퍼졌다. 모란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에 모란이 전해진 것은 신라 진평왕 시기 (579년 ~ 632년)이다. 이때는 당나라 시기인데, 아마 당나라로 유학간 신라시대 귀족 자제 혹은 상인이 당나라에 부는 모란 열풍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신기해서 여행 선물로 모란을 가져와 자랑한 것이 아니었을까?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도 모란이 인기를 얻은 것은 고려시대(918년 ~ 1392년)부터라 한다. 당시는 송나라였는데, 송나라에서도 모란은 황실과 민가에서 모두 인기가 높았으니 송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던 고려에도 자연스럽게 모란이 유행하게 되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부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모란을 사랑한 왕들의 기록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그 시작은 대궐에 직접 모란을 심어 신하들과 함께 감상하는 것을 즐긴 고려 현종이었고, 이후로도 조선 태종과 연산군, 성종 등이 모란을 애정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모란꽃만 넘어온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길상성의 의미까지 넘어 왔을터, 모란을 집에 두면 행운이 온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아지자 모란병풍, 모란화병 등의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란의 길상성을 조선시대 사람들이 믿었다는 증거는 경기도 성주굿의 사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주굿은 집안의 길흉화복을 관할하는 성주신에게 재앙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해달라고 비는 굿인데, “모란병풍에 인물병풍, 화초병풍을 얼기설기 쌍으로 쳐놓고…” 라는 것으로 사설이 시작한다. 송나라 주돈에서 시작한 한 마디의 나비효과가 조선시대 굿까지 이어진 것이다.
배산임수 명당터처럼 지리적인 이유가 있는 풍수는 이해가 잘 되는 편인데, 모란처럼 어떤 꽃에 풍수적인 의미를 두는 것은 왜 그런지 잘 이해가 안 갔었다. 꽃은..그냥 예쁠뿐이잖아?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모란이 좋은 기운을 가진 꽃이라고 생각해 왔을지 궁금했었는데, 역사에서 나만의 해답을 찾았다.
당시 당나라 송나라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은 집값만큼 비싸 자신들은 가질 수 없는 모란이라는 꽃을 동경했을 것이다. 어떤 집에 모란이 있다고 하면 아, 저 집은 부잣집이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일하느라고 바쁜데 한가히 꽃놀이를 가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부러웠을까 짐작이 간다. 부자였기 때문에 모란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부유층을 중심으로 유행이 되어 모란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부자들이었으니 사람들의 눈에는 어느덧 모란을 가지면 부자가 된다라고도 생각했을 것 같다. 이에 당시 인플루언서였을 주돈의 한 마디까지. 텍스트로 박제되어 모란은 부귀한 꽃, 꽃 중의 왕이 되었다. 이런 흐름으로도 풍수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 정말 흥미롭다. (물론 내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다.)
지금도 여전히 개업선물, 집들이선물로 모란꽃, 모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다. 시작은 오해였을 수 있어도, 나는 13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기대를 받아 왔으니, 모란에게는 정말 그런 기운이 생겼으리라 생각한다. 모란꽃은 빨리 지기 때문에, 풍수적인 의미로 선물을 할 때는 모란화가 더 좋다. 모란화를 선물할 때는 잎이 크고 겹겹이 겹쳐지게 그린 것을 고르는 게 좋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