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디자인은 내게 그저 돈을 벌어주는 수단의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나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속옷 디자인에 뛰어든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 나의 시작은 텍스타일 디자이너였다. 다양한 분야의 업체와 원단을 보고 만지며, 수만가지의 패턴을 고민하고 그림을 디자인으로 완성하는 디자이너. 이 과정이 나는 너무 즐거웠다. 그 중에는 국내 굴지의 속옷회사의 텍스타일도 우리회사에서 디자인작업을 했다. 셀렉된 디자인으로 제품이 진행이 되면 업체에서는 간혹 완성된 제품을 들고 와서 선물로 주곤 했었다. 신입 디자이너였기에 그 모든 과정이 그저 신기하고, 재밌었기에 업무의 단점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러다 점차 경력이 쌓이고, 준비했던 디자인이 여러단계의 컨펌을 거치며, 처음에 기획했던 A가 C도 아닌 D가 되는 결과를 보며 어느순간 내가 하는 일에 지쳐가고 있었다. 시중에 조금만 인기 있는 브랜드가 생기면 그 브랜드와 비슷하게 만들어야 하는 반 강제성을 띈 반복된 작업, 상업성에 어쩔수 없이 익숙해져 가면서, 점차 내안에 중요한 무언가가 자꾸 흩어지는듯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당시 엄청 유행했던 '쿵푸팬더' 캐릭터 수백개를 그렸다 수정했다를 반복하며 여기서 좀만 더 주인공 '포'의 털가닥을 그리다간, 그 털들처럼 내 속이 다 뒤집어질 것 같아서 실장님께 허락을 맡고 동료와 함께 콧바람을 쐬러 곧장 시장조사를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새로운 분야를 만나게 되었다!
한 속옷 매장에 들어섰을 때, 그 시즌에 맞춰 작업했던 나의 텍스타일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브라, 팬티, 란쥬, 홈웨어 등 다양한 제품들이 가득 진열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짧은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디자인한 원단이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져 누군가의 일상에 함께한다는 사실이 그동안 단순히 텍스타일 디자인만 했던 나에겐 너무나도 신선한 신세계!! 그냥 너무너무 해보고 싶었다. 제품디자인!!
속옷디자인은 실질적으로 그 제품이 고객의 삶 속에서 밀접하게 사용되어지기에 더 점진적이고 중요하게 세밀히 작업해야 된다는 것이 텍스타일과는 색다른 점이었고, 그 모든것을 직접 내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매장을 보고 난뒤엔 정말 간절했다. 자연스레 나의 꿈은 속옷디자이너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있어 디자이너로서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나의 디자인이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든다는 것에 벌써 난, 혼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속옷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을 때, 나의 텍스타일 경력은 5년여를 향하고 있었다. 연륜이 있는 많은 선배분들의 반대도 있었고, 나역시 아쉬울 게 크게 없었던, 편한 직장생활과 대리의 직급을 내려놓고 신입으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게 두렵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정말 간절하게 속옷이란 새로운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었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정이 충만해 있었다.
그리고 그땐 열정과 패기가 넘치던 20대! 나이도 어렸으니까! 하하!! 또 워낙에 좀 긍정적이어서 기존의 경험을 발판 삼아 더 나은 디자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두려웠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텍스타일 디자이너로서의 경험은 나의 강점이 되었고, 나는 이 경험들을 통해 속옷 디자인분야에 더 빠르고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보통은 많은 시간을 가만히 앉아서 작업을 했던 텍스타일과는 다르게, 속옷 디자인은 매 순간 뛰어다니며 일을 해야했다. 당시에 신입이었어서 더 그런것도 있었겠지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새가 없었고 모든걸 스스로 다 해내야만 했다. 제일먼저 출근해서 제일 늦게 퇴근했던 신입디자이너. 그래도 너무 신났다! 그때의 첫 명함! 속옷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뎠던 회사에서 받은 첫 명함을 아직도 나는 간직하고 있다.
일러스트를 그려 패턴실을 이용하는 아우터 디자인과는 다르게 속옷디자이너는 각 브라와 팬티등의 패턴을 직접 다 손으로 뜨고 그리고, 그레이딩을 한다. 가패턴으로 샘플을 만들기위해 직접 재단을 하고 샘플실에 넘긴뒤, 제품이 만들어지면 피팅을 거쳐 다시 또 수정을 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서 여러과정을 거쳐 본작업을 준비해간다. 컨셉에 어울리는 색상으로 자재 또한, 직접 염색해야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특히 패턴을 뜰 때에는 3mm의 차이로도 피팅감이 달라지기 때문에 굉장히 섬세한 패턴의 기술력을 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거북목이 되어서 책상 패턴위에 코박고 패턴을 떠야하지만 나는 이 작업이 너무 좋았다. 신체의 곡선을 유연하게 고려하면서도, 착용감을 최대한 편안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 과정! 또한 유관부서들과의 업무가 많기 때문에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도 굉장히 중요했다. 많은 이들이 좋은 마음으로 합심해서 한 시즌을 끝내야 우리의 제품이 탄생한다.
출시된 제품들은 고객들의 직접적인 피드백으로 즉각적으로 평가를 받았고, 그 순간순간에 느꼈던 뿌듯함과 질책은 나의 디자인을 한단계 더 성장시키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매순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내가 만든 디자인이 나의 의도대로 고객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칠까?",
"왜 나는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걸까?"
잘된다고 자만하지 않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비관하지 않으며 늘 겸손하게 이 두가지 질문을 되뇌이며 일을 하다보면, 어느순간 나의 의도대로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피드백을 받게 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내가 왜 이 일을 지치지 않고 계속 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답 또한, 얻게 된다.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고 멋진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일상을 더 편안하게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작업이다.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가치를 더해주는 디자인, 누군가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좋은 디자인이다.
속옷 디자인을 하며, 나는 옷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더 깊이 깨달았다. 속옷은 그저 피부에 닿는 옷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하루를 편안하게 지탱해주는 시작이다. 이처럼 디자인은 사람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작업을 하는데 있어 더욱 큰 책임감과 보람을 느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디자인에 대한 관점도 조금씩 변해갔다. 예전에는 외적으로 매력적인 디자인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 디자인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얼마나 그들의 삶에 심미적으로, 기능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편안한 기능성을 더해,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주는 데 진정한 가치를 두는 것. 그리고 그 좋은 의도를 담아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여전히 나에게 큰 즐거움이다. 10년이 훌쩍 넘어 질릴 법도 한데, 아직도 나는 이 일이 너무 재밌다.
디자인의 본질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삶에 변화를 주는 데 있다. 내가 만든 속옷이 누군가의 몸과 마음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면,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의 본질이다. 고객들이 내 디자인을 통해 편하게 일상을 지낸다거나 자신감 얻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벅차다. 단순한 옷 한 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디자인. 그것이 진정한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디자인을 하면서 겪었던 고뇌와 갈등의 순간들은 이러한 디자인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다보면 시원하게 해소가 될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한 방향이 틀리지 않았구나. 내 디자인이 그들의 일상에 도움이 되고 있구나.'라는 안도감과 감사함.
지금의 나는 텍스타일에서 속옷 디자인으로, 그리고 잠시 멈춰 디자인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보는 단계에 와 있다. 디자이너의 길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했지만, 그 녹록지 않은 과정 속에서도 크고 소중한 즐거운 순간들 또한, 많았다. 동시에 나를 끊임없이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았음을,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앞으로도 나는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치를 늘 생각하며, 그들이 추구하는 필요성과 편안함 속에서 나 자신도 함께 성장해가기를 바란다. 디자인은 언제나 고객의 마음에서 시작해 그들의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된다. 사람들의 일상에 가치를 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디자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디자인을 하며, 이 길을 계속 걸어가고자 한다.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옛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노니 이제 새 것이 솟아나니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이사야 43:18-19>